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 다스리기 -
승한 스님
북한산 중흥사 총무스님
화에도 메커니즘이 있다. 화의 메커니즘을 잘 알면 우리는 화를 얼마든지 잘 쓰고 잘 다스릴 수 있다. 사람이 화에 지배당하는 것은 화의 메커니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니, 알려고 조차 하지 않기 때문이다.
화는 무엇인가? 화는 단지 우리가 원하는 대상 또는 상황에 대한 우리의 욕구가 좌절되거나 부합되지 않았을 때 일어나는 불유쾌한 감정일 뿐이다. 아주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인체 에너지일 뿐이다.
실제로 화는 불이다. 그래서 한자로도 불(火)이라고 쓴다.
화가 꼭 나쁘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다. 화는 인체 에너지이고, 그 에너지 속에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불이 파괴의 원인이기도 하지만 창조의 원이이기도 한 것은 그 까닭이다. 불이 없는 지구와 인류를 생각해보라. 불이 없었다면 인류의 존재와 문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불이 없었다면 인류와 인류의 역사와 인류의 문명은 결코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인간의 수명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불이 없었을 때 인간의 수명은 고작 30~40세였다. 그러나 불의 에너지가 발달하면서부터 인간의 수명도 점점 늘어나 지금은 평균 수명 80을 웃돌고 있다. 인류문명도 달을 넘어 화성까지 정복하는 시대가 됐다.
우리 몸도 마찬가지다. 불(火)의 에너지가 없다면 우리 몸은 몸으로서의 구실을 제대로 할 수 없다. 인간의 몸이 지地·수水·화火·풍風 4대로 이루어진 것도 그 때문이다. 불의 에너지(체온)가 동력이 되어 우리 몸을 구성하고 지탱하고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 동력을 잘 쓰면 화는 우리 몸에 활활 기름을 불어넣으며 희망과 기쁨, 평화와 행복을 창조한다. 그러나 잘못 쓰면 한순간에 엄청난 파괴와 절망, 전쟁과 고통을 야기한다.
화의 메커니즘은 간단하다. ‘있다→좋다(나쁘다)→싶다→썅(화)’이다. 이 메커니즘만 제대로 꿰뚫고 있으면 좀처럼 화는 우리를 괴롭히지 못한다.
먼저 ‘썅’ 하고 화를 내기 위해서는 그 화를 일으키게 한 발화점이 있어야 한다. 그 발화점은 사람일 수도 있고, 물건일 수도 있고, 어떤 상황일 수도 있다.
그 발화점에 ‘좋다, 나쁘다’ 하는 불씨가 옮겨 붙으면서 화는 시작된다. 어떤 대상 또는 상황을 보고 우리가 ‘좋다, 나쁘다’ 하고 가치평가를 하는 순간 화는 불씨를 잉태하는 것이다. ‘좋다, 나쁘다’고 하는 상대적 가치를 부여하면서부터 화의 불씨는 에너지를 얻는 것이다.
가치평가가 화의 불씨가 되는 것은 그것이 곧 우리의 욕망(욕구)과 이어지기 때문이다. ‘좋다, 나쁘다’는 상대적 가치평가가 이뤄지는 순간 우리 마음은 그것을 갖고 싶다거나, 혹은 갖고 싶지 않다는 ‘싶다’ 욕구가 발동하기 때문이다. 나에게 좋은 것은(유익한 것은) 저절로 갖고 ‘싶’고 나에게 나쁜 것(불리한 것)은 저절로 밀어내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 아닌가.
내 뜻대로만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면 탈날 일이 없다. 허나 세상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면 다른 사람도 모두 좋아할 수 있고, 내가 싫어하는 것이면 다른 사람도 모두 싫어할 수 있다. 또 내가 원하는 것이면 다른 사람도 모두 원하는 것일 수 있고, 내가 밀어내고 싶은 것이면 다른 사람도 모두 밀어내고 싶은 것일 수 있다. 내 뜻대로 이뤄지지 않는 것, 내 뜻대로 순종되지 않는 것, 그것이 세상사 이치이고, 인간사지 않던가.
화를 잘 다스리기 위해서는 바로 그 첫 지점에서 화의 불씨를 사그라지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불씨가 지펴졌더라도 더 이상 불길이 번지지 않도록 불씨를 알아차리면 된다. 그러나 대부분 이 대목에서 실패하고 만다. 순간적으로 화의 불씨가 연소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적당한 기운을 만나면서 걷잡을 수 없이 번지고 만다.
화의 에너지는 정말 가공스럽다. 우리 몸과 마음의 생체리듬을 완전히 뒤틀리게 하는 것은 물론, 일파만파로 퍼져나가 온 세상과 우주를 전쟁터로 만들고 만다. 반드시 화를 다스려야 하는 이유다.
그러나 겁낼 필요는 없다. 무서운 만큼 화를 다스리기 쉬운 것도 없다.
