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0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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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밝히는 기도

최윤필
한국일보 기자


벌써 10년도 더 지난 일입니다. 당시 사회부 기자였던 저는 서해에 침몰한 고려청자 보물선을 찾는 데 반생을 매달려 살아온 뱃사람들을 만나 취재한 적이 있습니다. 휴대전화가 드물던 시절입니다. 어렵사리 수소문해 군산의 한 허름한 여관에서 그 분들을 만난 것은 눈보라가 휘몰아쳐 우산 받쳐 걷기조차 힘들던 세밑 이맘때 저녁 무렵이었습니다. 기억이 무뎌 그 분들의 얼굴과 이름은 아득하지만, 눈발에 가려 윤곽마저 어둑선했던 낯선 포구도시의 잿빛 풍경의 느낌과 갯바람의 맵찬 기세만은 오롯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당시 그 분들의 눈빛에 깃든 다부진 확신은 선연히 기억합니다. ‘보물선은 있다’는 것, ‘이번에는 틀림없다’는 것, ‘이제 이 고생도 얼마 안 남았다’는 것. 확신의 근거에 대해 적지 않은 말들을 주고받았겠고, 그 말의 내용들도 지금의 기억에서 지워진 지 오래입니다만, 동지(同志)로서의 기대보다는 의심에 찬 구경꾼에 가까웠을 저의 마음조차 꿈 속으로 빨아들일 듯 맹렬했던 그들의 찬란한 열정은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도 어쩌면 가족을 비롯한 친지들의 집요한 만류와 거듭되는 실패의 구비마다 불쑥불쑥 머리를 디밀었을 근원적 회의의 순간이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시시각각 생사를 다투며 살아온 뱃사람 특유의 간결한 어투 속에는 긴 모색과 실패를 통해 연마됐을 투사의 감각들이 더 생생히 살아 꿈틀거리는 듯했습니다.
제 취재 의도는 보물찾기의 성패 가능성보다는 그 맹목에 가까운 열정의 맥락을 살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요컨대 저의 과녁은 보물선 찾기의 매커니즘이 아니라 보물선에 매달려온 삶의 맥락이었습니다. 근대적 인간의 삶은 대체로 확률적 지식과 이성적 판단에 의존하지만 때로는 이해하기도 납득하기도 어려운 순간의 선택들이 그 속에 버무려져 있곤 합니다. 그래서 인간이란 너나없이 이성과 통계의 힘으로 온전히 길들일 수 없는 원시적 원초적 충동의 인자를 유전적으로 내장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아니 심지어 어떤 열정은 확률과 반비례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때가 있습니다.
 
2년 전 이맘때 제가 다니는 회사 한 부서의 1박2일 망년회에 초대받아 경기 북부의 한 작은 위락시설로 놀러 간 적이 있습니다. 망년회의 주된 대화라는 게 처음에는 집단적 관심사의 언저리에 머물며 얼마간 듣기 좋은 분식(粉飾)의 담론들이 오가곤 합니다. 서로의 노고에 대한 상찬과 희망, 각오, 다짐의 건배사들이 줄을 잇습니다. 하지만 다들 술기운이 거나해지면 전열이 흐트러지면서 친한 이들끼리 삼삼오오 모이게 되고, 자연히 대화의 소재는 소소한 일상의 일들로 느슨해지기 십상입니다. 아이들의 진학문제나 생활의 곤란, 가족 친지의 건강, 미래에 대한 불안 따위의 이야기들입니다. 이 경우에는 또 얼마간은 역(逆)분식이 불가피한 듯합니다. 술기운에 실려 배어 나오는 삶의 고충들은 조금씩 실제보다 증폭되는 것이지요. 대화가 이어지다 보면 으레 분위기는 가라앉기 십상인데, 그 때 한 직원이 대뜸 ‘로또’ 얘기를 꺼냅니다. 누가 됐다더라, 누군 좋겠다, 무슨 걱정이 있을까, 그럼 나도…. 다들 얼마간은 허황된 일확천금의 꿈에 젖어 만사 근심걱정 떨쳐버리겠다고 다짐하듯 건배를 제안하고, 조금씩 스스로를 속이면서 다시 왁자지껄 활기찬 웃음을 되찾습니다. 그 날의 망년회 풍경도 저런 통속의 절차와 그리 다르지 않았습니다.
자고 올 형편이 안 되던 탓에 새벽녘에 차를 몰고 나와야 했던 저는 귀가 길에 주유소에 들렀습니다. 그런데 그 주유소에서 사은품으로 로또 복권을 건네는 거였습니다. 저는 마치 운명의 장밋빛 약속처럼 건네 받은 로또 복권을 곱게 접어 지갑 속에 넣었습니다. 당첨의 행운을 상상하며, 상금의 용처를 나누고 또 그 행복을 나눠 가진 제 이웃들의 행복한 표정을 떠올려보며 새벽 운전의 피로를 잊은 기억이 제게도 있습니다. 로또 당첨의 확률 따위는 그 순간의 제겐 무의미했던 것 같습니다.
 
