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慈悲와 연민심憐愍心으로 살아가자

하늘에서는 금방이라도 함박눈이 펑펑 쏟아질 것 같은 날씨입니다.
그런 함박눈을 은근히 걱정하고 있었는데, 역시 입춘立春은 입춘이었습니다.
일 년 24절기 중 입춘은 하루로 치면 새벽 세 시에 해당합니다.
밤 11시부터 1시 사이의 자시子時는 절기로는 동지冬至입니다.
동지로부터 한 달 반이 지나면 입춘이고, 우수雨水 경칩驚蟄을 지나면 춘분春分입니다.
하루로 바라보면 오전 6시입니다. 그리고 오전 9시는 입하立夏요, 낮 12시는 하지夏至입니다. 그렇게 하루하루는 24시간이듯, 사시절서四時節序의 일 년은 춘하추동春夏秋冬 24절기로 이루어져 돌아가고 있습니다.


불교의 근본은 자비慈悲와 연민심憐愍心입니다. 자비와 연민심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모든 생명을 해치지 않고 함께 더불어 살아가면서 이로움을 주고자 하는 관심과 배려와
어울림의 마음입니다.
얼마 전, 한 TV 채널에서 ‘갓 오브 이집트’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인간이 신과 공존하는 시대를 조명하는 이집트 제국에서 피라미드 안에서 벌어지는 신神들이 지옥과 아수라의 세계를 넘나드는 험난한 여정으로 그린 영화입니다. 인과因果로 윤회輪廻하는 인간들이 전생前生과 내생來生으로 이어지는 수많은 존재들과 파라오가 활동하던 시대를 그린 영화였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할아버지 신, 왕王인 아버지 신, 친형을 헤치고 왕이 된 삼촌과 천신만고千辛萬苦로 왕과 싸워야 하는 조카는 모두 신神들입니다.
이들은 불교식으로 표현하자면 지옥地獄, 아귀餓鬼, 축생畜生, 아수라阿修羅, 인간人間, 천당天堂에서 죽여야 사는 그런 싸움의 전쟁터이었습니다.
마치 아수라의 세상도 그려지고 있습니다. 욕심과 어리석음 때문에 욕구, 욕망으로 불타는 전쟁터였습니다. 지혜가 없는 부나방이 불을 꽃으로 보고 뛰어들어 타 죽는 것처럼, 그 혼돈에서 왕王이된 신은 인간인 청년에게 이집트를 맡기고 떠나가려 합니다. 그 젊은 청년과 죽은 자야의 간절한 사랑을 바라보면서 만남의 약속을 대신해 주기 위해서 신통력의 상징인 팔찌까지 청년에게 풀어주고 떠난, 서쪽을 다스리던 여신女神 하토르를 찾아가고자하는 왕은 나라를 걱정하는 청년 ‘벡’에게 이런 말을 남깁니다. 함께 살아가고 있는 이들에게 이집트 백성들의 다스림을, “선행과 연민과 너그러움이다.”고 말해 줍니다.


우리 사회현상에서 다스림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이는 ‘선행과 연민과 너그러움이다.’고 전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티베트의 달라이라마께서도 『마음공부』에서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겸손謙遜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는 결코 우리의 교만심驕慢心을 꺾을 수가 없다.”
‘스스로 잘났다는 교만심과 아직 최상의 교법과 깨달음을 가지지도 못했으면서 얻었다고 생각하는 증상만增上慢을 버려야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겸손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겸손한 존재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내 스스로는 근검절약하고 검소하게 살면서 함께 하는 이들에게는 자비의 연민심을 가지게 하였습니다.


어느 백화점에서는 ‘주는 기쁨, 받는 즐거움’이라는 글이 있었습니다.
이 글을 보면서 기쁨을 씨앗으로 즐거움은 결실의 열매에 비유해보았습니다.
누가 뭘 주면 좋아합니다. 그렇다면 받는 것은 기쁨이어야 합니다. 우리들은 인색하여 그 기쁨조차 누구에게 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불교식으로 말하면 주는 즐거움은 보살행菩薩行입니다. 이타행利他行입니다. 그러니 주는 게 기쁨이 아니라 즐거움이었습니다.
그런데 세간에서는 그렇게 표현하지 않습니다. 받는 것을 즐거움이라고 합니다. 서로가 주고받는 나눔은 법열法悅입니다.


