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속의 나 그리고 중생을 위하는 나

달라이라마, “행복하고 싶다면 행동하라” 법문
중생속의 나 그리고 중생을 위하는 나


“나에게 법당이란 뇌와 마음이라네. 일체를 대함에 걸림 없이 존중하며 평등을 행하리라.”


달라이라마(뗀진갸초, 80)는 2주간의 칩거 명상에 들어갔다. 티베트 점성의학 병원 멘치캉 100주년 기념식에 모습을 드러낸 이후 비구계 의식을 집도한 달라이라마는 그간 밀어 두었던 인도 델리에서의 학생들 만남을 비롯하여 데라둔에서의 공식 일정을 소화했다.
티베트 망명정부는 지난 3월 20일 총리와 내각 선거를 치렀다. 전 세계에 흩어진 15만 명의 난민들을 비롯하여 인도 체제 하의 13만 명 티베트 난민들은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중앙행정부의 대의를 따라 소중한 한 표의 투표권을 행사했다. 총리 후보로 시꾱 롭상상게(48) 박사가 연임을 노리고 있는 가운데 국회의장으로서 상당 기간 망명정부에서 근무해온 뺀빠체링(49)이 각축전을 벌였다. 네팔에서는 사전 투표가 진행되었지만 투표함을 인도로 보내는 것에 대한 허가를 받지 못했다. 투표 결과는 4월 27일에 공고된다.
이번 선거전은 비난을 많이 받았다. 티베트 캄 출신의 롭상상게 박사와 암도 출신의 뺀빠체링의 지역 차이는 민심을 양분화 시키기도 했다. 외국에서 유학한 현 총리는 국제 관계에 장점을 지니고 있다는 여론이 강했다. 반면 현 국회의장은 오랜 망명정부에서의 경험으로 그 누구보다 망명정부 내부를 잘 이해할 것이라는 평이다. 결국 이들의 양분화는 상대를 비난하는 사태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전 삼동린포체는 이러한 사태에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였고 결국 투표를 행사하지 않았다.