산삼을 캐는 심마니들은 산행 일정이 정해지면 그 날부터 일상을 경건하게 다잡는다고 합니다. 욕심을 벗고 부정한 것들을 멀리하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입산의 순간, 행운의 순간을 예비합니다. 그리고 산 속에 깃든 신령한 존재에게 머드러기로만 제수를 차려 바치고 기도합니다. 그들의 마음속에 산삼이란 물질적 가치로 환산될 수 없는, 그야말로 신령의 화신이자 소유물입니다. 해서 산삼을 얻고 얻지 못하는 것은 오직 신령의 마음에 달려 있다는 것, 신령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신령의 자리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서야 한다는 것, 그 위험할 수도 있는 시도에 임하는 자는 한없이 자신을 낮추고 지극히 청정한 마음으로 임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직업윤리입니다. 식솔을 부양하기 위해서는 산삼을 얻어야 하지만, 먼저 탐심을 버려야 산삼을 기대할 수 있다는 절박한 모순을 짊어지고, 희박한 확률의 희망이 혹시 탐욕의 부정으로 엎어지지 않도록 아슬아슬 기우뚱거리며 길 없고 인적 없는 산 속을 하염없이 헤매는 것입니다.
 
또 옛 우리의 할머니들은 집안의 큰 일을 앞두고 늘 치성을 드렸습니다. 첫새벽 정한 샘물을 길어 한 그릇 상에 올려놓고 기도를 합니다. 그것을 ‘비손’이라 했습니다. 거룩한 존재의 영검을 비는 간절한 기도인 바, 그 기도의 내용보다 기도에 임하는 경건한 마음이 이미 거룩해서, 집안의 큰 어른들조차 그 근처로는 다가서지 않고 잔기침조차 삼갔습니다. 일상의 어느 호젓한 순간,
지금 내가 이룬 보잘 것 없지만 그래도 소중한 삶의 성취들이 그 새벽의 비손에 힘입은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습니다.
할머니뿐입니까. 우리의 어머니들은 해마다 입시철이면 아이들이 시험을 치르는 학교 교문 앞에 서서, 추위에도 아랑곳 않고 합장한 채 하루 종일 기도를 하곤 합니다. 입시를 100일 앞두고부터 절이나 교회를 찾아 새벽마다 기도하는 어머니들도 적지 않습니다. 얼마 전 치러진 대입 수능일에도 같은 풍경이 반복됐고, 저는 그 간절한 기도의 장면을 볼 때마다 문득문득 숙연해지곤 합니다.
희망하는 대학의 정원은 한정돼 있으므로 내 아이의 성공은 부득이 다른 아이의 불행을 전제한 것이라는 생각, 그러므로 저 간절한 기도가 타인의 불행을 비는 저주의 ‘방자’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애써 누릅니다. 다만 아이가 실수로 제 기량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는 일은 피할 수 있게 해달라는 염원, 밤잠 새벽잠 설쳐가며 애써 공부한 바의 보람을 지금 치르고 있을 저 단 한 번의 가혹한 시험을 통해서나마 누릴 수 있게 해달라는 소박한 기원만을 해보고자 합니다. 심마니의 기도처럼, 수험생 학부모의 기도 역시 탐심과 희망, 기도와 방자의 아슬아슬한 모순의 경계 위에 서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이 유래 없는 경쟁 사회에서 우리는 누구나 조금씩은 지쳐 있습니다. 그 끝없는 경쟁에 저항하듯 ‘한방’을 꿈꾸며 누구는 감춰진 보물을 찾습니다. 고단한 마음을 달래는 방편으로 누구는 로또 복권을 사고, 누구는 치성을 드리고, 또 기도를 합니다. 그 염원은 차가운 이성과 확률의 숫자 너머에서, 신의 영역에 가까이 가 닿고자 파도처럼 끊임없이 일렁입니다.
아득한 확률 덕분에 어떤 꿈은 아름다운 낭만이 되기도 합니다. 카리브해에 떠 있는 작은 섬의 심상한 풍경이 해적 키드 선장이 감춰뒀다는 보물의 전설 덕에 더 환상적으로 보이듯, 군산과 신안 앞바다의 탁한 서해 물빛이 그 속에 잠겨 있을지 모르는 고대의 보물 이야기로 하여 신비로워 보이듯, 삶의 한 귀퉁이에 가망 없는 행운의 기대 하나쯤 품고 사는 것이 그리 탓할 일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다만 우리의 열망과 기도가 이웃과 세상 속으로 확산되지 않고, 오직 나와 내 가족에게만 머물 때 그것은 기도가 아니라 방자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세상을 밝히는 기도, 보편적 정의와 사해만민의 평화와 안녕을 구하는 얼핏 허황돼 보이는 기도가 나의 행복을 구하는 가장 구체적이고 절절한 기도일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며 또 기도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