지난 달 5월은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우리 불교계로도 그렇고 의미 있는 일이 많았던 달이었습니다. 불교적으로는 연등축제를 성황리에 치러냄으로써 한국을 대표하는 축제 중의 하나로 확고히 자리매김을 했을 뿐 아니라 불기 2551년 부처님오신날 봉축법요식 또한 그 어느 해보다도 성대하게 마무리를 했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불지종가(佛之宗家) 통도사(通度寺)의 주지에 추천된 달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뜻 깊은 5월을 보내고 산야대지에 신록의 짙푸름이 더욱 깊어가는 6월을 맞이하면서 「현상(現想)과 본질(本質)」이라는 명제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반야심경(般若心經)에 색즉시공(色卽是空)이요, 공즉시색(空卽是色)이란 말씀이 있습니다. 즉 색이 공과 다르지 아니하고 공 또한 색과 다르지 않다는 말씀인데, 여기에서 색은 어떤 의미이며, 공은 또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색이라고 하는 것은 현상을 말하고 공이라고 하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본질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현상을 떠난 본질이 있을 수 있습니까? 또 본질을 떠난 현상은 존재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은 이분법(二分法)으로 보면 나누어져 있는 것 같지만 이(理)와 사(事)가 둘이 아니기 때문에 현상 속에 본질이 함께 합류하고 본질 속에 또한 현상이 함께 하는 것입니다.

이는 열반경(涅槃經)에 「부처님이시여, 마치 눈이 스스로 보지 못하고 손가락이 스스로 찌르지 못하고 칼이 스스로 깎지 못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스스로 받지 못하는 것인데, 어찌해서 부처님은 명(名)과 색(色)이 명과 색을 속박한다고 말씀을 하십니까?」라는 구절과도 같은 뜻입니다.

지난 5월 통도사에서 후임주지로 선택을 받은 뒤 제일 먼저 가사장삼을 수하고 부도전을 참배하였습니다. 거기에는 돌아가신 노스님 월하큰스님으로부터 나의 은사스님은 물론이고 경봉 노스님, 벽안 노스님 등 근대불교 40년 동안에 내가 친견했던 어른스님들도 여러분 계시며 통도사 개산(開山)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통도사를 가꾸고 지켜온 선조사(先祖師)스님들이 모두 계신 곳입니다.

그 곳에서 나는 월하노스님으로부터 조사스님들을 차례로 참배를 하면서 ‘부처님의 제자가 10대제자, 500제자, 1250제자 등 수없는 제자들로 이어오면서 여기까지 왔구나.’하는 생각을 하니 새로운 감회에 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깊은 책임감과 중압감도 함께 지니게 되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지난 몇 년간 통도사는 월하 노스님이 열반하신 후 방장스님을 제때 모시지 못하는 등 어수선했었습니다. 또 방장스님을 못 모셨기 때문에 총림(叢林)의 성격상 주지스님 또한 제대로 선출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대중스님들이 만장일치로 주지 소임을 맡겨준 것이어서 그동안 살아온 내 모습이나 앞으로 살아갈 모습이 그 안에 담겨있는 듯하여 더욱 어깨가 무거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화합하는 불지종가(佛之宗家)의 사찰이 되도록 노력을 해야겠다고 다짐을 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8년간의 나를 되돌아보면서 부도전을 내려오다가 불자가 나누는 대화 속에서 나는 그만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불자들이 나눈 대화는 「맛있는 음식을 먹어본 사람만이 맛있는 음식을 만들 수 있다.」는 아주 평범한 말 이였지만, 그러나 나는 그 불자들의 대화를 듣는 순간 「다시 한 번 내 마음을 다잡아주기 위해 은사스님과 월하노스님께서 그런 대화를 하도록 해주신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돌이켜보면 지난 98년, 종정스님의 교시를 받들고 종단 제도권 안에서 바른 말을 하다가 어려움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로 인해 8년이라는 짧지 않은 세월 동안 여러 가지로 어려움을 겪었던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 때 ‘출가자로서는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죽었다는 생각으로, 죽었다 다시 살아났다는 각오로 각고의 정진을 해야겠다”고 다짐을 했고 또 지난 8년 동안 그러한 마음가짐과 자세를 잠시도 놓지 않으려는 인고의 노력이 있었습니다.

내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내 곁에 언제나 함께한 불자들이 늘 그늘이 되어 주셨고 울타리가 되어 주셨기 때문에 흔들림 없이 오늘까지 살 수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생각으로 마음의 각오를 다지고 부도전을 내려오는데 때마침 내 곁을 스쳐 지나가는 대화가 내 가슴을 ‘쿵-’ 하게 했던 것입니다.

