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이란 무엇인가?

달라이라마(뗀진갸초, 83세)는 말씀하셨다. “밝지 못한 업인 무명을 없애기 위한 방편, 그것이 바로 수행이다. 수행하여 일어나는 지혜는 사유해서 얻어지는 지혜가 있어야 하며 그 이전에 들어서 아는 지혜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닦아서 일어나는 지혜를 수혜라고 하는데 공성을 사유해 스스로 호가신을 이끌기 위함이다. 많이 듣고 공부하는 문聞을 시작으로 사유와 수습의 과정은 반드시 인과의 관계로 성립된다. 때문에 지금 이 자리는 우리가 성불하기 위해 거쳐야하는 과정이며 이 자리에서 법을 듣기 위해 모인 동기를 반드시 올곧게 세워야 한다. 법은 수행자의 정신적 행복과 불행을 조절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원인에 의해 생성된 모든 것은 무상합니다. 항상 찰라 생멸 변화하기 때문입니다. 생성과 소멸 가운데 소멸은 2가지로 되는데, 거친 무상과 미세한 무상이 그것입니다. 이것은 실질적으로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인간의 몸의 변화 가운데 흰머리가 생겼다면 그것은 거친 무상입니다. 10년은 1년의 변화에 의해 이루어지면 1년은 12개월로 이루어짐을 알아야 합니다. 아주 미세하게 들어가면 찰나멸인데 이는 어떤 대상이 존재함과 동시에 사라지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온에 의지한 나라는 것 자체도 무상합니다.
법이란 마음의 고통을 줄이는 방법입니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종교적으로 어느 정도 의지만 하여도 약간의 행복을 느낍니다. 불교는 창조주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창조주는 사람 그 자체입니다. 우리가 원치 않는 불행과 원하는 행복이라는 것은 원인과 조건으로 이뤄집니다. 창조주를 인정하지 않는 불교와 기타 자이니즘 등 종교가 창조주인정을 하지 않음에서 같지만 행위의 주체자인 나 자체 역시 원인과 조건의 산물이라는 것에서 차별됩니다.
불교는 인과설에 대한 확실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원치 않는 고통을 없애기 위해서는 고통의 결과물을 가져다 주는 원인과 조건을 확실히 알 때 없애는 것이 가능합니다. 선한 결과와 부정적인 결과는 원인에 대해 바로 성찰해 보아야 하며 이것을 이야기 하는 것이 바로 사성제 입니다.
고통을 없애기 위해서 집성제를 알 때 궁극의 멸성제를 이룰 수 있습니다. 사성제는 긍적적 결과물의 인과와 부정적인 결과물의 인과를 설명합니다. 샨티데와보살의 저서 『입행론』에는 원치 않는 고통과 원하는 고통의 상반된 결과를 설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한 원인을 인식하고 있지만 무시하거나 앎에도 치료하지 않으려 합니다. 마음에 있어 정신적인 고통의 원인의 근본은 번뇌에 있습니다. 번뇌에는 탐욕, 분노, 어리석음이 있는데 이들이 일어날 때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에게도 영향을 줍니다.
처음에 나라는 생각이 있고 대상에 대해서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면 우리 역시 긍정적으로 바라보며 행복을 느끼지만, 부정적인 생각은 불안을 초래합니다. 이러한 모든 대상에 대해 설사 그 사람이 경쟁하는 대상이라 하더라도 그의 장점을 보고 수희찬탄한다면 나의 마음은 편안해 질 것입니다. 이러한 번뇌의 마음은 우리 자신에게 고통을 가져다주는 직접적인 원인이 됩니다. 사람들은 실질적인 고통의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번뇌라는 사실에는 큰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업의 근본인 번뇌는 집중적으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부처님은 마음을 다스리면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다양한 번뇌들을 어떻게 정의하느냐면 마음의 평화를 깨는 것이 바로 번뇌 입니다. 그 해결책이 자비와 사랑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외도들 역시 관심이 큽니다. 분노심을 잘못으로 보고서 다스리는 방법을 이야기 합니다. 욕계의 5욕을 허물로 보고 천상계의 공덕을 명상함으로 인해서 욕계의 번뇌를 누르는 선정을 닦는 방법을 외도에서도 다룹니다.
