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샤의 명상요결
조 현
한겨레신문 종교전문기자
사람을 만나는 것도, 환경을 만나는 것도 인연 아닌 것이 없다. 더구나 삶의 변화를 이끄는 동기를 만나는 것이야 두말할 나위가 있을까.
석가모니 부처님과 관세음보살을 비롯한 보살들, 역대 조사와 스승들, 살아있는 선지식들 모두 인연 아닌 분이 없지만, 아티샤 존자는 그 가운데서도 각별한 인연이 된 분이다.
티베트의 보물인 <보디도등론>을 역설하며 라마교를 부흥시킨 아티샤는 인도 스님이다. 동인도 사호르 왕국의 왕자였던 아티샤는 왕위를 계승하지 않고 출가한 뒤 현교와 밀교를 두루 섭렵해 인도에서도 명성이 드높았다. 비구라마시라승원의 장로였던 그는 서티베트 코르레왕의 초청으로 1042년 가리지방으로 가서 티베트불교를 쇄신시키고, 마음수련법을 널리 펼친 인물이었다.
천 년 전의 인물인 아티샤 존자(982~1054)와 현세에 인연을 맺은 것은 8년 전 북인도 마날리에서 히마첼의 오지 스피티로 넘어가는 고갯길에서였다. 북인도는 꽁꽁 얼어붙는 11월이라 고갯길엔 살을 에는 듯한 삭풍이 불었다. 초르텐들(하얀 티베트 불탑)이 나란히 선 옆 곰파(티베트 절)의 자취엔 아티샤 존자의 발자국이 선명한 단단한 돌이 놓여있었다. 어린아이의 것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 작은 발자국이 인상적이었다. ‘아티샤’란 이름을 처음으로 새겨들은 뒤 다시 고개를 넘어 오지 유목민 마을에 들렀더니 아티샤 존자가 머물며 수행하다 심은 나무가 있었다.
아티샤 존자의 가피였을까. 북인도에서 남쪽 끝까지 무사히 인도를 순례하고 돌아와 일심으로 화두를 들던 중 말 못할 체험에 이르렀다. 그 후 여러 선지식을 뵈었지만, 시원한 답을 듣지 못했다. 그렇게 속앓이를 하던 중 다시 속을 뚫어준 이가 아티샤 존자였다.
<아티샤의 명상 요결>을 만난 것은 속앓이 3년 만이었다. 이 책은 아티샤의 가르침인 ‘마음수련법’을 토대로 인도와 스위스에서 티베트 불교를 배운 뒤 달라이라마의 법문을 통역했던 앨런 윌리스가 썼다.
그 책을 한 장씩 넘기면서 느꼈던 환희란! 말할 수도 없고, 표현할 수도 없다고만 여겨졌던 그 경계를 아티샤는 너무도 선명하게 그려내고 있었다. 일맥상통이었다. 아티샤 존자의 통쾌함에 몇 번이고 춤을 추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르마 수련의 목표는 순수하고 명확한 의식의 수원水原에서 흘러나오는 참된 행복의 상태를 깨닫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그런 상태를 에우다이모니아(진리에 의해 주어진 기쁨)라고 불렀다. 고대 인도인들은 그 상태를 “마하수카(즐거운 자극이 아니라 자신의 순수한 의식 자체에서 일어나는 지복)”라고 불렀다. 그것은 단지 하나의 행복한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감정적 상태들을 받쳐주고, 채우고,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기쁨과 슬픔을 포용하는 존재의 한 상태이다. 그것은 혼란 없이 삶과 교류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고통을 불러오는 원인에 대한 진단 또한 명쾌했다. 첫 번째 번뇌인 어리석음에서 탐욕이 생겨나는데, 이 탐욕은 하나의 대상을 이상화하는 왜곡된 의식이라고 한다.
‘내가 거기 갈 수만 있다면, 그 직업이나 배우자나 차를 가질 수만 있다면 행복할 텐데.’
이런 이상화는 우리가 집착하는 하나의 허구를 창조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한 사람을 허구와 겹쳐 볼 때, 그 아름다운 허구와 사랑에 빠질 수 있지만 나중에는 그 사람이 변했다고 실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저자는 어떤 것의 본질을 깊이 탐구함으로써 그것이 사라진다면, 그 현상은 신기루처럼 처음부터 실재하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고 했다. 그는 우리의 가슴 아픈 ‘사랑’에 대해서도 자상한 해석을 잊지 않았다.