죽어 본 사람만이 진정한 삶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고, 멋들어진 옷을 입어 본 사람이 멋진 옷을 만들 수 있으며, 도를 통해 본 사람만이 도의 참맛을 느껴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 줄 수 있다는 이치였습니다.

물론 죽어보고도 죽음을 모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시집살이 한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얻고 나서 (과거 시집살이 했던 생각을 하면서) 며느리에게 장단점 보완해서 더 혹독한 시집살이를 시키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시집살이를 했으면 며느리에게는 시집살이를 시키지 말아야 하는데, ‘너도 한 번 당해봐라’는 마음이 작용한다면, 그래서는 안 됩니다.

12연기법(緣起法)에 의하면 미혹(迷惑)한 세계의 인과관계(因果關係)는 무명(無明)이라는 무지(無智)로 인해 슬픔, 근심, 걱정, 고통, 괴로움이 수반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한 번 생각을 바꿔 살펴보십시오. 명(明)이 무엇입니까? 명은 곧 지혜를 뜻합니다. 따라서 지혜로운 밝음이 있으면 거기서 진행되는 것은 태어나서 늙고 병들고 죽고 근심걱정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괴로운 마음은 없다는 것입니다.

열반경에서도 “불자들아, 명과 색도 그와 같아서 이런 뜻으로 내가 말하기를 색과 공의 관계처럼 명색이 속박하는 것이며, 만일 명과 색을 여의면 곧 해탈이니 그러므로 말하기를 중생이 해탈한다고 하는 것이니라.”라고 설했습니다.

12연기만 그런 것이 아니고 오온(五蘊)의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온갖 범부 중생들이 색에 집착하고 물질이라는 현상에 집착하면 수상행식에도 집착한다.”는 것이 될 것입니다.

물질에 집착하는 까닭에 탐심(貪心)이 생기고 탐심이 생기는 까닭에 수상행식에 집착하고 그런 까닭에 탐욕(貪慾)이 생기는 것입니다.

탐심이 생기는 까닭에 색에 얽매이게 되고 물질에 얽매이기 때문에 수상행식에도 얽매이게 되고, 집착하게 되고, 치우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마음을 범부심(凡夫心)이요, 중생심(衆生心)이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범부심을 가지고 있으면, 원망을 원망으로 갚고 미움을 미움으로 갚고 증오하는 마음을 드러내기 때문에 그 고통과 괴로움은 끝날 날이 없는 것입니다. 마치 시집살이를 당한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더 어려운 시집살이를 시키는 것과 같다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이치를 지난 8년간의 힘든 환경 속에서 서두에도 말씀 드렸듯이 「죽어 본 사람만이 진정한 삶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고, 멋들어진 옷을 입어 본 사람이 멋진 옷을 만들 수 있으며, 도를 통해 본 사람만이 도의 참맛을 느껴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 줄 수 있다」는 믿음으로 통도사의 소임을 맡아야겠다고 다짐을 했던 것입니다. 그와 더불어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에 대해, 훌륭한 스승님을 모셨다는 것에 대해, 좋은 도반과 어울림을 가질 수 있었다는 감사함을 잊지 않고 살고자 합니다.

이와 함께 또 하나의 다짐은 어디에 있어도 나는 불자들과 함께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세속 인연으로는 사촌동생인 아난존자에게 가섭, 사리불, 수보리, 목련 등의 제자들과 아난존자 중 누가 더 가까운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난은 자신보다 가섭, 사리불, 수보리, 목련 등의 제자들이 더 가깝다는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 또한 ‘그렇다’고 했습니다. 부처님께서 왜 그렇다고 대답을 했겠습니까?

부처님의 대답을 이해하기 쉽게 유행가 가사에 빗대어 이야기한다면 ‘마음이 지척이면 천리도 지척이고 마음이 천리이면 지척도 천리이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를 믿고 의지하고 따르면 천리·만리·억만리 떨어져 있고 천년·만년·억만년 뒤에 태어나도 나와 함께 하는 것이고, 그림자처럼·발자국처럼 따라 붙어도 나와 생각이 다르고 나를 믿고 의지하고 따르지 않는다면 그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그 동안 20여 년 함께해 온 구룡사 불자들과 나 또한 머리와 가슴이 상호 본질과 현상처럼, 색과 공처럼, 명과 색처럼 함께 어우러져 있는 상태에서 서로 왕래하는 그런 영적인 관계 속에서 서로 교류하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헤아릴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면서 통도사로 길을 떠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