고통의 뿌리 역시 원인과 결과에서 발생합니다. 탐심과 진심의 생기는 원인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나라는 아집과 아견을 바탕으로 번뇌는 일어납니다. 무아는 이러한 어리석음을 깨줍니다. 반야경에서 제법이 무자성이라고 하는 사상은 무자성의 정견을 이야기 합니다. 무아를 깨달은 지견을 통해 아집아견은 없앨 수 있습니다.
고통의 근본은 번뇌이고 그로 인해 아집이 생깁니다. 나만 소중하다는 이기심이 지구상의 모든 문제를 불러일으킵니다. 꿈에서도 나라는 생각이 있습니다. 나라고 하는 실체가 없음에도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유익하지 않다고 느낀다면 우리는 아견의 대치법인 무아와 아집의 반대된 생각인 보리심을 내어야 합니다. 이것을 심도 있게 다룬 것이 용수보살의 『보리심석』입니다. 뿐만 아니라 무아의 지혜를 증장시키고 이타심을 키워 나간다면 일시적인 행복이 아닌 지속적인 행복이 찾아올 것입니다. 두려움 없는 행복은 몸과 마음을 평안하게 합니다.
나는 온·계·처와 능취와 소취의 견해로서 소멸됩니다. 설일체유부와 경량부는 외부의 법아가 실제로 없다고 법무아를 이야기 하지 못하고 법아가 실체가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극미 입자를 지속적으로 더 이상 나눌 수 없기 때문에 외경이 존재한다고 주장합니다. 우리의 의식은 쪼개보면 찰나 생멸로 모여 있기 때문에 모두가 실체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오온을 비롯한 다양한 법의 인식은 실재 존재하지 않지만 우리는 존재한다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신기루나 환과 같다는 설명에 대해서는 경량부와 유식에서 다양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부처님께서 그 각각의 근기에 맞게 다양한 법을 설합니다.
색이라는 것은 사대 요소의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수화풍의 4대 요소들은 어떤 형상이건 간에 각자 지닌 성질이 있습니다. 지수화풍의 미세한 성질을 인간의 몸은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깥의 어떠한 대상이건 간에 서로 각각의 요소들이 조합돼 하나의 대상으로 형성됩니다.
유식학파에서는 인무아 즉 설일체와 경량부에서 이야기하는 것 이상으로 법무아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능취와 소취가 다르지 않고 이들이 공하다는 것입니다. 소취는 실질적인 능취와 식에서의 훈습 종자에 의해 나타나는 것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실질적으로 이러한 대상들이 바깥 경계로서 분리돼 그 자체로 성립한다고 인식합니다. 그것이 유식에서는 잘못된 지견이며 이것은 바깥 대상으로 인식되는 소취는 능취의 훈습 종자의 발현일 뿐이라는 것이 유식의 견해입니다.
한 대상에 대해서 사람들이 다르게 인식할 때 공통적으로 느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 대상을 인식하는 의식 즉 훈습 종자는 다르게 나타납니다. 그런 이유로 외부 대상의 한 양상에 서로 다른 인식이 생겨나는데 한 여성을 누군가는 어머니로 인식하지만 짐승들에게는 먹이로 인식되고 남성에는 이성으로 인식됩니다. 이 모두는 모두 각자 진실한 인식입니다. 어떠한 대상이 우리에게 인식되는 것은 따로 밖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각기 마음 속의 훈습 종자가 발현되어 다르게 인식되는 것입니다. 외부 대상의 한 양상에 어떠한 매력적인 것도 타인에게는 다른 것입니다. 좋게 보이는 대상이라면 타인에게도 좋은 대상이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바깥의 경계로서 색을 비롯한 것이 의식과 상관없이 바깥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외경은 인식하는 의식의 나타남일 뿐이지 바깥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유식에서의 이러한 견해에 반박해 외부의 경계가 실체가 없다면 작용은 왜 일어나는가 물을 수 있습니다. 동일한 것으로 작용하는 것은 꿈속에서의 해학과 같습니다. 꿈에서 깨어난 상태의 작용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꿈속에서와 현실의 작용은 차이가 없습니다. 능취와 소취의 실체로서 의식에 나타난 어떤 것이 별개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따라서 사물의 실체는 외경의 모든 양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결국 본질은 다르지 않습니다. 각각의 의식이 존재하는 한 다양한 훈습 종자가 있을 뿐입니다. 범부의 마음이 미혹하여 환영과 신기루 건달바의 마을 등이 보이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식작용은 의식상에서만 존재합니다.
