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말·의식의 한 맛을 보라

“5대 달라이라마 응아왕롭상갸초께서 수행 정진의 삼매에 드셨네.
그때 관세음보살 본존께서 직접 법을 설하셨으니.
일체 중생이 다스리지 못한 것을 정화하기 위함이라.
거룩한 뽀딸라궁에서 구루 린포체 찬탄의 기도를 올리니
본존의 수인과 함께 송첸감뽀 왕도 자리 하셨네.”


예년과 같으면 일본과 미국의 법회 일정으로 다람살라를 비우는 달라이라마(뗀진갸초, 82)의 5월이다. 티베트 망명정부에 본부를 둔 달라이라마 재단은 지난 5월 27일 겔룩빠 산하 남걀사원 쭉라캉에서 유래 없는 성 관자제불(직땐왕축) 관정법회를 주관했다. 대중에게 티베트의 끼롱 지역의 관세음보살이라는 의미로 더욱 친숙하여 ‘끼롱조우’라 불리는 ‘와띠상뽀’ 불상은 1950년 중공군의 티베트 침략 당시 종카 최데사원에 안장되었던 것을 인도로 망명하는 승려들에 의해 함께 운반되어져 현 14대 달라이라마에게 전해졌고 그 후로 지금까지 67년째 달라이라마의 곁에서 법을 수호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달라이라마는 관정에 입문하기에 앞서 근 도 과의 차제에 따르는 관정 의식 가운데 특별히 마음을 일으키는 근의 관정을 강조했다. 불도에 입문하여 불 법 승 삼보에 귀의함으로써 일으키는 그 근본 마음이야말로 붓다가 지닌 바와 구별이 없는 마음이며 그러한 마음을 움직이는 기운이 바로 붓다의 몸이 되어 수행자가 항시 붓다와 하나가 되도록 아우른다는 것이다.
성스러운 관자제불과 끼롱조우는 푸른 일출이 시작되는 이른 시각 달라이라마의 관저에서 법당으로 경건히 모셔졌다. 이날 법을 구하려 하는 제자들이 만다라를 직접 볼 수 없도록 천은 사방으로 드리워져 그 모습을 공개하지 않았다. 귀한 불보살의 출현에 유래를 알 수 없는 사부대중들이 사원을 가득 메웠고 이날의 기도는 티베트력 부처님의 기일을 맞아 7일간 밤낮으로 이어졌다. 회향 마지막 날은 약사여래 기도로 마무리가 되었으며 티베트 민간인들에게 몸을 보호하고 악한 것으로부터 수호한다고 전해지는 명약으로 알려진 ‘마니리부’가 일인 하나씩 지급되었다.


티베트 끼롱 지역에서 전해지는 흥미로운 일화가 있다. 한 귀한 집안의 아들을 노리는 두 악한 귀신이 모의를 하여 보름 날 밤에 아이의 납치를 계획하였다. 영험한 승려의 지혜로 귀신들의 계략을 알아차린 아이의 어머니는 아들의 콧등에 검은 점을 그려 모포로 감싼 뒤 등에 업어 친정으로 향한다. 승려는 아이의 어머니에게 당부하기를 목적지에 이를 때까지 쉼 없이 구루 린포체 진언 ‘옴 아 훔 벤자 구루 빼마 시띠 훔’을 진심으로 기도할 것을 당부하였다. 귀신들은 길목에서 아이의 어머니가 지나가기를 기다리지만 어머니가 친정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런 수를 쓰지 못한다. 귀신들의 눈에는 구루 린포체의 진언의 영험으로 어머니 등에 업힌 귀한 아들이 물주전자로 보였던 것이다. 이렇듯 끼롱조우의 불보살과 구루 린포체 진언의 신비한 힘으로 아들은 목숨을 건져 후에 성인이 될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구경일승 보성론에 의하면, 불성을 다시 말해 여래장이라 명하였으며 이를 명료함이라고 논하였습니다. 이는 다시 말해 미세한 정광명으로써 ‘기심起心’을 의미합니다. 이는 수행자가 붓다의 사진을 구족하는 근간이 됩니다. 모든 인간에게는 본래 내재된 기심이 있습니다. 티베트불교의 금강승 관정은 붓다의 사신을 구족하는 습을 깨울 수 있도록 조력합니다.
합장 공경하여 스스로 서원하십시오.
“대자 대비한 위신력으로 중생을 위함에 대승의 원력으로 성숙하여 해탈하고자 법의 정수를 간곡히 청하나이다.”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서 근기의 허물이 없도록 선지식에게 법을 청하고자 합니다. 이타의 보리심이 무엇인지 과연 어떻게 발현을 해야 할지에 대해 신중하고자 합니다. 본래 내가 있다고 여겼던 모든 문제의 원인을 헤아립니다.
논거를 통해 법의 이치를 파악하십시오, 불교는 맹목적인 신앙을 권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법을 수긍하는 유일한 방법은 전체적인 큰 틀을 파악하는 방법뿐입니다. 일체가 서로 원인과 조건에 의해 맺어져 있음을 논리적 근거에 의해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본래 하는 고유한 것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오직 상호가 의존할 뿐입니다. 고유하는 성품이란 없습니다. 일체는 변화합니다.
번뇌를 바라봅니다. 이 번뇌로 인해 무궁한 희론이 발생합니다. 중론에 의하면 희론을 멸하기 위해서는 상호 의존을 통한 괴로움을 보고 그 원인을 알아 비로소 멸하기 위한 도제로서 수행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업과 번뇌를 여의었을 때 그 자리가 비로소 해탈입니다. 당신은 얼마나 분별합니까. 얼마나 실제 한다고 판별을 합니까. 내가 생각하고 사고한 바가 진실로 정답일까요. 과연 내가 바라보는 바가 실상일까요. 저는 공성의 법성으로서 바라본 그 자리가 열반이라고 정의합니다.
나란다 승원의 법제를 따라 수학하는 수행자들에게 당부하고픈 말이 있습니다. 지금의 티베트력 붓다의 기일을 맞아 최소한 보름날까지 관자재보살의 기도를 올림에 부디 일심으로 기울여 주십시오. 제가 이번 기도에 설판제자이면서 대중공양 시주자이고 또한 법사이기를 청한 것은 5대 달라이라마께서 보이신 상서로운 위신력과 제불보살의 원력이 대중들에게 진실로 전해지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대자 대비한 위신력이란 바로 보리심입니다. 공성으로써 헤아린 지혜로 서원하되 법의 정수를 받기를 청하는 견고한 마음을 내십시오.
“기아나 락캬(견고한 법의 힘으로 마장을 물리칠지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