불과 40~50년 전만 해도 우리나라는 많은 국가로부터 원조로 강냉이와 밀가루와 분유, 옷가지 등을 학교에서 배급받기도 하고 입기도 하였습니다.
그랬던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를 도와주는 국가로 발전했습니다.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지원을 하는 나라, 그 나눔은 함께 어렵고 힘든 일들을 풀어가야 하는 국가가 되었습니다. 우리 불자들도 언제나 어려운 이웃과 빈민국에 나눔의 손길인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달라이 라마 스님은 자본주의 방식으로 돈을 벌어서 그 돈은 좀 더 유용하고 의미 있는 방식으로 다른 이들과 나눌 수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자본주의 방식으로 노력하고, 그 대가를 사회주의 방식으로 나눔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올바른 이론에서는 절대로 그릇된 실천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을 낙후된 사회주의 국가로부터 배워야 하겠습니다.
불교가 ‘욕심을 버리라’ 했다 하여 내가 노력해서 받는 월급과 연봉조차 모두 다 버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쓸 수 있는 정당한 돈은 소중한 나의 자산입니다. 그것을 행동으로 스스럼없이 실천하였으면 합니다. 이것이 나눔의 미덕이요 즐거움이며 보살의 이타행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옛날 어느 마을에 만석지기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만석 궁은 평생 쓸 줄은 모르고 모을 줄만 알았습니다. 만석지기 부자는 죽을 때까지 쌀밥 한번 먹지 못하고 아까워서 꽁보리밥만 먹고 살았다고 합니다. 그의 성품을 잘 아는 안주인은 가마솥에 밥을 지으며 일꾼들에게 줄 쌀밥 위에 보리쌀 한 줌 넣어서 영감에게만 그 꽁보리밥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평생을 꽁보리밥만 먹다가 결국 그렇게 빈손으로 떠나갔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경주의 최부잣집 가훈은 지금까지도 우리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이를 육훈六訓이라고 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의 벼슬은 하지 마라. 둘째, 재산은 만 석 이상 지니지 마라. 셋째,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넷째, 흉년에는 땅을 사지 마라. 다섯째, 며느리들은 시집온 후 3년 동안은 무명옷을 입혀라. 여섯째, 사방 백 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이었다고 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우리들은 얼마든지 좋은 일을 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스스로 마음을 내어서 좋은 일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높고 낮음이나 많고 적음을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천만 국민들이 천 원씩만 모아도 오백 억 원입니다. 천 원을 1년 동안 매일 모으면 36만 원이나 됩니다. 1만 원씩 매일 모으면 365만 원입니다. 하루에 10만원씩을 잘 사용하면 1년이면 3,650만 원입니다. 하루에 천 원이든, 만 원이든, 그 돈을 선행에 쓸 것이냐 함부로 쓸 것이냐에 따라 그 결과는 달라집니다. 선행과 연민심과 너그러움으로 살아가는 지혜智慧로운 복덕福德은 무루공덕無漏功德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매일 그런 돈을 쉽게 쓸 수는 없습니다. 쉽지 않습니다. 다만 나누어야 할 때 나누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근검절약해야 합니다. 스스로의 삶은 검소해야 합니다. 최부잣집처럼, 어려운 이웃을 살펴봐야 합니다.
옛 어른들은, ‘천석지기 천 가지 걱정이요 만석지기 만 가지 걱정’이라 하셨습니다. 나눔이 없는 물질은 많으면 많을수록 걱정도 더 많아진다고 하였습니다.


불자들은 서로 인사 할 때 “성불하세요.” 하는 인사를 합니다. 그러나 저는 몸에 배어있는 인사법이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는 인사입니다.
그동안 불사 중에도 어렵고 힘든 이들과 함께하며, 부처님께서 탄생하신 네팔의 지진에도 종단의 공익법인 아름다운 동행으로 1억 원을 전달하였지만, 산악인 엄홍길 대장에게 히말라야 오지에 학교 건립기금 2천만을 전하였습니다. 네팔 오지 히말라야 학생 백 명에게 매월 1천 루피의 학자금을 전하고자 합니다. 더 어렵고 힘든 곳에서 함께하는 불교가 되겠습니다. 불자들에게 오늘과 같은 깊은 인연을 맺을 수 있게 보살펴주신 보답의 인사를 전합니다.
앞으로도 더 많은 부처님 일을 할 수 있는 불교가 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