아집을 없애기 위해 5온 12처 18계 등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일체 모든 법은 자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부처님께서 설하셨습니다. 아집이라는 집착의 인연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하신 말씀입니다. 이것은 필요성에 의해서 중생의 근기에 따라 필요에 의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인아를 이루는 것이 5온 12처 18계입니다. 아를 안립시키는 근거이지요. 이러한 인아는 실질적으로 실제 있는 것이 아니고 5온을 비롯한 인아를 안립시키는 근거는 실유입니다. 실유론자들이 주장하는 인아는 5온을 통해서 존재합니다. 유식파에 머무르며 큰 선연이 있는 이들은 2취공을 끊음으로써 일체를 끊습니다.
이제 의식의 자성인 진여를 말하겠습니다. 유식에서 ‘삼계는 오직 마음뿐’이며, 『능가경』에서 ‘외경은 마음의 현현일 뿐’이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월칭보살은 다르게 해석합니다. 부처님께서 ‘마음이 주된 것이다’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설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은 부처님께서 필요에 의해서 말씀하신 것이지 중관 입장에서는 궁극의 견해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오직 마음이라고 부처님께서 보이신 것은 어리석은 이들의 두려움을 끊기 위해서 이지 진여는 아닙니다. 『십지경』에는 유식의 견해와 관련한 말씀이 있지만은 글자 그대로 인정하기 어렵습니다.
유식에서 말하는 삼성설은 변계소집성, 의타기성, 원성실성으로 차단해야 할 것입니다. 변계소집성이며 변계소집의 바탕이 의타기성입니다. 실체가 있다고 여기는 변계소집성으로 이를 끊은 것이 원성실성입니다.
중관의 자립논증과 귀류논증에서는 삼성설의 해석이 각기 다르게 나타납니다. 이 삼성은 모두 무자성이라고 말합니다. 유식에서는 의타기성과 변계소집성은 성립되지 않고 원성실성만이 성립됩니다. 무자성에 대한 가르침에 대해서 단견에 빠질 위험이 있기 때문에 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3종 법륜을 굴리니 『해심밀경』이 그 중 하나이지만 중관에서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서로 모순되는 여러 가지의 가르침들은 중생이 지닌 관행과 근기에 따라 가리킨 것이며 이로서 성문, 연각, 보살승 등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는 중생 각각이 지닌 의식 수준의 차이에 따라서 다양한 것입니다. 또 다른 경에서는 궁극에는 보살승으로서 오직 일승뿐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 모두 대기 설법인 까닭입니다.
『해심밀경』에서 이야기 하는 요의 불요의를 구분하는 방법과 대승 경 『십지경』의 분류 방법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그것을 취사하는 구별을 위해서라도 다른 경과의 비교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는 끝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직 이치로서만 분류가 가능합니다.
대승의 견해에서는 불요의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따지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승법은 무아입니다. 이는 제법이 모두 무아이며 마음은 무시이래 난 적이 없습니다. 『무상요가탄트라』에 의하면 외부의 대상이 실체가 없고 무자성의 법성임을 이야기 하지만 마음을 제어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 마음의 법성을 수행하는 것이 주된 중심입니다. 외부의 대상이 무자성인 바와 같이 인간의 마음은 객체와 주체 모두가 하나가 됩니다.