“내가 사랑하는 이 사람이 나에게 행복을 준다. 그 모습, 얼굴, 목소리는 아주 매력적이다. 나는 그것을 가져야 한다.”
이것이 바로 집착인데, 집착은 하나의 대상 속에서 자기만족을 찾으려는 동기로 움직인다고 한다. 그는 관계에 근심이 생기는 이유는 사랑이 많아서가 아니라 집착이 너무 많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그리고 사랑과 집착을 구별할 수 있는 시금석은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더 나쁜 쪽으로 변했다고 보일 때라고 한다. 그 사랑이 진짜라면 사랑의 느낌은 더 강해지고, 사랑이 단지 집착이었다면 그 느낌은 물러난다는 것이다.
<아티샤의 명상요결>은 저자도 명쾌하지 않고, 듣는 이나 읽는 이도 명쾌해질 수 없는 알듯 모를 듯한 희론서들과는 출발부터 달랐다. ‘수행의 목표가 행복’이라는 점을 분명히 할 뿐 아니라 “영적인 수련이 단지 낡은 습관의 새로운 포장이 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 또한 “명상이 단지 마음을 가라앉혀서 고요를 찾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을 개선시키는 것”임도 분명히 했다. 하지만 나를 춤추게 한 것은 정작 이런 ‘정의’가 아니었다. 그것은 체험에 대한 정확하고 구체적인 묘사였다.
“의식의 자질에 적합한 최상의 단어는 ‘투명성’이다. 투명성은 이중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데, 하나는 유리와 공기처럼 완전히 비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밝음이나 광명이다. 투명성은 밝은 태양이 사막의 고운 모래 속의 샘물을 비추는 것으로 묘사된다. 물속에 보이는 어떤 것도, 심지어 먼지 한 조각조차도 밝게 비추어진다. 이것이 의식의 자연스러운 상태를 규정짓는 특성이다. 그 상태는 투명하고, 밝게 빛나고, 허공 그 자체와 같고, 조금의 티끌도 끼지 않는다. 의식은 인식, 광명, 텅 빔(空性)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는 마음을 변형시켜 이런 체험에 이르는 7가지 마음수련법을 제시한다. 하지만 그가 “불교의 가르침은 의식의 흐름에 새겨진 부정적인 카르마의 씨앗들을 무효화하는 게 가능하다. 행위는 원상태로 되돌릴 수 없지만, 카르마의 씨앗들의 영향이 무효화되도록 마음의 흐름을 정화시키는 것은 가능하다”며 제시한 정화의 네 방법만으로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이 책이 마음을 정화시키고 치유키 위해 제시한 첫 번째는 참회다. 즉 자신의 악행을 인정하는 것이다. 참회에는 결과를 인정하는 것이 포함된다. 이 수행에서 주의할 것은 악행을 기뻐하는 것은 부정적인 카르마의 씨앗의 성향을 강화시키고, 선업을 기뻐하는 것은 긍정적인 카르마를 강화시킨다는 점이다. 따라서 선업을 기뻐하라는 것이다.
두 번째는 신뢰다. 신뢰는 타인에 대한 자비심을 계발시키고, 영적인 스승의 인도에 우리 자신을 내맡기게 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결단이다. 결단의 힘으로 건강하지 못한 행동을 멈추고, 잘못된 행동에서 돌아설 수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 네 번째는 정화다. 부정적인 행동을 중화하고, 무효화하는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란다. 즉 해독제를 쓰는 것이다. 예를 들면 살인을 저질렀을 때 해독제를 이용하는 것은 생명을 보호하는 일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
불교는 이 네 가지 치유 능력을 통해 가장 악독한 행위의 힘조차 완전히 소멸시킬 수 있다고 한다. 정화될 수 없을 만큼 사악한 행동은 세상에 없다는 것이다.
아티샤의 명저는 내게 지극한 기쁨을 주었을 뿐 아니라 죄업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도 희망의 메시지를 담은 선물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