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이라마 ‘사랑’을 묻고 답하다

달라이라마(뗀진갸초, 80)의 다람살라 도착 소식이 전해졌다. 지난해 11월 남인도로 향한 이후 4개월만의 귀환이다. 티베트 민중봉기 57주년인 3월 10일. 달라이라마는 미국을 출발 스위스에 도착했다. 11일 중국정부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제네바대학원 연구소에서 열린 유엔 인권이사회 패널 토론회에 참석한 달라이라마는 중국에서 거듭되고 있는 인권 유린을 지적했다.
13일. 이른 아침부터 거리는 북적였고 활기 가득한 설렘도 보였다. 낮 10시가 넘어서자 인도 경찰에 의해 보행 통제가 되기 시작했다. 달라이라마가 깡그라 가걀공항에 도착했다는 보안 요원의 무전 소리가 들려 왔다. 백색의 까타 행렬 속에 향을 사르며 달라이라마의 도착을 엄숙히 기다렸다.
정확히 11시가 되자 경찰의 호위 사이렌을 따라 달라이라마를 모신 차량이 그의 거처를 향해 서서히 진입해 왔다. 티베트 탈출 당시 동행했던 캄빠 전사와 그의 후예들, 지금은 노장 어르신이 된 분들과 그들의 자손들이 티베트 전통 방식으로 주변을 정화하는 향나무를 사르고 티베트의 곡식 보리 짬빠와 우유 공양을 공손히 들어 올렸다.
달라이라마는 달리던 차량을 멈춰 세웠다. 이내 창문 밖으로 손을 뻗어 보리를 하늘에 올리고 우유를 손가락에 찍어 허공을 향해 몇 차례 튕겼다. 그리고 대중들과 일일이 눈을 맞추며 인사를 나누었다. 달라이라마의 진랍(가피물)이라며 흥겹게 몰려드는 티베트 난민 사이로 인도 경찰은 물론 외국인들도 상당수 눈에 띄었다. 그들은 우유를 나눠 마시고 머리에 바르기도 하면서 달라이라마의 다람살라 도착을 함께 반겼다.
3월은 티베트 난민들에게 아픈 일들이 많았다. 2월 29일 티베트 본토에서 분신 소식이 들려온데 이어 데라둔에 재학 중인 티베트 난민 청소년 도체체링(16) 군이 분신해 투혼 3일 만에 델리 소재 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리고 5일 시신을 다람살라로 옮겨 다음 날 6일 장례식을 치렀다. 티베트를 위해 뭔가 하고 싶다던 소년은 결국 한 줌의 재가 되어 가족의 품에 안겼다.
난민사회의 최고 화제는 총리 선거다. 티베트 민중봉기 행사 이후 3월 20일 총리 선거를 앞둔 티베트 난민 사회는 민심 다스리기에 여념이 없다. 티베트 중앙행정부 총리 시꾱 롭상상게(48) 박사와 국회의장 뺀빠체링(49)은 후임 총리 자리를 두고 후보 지지층 간에 세력대결이 본격화되고 있다.


희망은 마음의 여섯 번째 의식을 통해 일어납니다. 인간 문명의 발전이 마음의 발전과 비례하지 않는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기도 했지요. 우리의 일상과 지구촌 곳곳에서 많은 불행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느낍니다. 불교 수행을 하는 이라면 오근의 다섯 가지 식을 통해 마음이 발전 향상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종교는 얼마나 내면의 발전에 기여를 하는가. 현 시점에서 종교적인 관점을 통해 급속하게 변화하는 세상에 충실히 부합하고 있는가에 대해 고민해야 합니다.
내 마음의 행복의 척도는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우리는 물질적인 충족에 치중한 나머지 마음의 안정이 지닌 가치를 뒤늦게 깨닫습니다. 마음의 행복을 위한 종교의 역할은 70억 인류의 공존과 직결된 문제가 되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종교를 넘어서는 가치를 조화롭게 누릴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인도의 철학은 3천년의 역사를 거슬러 갑니다. 이들의 다양한 종교 가운데는 불교와 다르게 전생과 후생을 인정하지 않는 등 다양한 사유 논리의 종교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도 대다수의 종교는 차별과 차이를 넘어 서로의 종교를 존중하며 이해하는데 매우 관대합니다. 이와 같이 나와 다름을 인정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저는 누구와 만나건 항상 현세적이고 세속적인 윤리를 강조합니다. 물론 이러한 저의 관점을 반박하는 이들도 있습니다만 세속적인 윤리로서 도덕적인 인간관계의 기본 원칙이 세워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 무엇보다 먼저 공적으로 지켜야 하는 윤리는 바르게 정립되어야 합니다. 사람은 동물과는 다르게 지능적으로 움직입니다. 반면 동물은 욕망의 갈증에 고통스러워하지 않지요. 사람은 지성이 발달할수록 더 세분화된 불편함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갈등 속에 윤리는 각기 다른 사람이 공존하도록 하는 유일한 소통의 방식입니다.
저는 믿습니다. 석가모니 붓다께서 다시 현세에 나신다면 인류가 공존할 수 있는 말씀을 하실 거라는 확신이 있습니다. 붓다께서 상대의 근기에 준하여 인무아와 무아를 함께 설하신 것은 각각의 근기를 존중하신 까닭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연의 배려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아껴야 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극한 상황에 처했을 때 종교를 통해 의지하고 위안을 받으려 하는 것은 왜일까요. 혼자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두려움이 우리의 의식에 근저 해 있을 때, 항시 행복하고 내가 겪는 고통이 사라지기를 원할 때 종교는 부흥합니다.