유가행자는 자신의 마음을 다스려서 경계에 이른 청정한 마음이 자증분의 대상이라고 합니다. 마음의 특별한 실체가 있다는 것은 훈습 종자의 발현이라고 봅니다. 이는 창조주를 인정하는 외도의 수론학파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마음의 경계가 현상에 불과하기에 마지막에는 아뢰야식만이 남게 됨으로 부처님과 가까이 된다는 것이 유식의 견해입니다.
중관에서는 성천보살의 『400송』에 나온 이치와 같이 지나간 것은 존재하지 않고 미래의 것은 얻음이 없다고 봅니다. 현재의 의식이라는 것이 어디에 있는가? 현재 나를 존재하는 근거가 되는 실제가 바로 제8아뢰야식이라고 유식에서 주장하기 때문에 과연 이것이 현재 의식인가는 명확히 해야 할 것입니다.
『보리심석』의 32번째 게송의 경우에는 정확히 해석하고 있지 않습니다. 『대승장엄경론』에 의하면 어떤 조건과 만났을 때 인식과 그에 대한 작용이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아뢰야식은 진실이 아니면서 진실인듯 하게 하여 윤회의 동력이 됩니다.
의식에 의해서 의식 대상을 알 수 있으므로 인식 대상 없는 의식은 없습니다. 중관의 입장에서 마음이 진실로 성립되고 자성이 있다면 자체에서 의지하지 않고 성립돼야 합니다. 인식하는 대상과 주체는 상호 의존적으로 성립되는 것입니다. 의지해서 존재하기 때문에 불변의 자성은 없습니다. 그렇기에 마음은 이름에 지나지 않으니 이름과 달리 존재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결국은 언어 또한 관념일 뿐이지 변치 않는 자성은 없습니다.
마음은 환과 같은 본성입니다. 예를 들어 안식은 경계가 되는 근과 경에 의해 일어납니다. 일반적으로 생각에 우리의 마음과 몸이라는 말에 따라서 실체인양 느껴지지만 실상은 이것이라고 규명하려 할 때 결코 실체는 얻을 수 없습니다. 마음을 비롯한 모든 제법은 의존에 의해 존재하니 본래 자성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일체의 희론이 적멸한 무분별의 지혜가 생기기 이전에는 대상이 마치 진실인양 여겨집니다. 어떤 이에게 분멸이 일어난다면 공은 어디에 있을까요? 이는 승의보리심과 관련이 있습니다. 의지해서 공을 이름붙인 것뿐이지 공 또한 실재하지 않습니다. 보리라는 말은 희론의 적멸을 의미합니다. 없던 것을 새롭게 만든 것이 아니라 모든 허물이 벗겨져 본래가 드러난 것을 의미합니다. 집착하는 의식 또한 적멸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보리란 성품이 없고 생함이 없으며 존재한 적이 없어 허공과 같습니다. 공성을 깨달은 승의의 보리심은 분별로는 알 수 없습니다. 깨달음의 정수에 머무시는 부처님은 언제나 공이 허공과 닮았음을 아십니다. 붓다라는 말 속에도 ‘청정하다’ ‘그치다’라고 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앞선 보리와 같은 맥락으로 집착의 근거가 모두 적멸한 상태입니다.
희론의 적멸이 바로 공성입니다. 이런 공성을 깨달은 지혜라고 하는 것은 어리석음과 대치합니다. 반야경에서 제법이 무자성이라는 궁극의 실상을 말씀합니다. 선과 불선의 분별의 흐름을 깬 것이 공입니다. 마음에 의식의 대상이 없는 머무름은 허공의 성품입니다. 인무아에 대한 무아 역시 외부의 대상에 대한 집착들을 완전히 없애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중관의 자립논증에서는 자상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상을 귀류논증에서는 언어에서 조차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견해입니다.
우리가 진실이라고 집착하는 것은 모두 배재되어야 합니다. 공의 사자후에 모든 실유론자들은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실체가 있는 타력을 부정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외부 조건에 의해 결과물이 발생한다고 믿어왔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의 초전법륜 이후 부처의 궁극적인 목적은 일체 종지를 이루고 이를 위해 승의보리심을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자성은 제법의 법성입니다. 사탕의 달콤함과 불의 본성인 뜨거움과 같이 모든 법의 본성을 공으로 인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