불교의 주된 법은 무아 즉 무상입니다. 네 가지 고귀한 진리인 사성제는 그러한 무상을 바로 보고 사유와 행동으로써 실천하는 길을 보여줍니다. 석가모니 붓다는 사성제를 통해 번뇌를 여의는 길을 보인 분입니다. 불자가 아닌 이들은 수용하기 어려운 견해일 수도 있지요. 더욱이 창조주를 믿는 이들에게 불교의 무아의 사상은 더욱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불교인명학의 논서에 의거하면 붓다를 일컬어 수승하게 바른 이라 칭하고 있습니다. 바르다는 것은 오류가 없이 두루 완전함을 의미합니다. 붓다는 이와 같은 사유로서 중생이 원하는 공통의 행복에 이르는 길을 보이고 또한 실현하셨습니다.
인류의 역사에서 발생한 시대의 갈등은 아집을 바탕으로 합니다. 불교에서는 실제 하는 자아가 없다고 말하지요. 바르게 수행하는 불자라면 비량比量에 근거하여 그러한 현상들을 고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인간 개개인이 세상의 각처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현상들을 직접 격고 느낄 수는 없습니다. 때문에 불법에 근거하여 수행하는 불교도는 스승의 법에 의지하여 윤회에서 벗어나고자 해야 합니다. 바른 스승은 생의 행로에서 집착하는 마음을 내려놓는 순서를 가르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가르침의 근간이 바로 사성제입니다.
사성제를 수행하면서 환희 심을 일으킵니다. 내가 지금 여기 존재하는 것 자체가 윤회이며 행고임을 알고 여기서 벗어나겠다는 의지를 세웁니다. 수행자의 근기에 따라 바르고 수승한 길로 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로 보리도의 차제입니다.
앙굴라왕의 행적은 악업의 유명한 예시입니다. 수행자로서의 시작이 무엇입니까. 바로 참회이지요. 업과의 비중을 크게 다루는 것은 수행의 발판이 참회로써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의 악업을 참회하기 위한 조력의 근간이 되는 바가 ‘사력’입니다. 지난 업을 참회하며 동시에 업과에 대한 신심을 일으키고 다시는 악업을 짓지 않겠다고 스스로가 굳건히 다짐을 해야 합니다. 비로소 삼귀의를 하게 되는 때가 되었습니다. 인간의 몸을 얻기 어려움을 알고 업과를 바로 알며 삼귀의로써 의지 하여 인간 생의 목적을 올곧게 세울 수 있어야 합니다.
힌두교도들의 성스러운 의식 꿈멜라 행사에 참여 했을 때가 생각이 납니다. 그들 가운데 히말라야 설산에서 벌거벗은 나체로 뚬모 수행을 하는 이가 있었습니다. 이는 티베트불교 수행에도 있는 것으로 당시 꿈멜라를 통해 서로의 수행법을 교류하였습니다. 그 결과 행법에 있어서는 티베트불교와 매우 유사하지만 근본적으로 ‘나’의 생각을 놓지 않는 것에 차이가 있음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리고 해탈을 하지 못하는 어려움을 불교의 관점에서는 지적하고 토론을 나누었지요.
붓다께서 근원적인 괴로움을 알라고 한 것은 일시적인 고통이 아니라 육신을 얻어 윤회하는 근본적인 괴로움을 알라고 하신 것임을 유념해야 합니다. 해탈을 원하는 수행자는 윤회를 두 가지로 나누어 해석해야 합니다. 종합적인 것과 개별적인 것이 그것입니다.
근래에 들어 지진 소식이 자주 전해집니다. 인도에서는 파키스탄과 아프카니스탄 지역의 지진으로 그 여파가 다람살라까지 전해졌지요. 미얀마 일본 심지어 에콰도르에서도 지진 소식이 들려옵니다. 저는 지진 또한 업의 결과라고 여깁니다. 자연의 변화가 인류에게 재앙으로 발생하는 것은 인간이 그러한 일이 발생되도록 원인을 제공한 원인입니다. 인도 첸나이에서 홍수가 나고 휴양지에 때 아닌 폭설이 내리거나 인류의 종교사로 보존 되어야 할 사원이 방심에 의한 화재로 한 줌의 재가 되어 문명의 보고가 유실이 되는 것 등 역시 인과법입니다.
타인을 위하는 보리심을 이 자리에서 말하고 들어 사유하되 우리 모두가 일체 중생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서원을 세우고 실천하겠다고 다짐해 봅시다. 하나의 영역에 치우친 수행과 해탈의 방식을 구한다 할지라도 근본 뼈대는 보리심입니다. 일체 중생을 위하고저 하는 최상의 마음인 보리심을 일으키고 그 실천에 동참해 주세요. 지구상의 다양한 재해로 피해를 받은 이들이 어서 정상으로 회복되고 그러한 고통을 받는 이들을 구호하는데 관심을 기울이기를 바랍니다.
한 때 라다크에 호우가 쏟아져서 산사태가 크게 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도 우리 티베트 난민들은 망명정부를 위시하여 마음을 합하였고 피해를 복구하는데 앞장섰습니다. 지구촌 어디서든 인류가 겪는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여기는 동체 대비를 실천할 수 있는 불교도로 성장해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비란 타인의 고통을 나의 고통과 다르지 않다는 마음을 내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모든 갈등은 분별과 망상에 의한 것임을 깨우치는 것입니다.
한 예로 가립된 존재를 분별해 봅시다. 진제의 측면에서 무아의 진여를 사유하고 점검을 통해 깨달아 갑니다. 업을 짓는 나와 업을 짓는 나의 행동이 수반하는 업을 겪는 나 그리고 그 업으로써의 육신을 법무아와 인무아로서 헤아립니다. 그로 말미암아 영원히 존재하는 나는 없음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육신을 제어하는 나는 어디에 있습니까. 색 수 상 행 식 조차도 공함을 알아야 합니다. 비로소 일체가 무아이며 무상함을 인정하게 됩니다.
붓다의 말씀 그 자체를 받아들이는 것을 요의경이라고 하며 해석을 필요로 하는 것을 불요의경이라고 합니다. 실유론자 세친을 중심으로 당대의 논사들이 진여를 수용할 수 없었기에 결국 실유 논증을 차용하였지만 불호논사는 용수의 가르침을 그대로 해석하였습니다. 분별하는 것이란 상대의 흠을 들춰내는 것이 아니라 붓다의 진정한 의도를 파악하기 위한 것입니다.
티베트불교에서는 스승과 본존이 둘이 아님을 항시 강조합니다. 금강승 수행에서는 수행자의 근기를 매우 중요시 여깁니다. 지속적인 수행을 위해 혈 기 정 세 가지를 잘 다스려야 합니다. 총카파 대사의 청년 시절의 저서를 보면 공성을 과연 깨달았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 정도이지만 나이가 들어 저술된 논서를 보면 이 분이 뛰어난 선지식임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러한 선지식의 논서가 후대 수행자들에게 여법하게 전해져 오늘 이 자리에 함께한 우리에게 지혜를 구하는 마중물이 되고 나침반이 될 수 있다는 것에 경의를 표합니다.


나를 위하는 것이 중생을 위함이네
자비심을 포기하지 않는 자 그대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강한 의지와 연민심의 의지를 깨우리
보리심이야 말로 최상의 공양
한 결 같이 여래를 공경하는 자
오직 중생의 뜻을 위해 깨달음을 얻을지니
일체종지의 붓다가 되어 일체 중생을 위하지 않는다면 법을 어찌 설할까
이타심을 내지 않는 이가 말로만 붓다에게 귀의한다고 한다면
그는 과연 붓다의 제자인가
중생을 나의 아들과 같이 여기리라
중생의 원하는 바를 위하는 그 마음을 내리라
『중생을 기쁘게 하는 찬탄 송』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