신앙을 왜곡시켜 서로에게 폭력을 자행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여기서 신중히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선한 삶을 통해 다음 생에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 목적인가. 아니면 이 생에 제대로 된 사람의 역할을 하는 것이 목적인가. 비록 붓다의 아들과 딸이지만 궁극의 무아의 지혜를 깨닫지 못하더라도 여기서 우리가 선하게 어울려 공존할 수 있는 길을 고민하고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음 생에 내가 무엇으로 다시 날 것인가를 확신할 수 있는 이는 오직 나 자신뿐입니다.
우리가 항시 용감한 이었다며 존경하고 추앙한 이일지라도 죽음의 순간에 겪어야 하는 두려움은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철저한 자신만의 과제이다. 지금 이 시점을 통해 일체 중생을 위하는 길을 살아가도록 하십시오. 이는 다시 말해 스스로를 위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쫑카빠 대사의 보리도차제론 람림의 하사부에서는 행복의 방편을 설합니다. 염리심의로서 수행법을 닦아가는 다음의 단계가 중사도입니다. 마침내 일체 중생을 위하여 깨달음을 성취하도록 하는 길이 상사부입니다.
먼저 복덕이 아닌 것을 끊는 것으로부터 시작합시다. 업의 과를 알아 찰나 생멸하는 무상을 사유하며 느닷없이 찾아 올 죽음을 염두 해야 합니다. 비로소 업에 대한 두려움을 알고 우리는 불 법 승 삼보전에 귀의를 합니다.
<십지경>에서 이르기를 ‘오직 불선을 통한 악업으로 인해 지옥의 고통을 겪는다.’고 하였습니다. 티베트 라싸에서 수학할 당시 저의 곁에는 작은 앵무새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한 번은 그 앵무새에게 물려 손에 피가 난 적이 있었지요. 1959년 인도 망명 당시 함께 온 한 노스님이 그 앵무새를 잘 돌보았습니다. 심지어 노스님의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앵무새는 무척 좋아했습니다. 노스님이 가끔 앵무새의 부리에 먹이를 주면 앵무새는 예쁘게 먹이를 받아먹었습니다. 그 모습에 질투가 나서 언제부터인가 노스님을 따라 먹이 주기를 수차례 시도했지만 앵무새는 그다지 반기지 않았습니다. 맛난 호두를 주어도 앵무새는 노스님께 했던 바와 같이 껍질을 까서 알맹이를 돌려주지 않았습니다. 그로써 나는 알았습니다. 지속적인 사랑이란 것이 얼마나 큰 가치를 가지고 있는가.
상대를 배려하는 것 또한 그렇습니다. 저는 항상 차로 이동하면서 길에서 마주치는 이들과 미소를 나눕니다. 한 번은 외국에서 이런 일화가 있었습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사람들에게 미소를 보냈는데 정작 상대방은 저를 이상한 사람이 웃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바로 인상을 찌푸렸습니다. 주고받는 이의 교감이란 이런 것입니다. 더욱이 마주한 상대가 관련 지식이 없을 때는 모든 것이 신중하고 조심스럽습니다. 장수기도 역시 스승의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 있는 의식이지만 굳이 필요한가 싶습니다. 타인을 배려하고 베푸는 삶을 살며 스승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 진정한 장수기도임을 기억한다면 그것으로 스승은 충분히 행복합니다.
내가 받는 모든 불편함과 불행은 지난날의 과보임을 알아야 합니다. 달라이라마의 환생과 후대 달라이라마 옹립 역시 시대에 부응하는 방식으로 개선되고 부합되어야 합니다. 나는 이에 합당하게 준하여 달라이라마 환생을 이어갈 것입니다.
한 때 깔루 린포체와 만남에서의 일입니다. 당시 제가 머물던 절에는 신장만 모셔놓은 당이 하나 있었습니다. 사원을 찾는 이들은 무슨 일인지 석가모니 붓다를 모셔 놓은 법당에서 발원을 하지 않고 신장을 모신 곳에 가서 더욱 열심히 기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불자들이 행하는 크게 잘못된 오류의 한 행태입니다. 불교도들이 이런 착오를 범하기 않기 위해서라도 승가는 경전과 논서를 제대로 배우고 가르쳐야 합니다, 어떤 이는 용왕 혹은 토지 신을 자신의 신으로 모시기도 합니다. 이들은 짐승과 아귀의 종에 들어가는 분류로 인간보다 하위의 대상들에게 자신을 의탁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궁극적으로 윤회와 악도에서 벗어나는데 절대 유익함이 없습니다. 일시적인 이득을 얻기 위한 이러한 행위는 추후에 큰 해악을 입을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티베트불교 의식에 쓰이는 보리와 버터로 만든 ‘똘마’가 있습니다. 내부의 장애들을 모은 덩어리로 티베트불교의 기도 때 항상 불전에 조성합니다.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 붼교의 것으로 민간에서 성행하던 것을 불교에서 흡수했습니다. 보통 기도가 끝나면 태우거나 한적한 곳에 버립니다. 하루는 기도가 끝나고 한 스님이 그 똘마를 도반 스님에게 집어 던졌다고 합니다. 이유를 알고 보니 ‘네 안의 번뇌를 먼저 소멸시키고 중생을 위하는 기도를 하라’는 의미였다고 합니다. 그때 똘마를 맞은 스님은 대오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