첫 번째 방법은 앞서 언급한 대로 ‘있다→좋다→싶다→썅’이라는 화의 메커니즘을 꾸준히 명상하는 것이다. 그러면 화의 발화점이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하고, 발화점을 찾는 순간 화의 불씨를 내 몸에 떼어 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화의 기초신념을 바르게 정립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화 자체는 그 어떤 선악도 없는 무기無記요, 물자체(物自體. 칸트가 한 말로 인간의 인식은 현상에 관한 것일 뿐, 본체는 아무도 알 수 없는 불가지론적인 것이라는 뜻임.)다. 부처님 말씀대로 본래 청정淸淨이요, 여여실상如如實相이요, 진리일 뿐이다. 번뇌 즉 보리라는 말도 그래서 나왔다.
그 어떤 경우에도 화날 상황은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도 화 해결책으로 아주 좋다. 화는 어느 때나 치밀어오를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화가 치밀어 올라도 그 화를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 화 자체는 선도 악도, 평화도 전쟁도 아닌 그 어떤 ‘썸씽something’ 에너지일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 어떤 ‘썸씽’ 앞에서 우리가 너 잘했다 나 잘했다 하고 화낼 수는 없잖은가.
이미 화를 내버린 상황에서도 대처법은 있다. 화가 난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여버리는 것이다. ‘그래, 화란 얼마든지 날 수 있는 법이야.’, “그래, 사람이란 다 화가 나는 법이야.” 하면서 “나도 인간인데 얼마든지 화를 낼 수 있잖아.” 하고 자신을 따뜻한 마음으로 수용해버리는 것이다. 자책할수록 화는 더 나기 때문이다.
‘감정이 있을 땐 절대로 행동하지 않는 것’도 화 다스리기에 아주 좋은 방편이다. 불난데 기름을 부으면 불은 더 잘 탄다. 마찬가지로 화가 나서 고통스러워 죽을 지경인데 거기다가 행동까지 보태버리면 화는 마침내 빅뱅상태로까지 발전해버린다.
화가 날 때 ‘하나- 둘- 셋-’ 하고 숫자를 세며 세 번만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쉬는 것도 화의 긴급 대처법으로 아주 유용하다.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내쉬면서 하나~, 또 한 번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내쉬면서 둘~, 다시 또 한 번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내쉬면서 셋~ 하고 숨을 쉬는 동안 화는 이미 객관화된다. 내가 지금 무엇 때문에 화를 내고 있는지, 왜 화내고 있는지, 화내는 자기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된다. 그 순간 화의 불길은 서서히 잡히기 시작한다. 이것을 수식관數息觀이라고 한다.
때로는 의도적인 밖풀이(화풀이)도 괜찮은 해소책이다. 그러나 이땐 신중을 기해야 한다. 아무리 의도적인 밖풀이라 할지라도 잘못 하면 습이 되어버린다. 그러므로 의도적인 화풀이를 할 땐 자신이 일부러 그렇게 연출하고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알아차리고 있어야 한다. 자신이 지금 화를 풀기 위해 의도적으로 연출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고(각성하고) 밖풀이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완전한 깨어있음이 없는 상태에서 이 방법을 사용하면 상대방은 물론 오히려 자신에게 더 큰 고통이 된다.
화의 2원화도 퍽 좋은 화 해소법이다. 예를 들어 누가 ‘야, 이 새끼야’ 하는 소리를 듣고 화가 나는 순간, 그 화를 나와 뚝 떼어놓고 바라보는 것이다. 나와 뚝 떼어놓고 화의 질감을 느꼈을 때 놀랍게도 화와 나는 2원화가 된다. 화내는 나와 화가 분리되면서 화의 불길이 서서히 가라앉는 것이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최고의 특효약은 명상이다. 화의 메커니즘을 알고, 화의 구조와 생성 원리에 대해 깊은 명상을 할 때 화는 뿌리째 치유할 수 있다.
화 명상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내관법內觀法과 외관법外觀法이다.
내관법은 말 그대로 화의 메커니즘 속으로 깊이 사유해 들어가는 것이다. 예를 들어 길동이가 ‘이 놈아’ 하니까 내가 화가 났다면 반드시 그 이유가 있다. 길동이로부터(혹은 사람들로부터) 존중받고 싶어 하는 내 욕구가 좌절되었기 때문에 화가 난 것이다. 그런데 이 욕구는 왜 생기는가? 그 주범은 바로 너와 나, 즉 주와 객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와 나, 즉 주와 객이라고 하는 상대적 관계가 없어진다면 욕구 자체도 없어져버린다. 욕구 자체가 없는데 내가 화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다른 말로 이것을 무아관無我觀이라고도 한다. 깊은 명상을 통해 나(내 것)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선명히 깨달음으로써 자아가 사라지고, 자아가 사라짐으로써 욕구가 사라지고, 욕구가 사라짐으로써 화날 일(대상, 상황)이 저절로 사라지는 것이다.
외관적 방편은 스승이신 용타스님께서 전수해주신 비법이다. 어떻게 보면 이 외관법이야말로 우리들의 실생활에 곧바로 활용할 수 있는 최고의 화 다스리기 비법인지도 모른다. ‘구나-겠지-감사’라는 아주 쉽고도 간단한 명상(‘나지사 명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하나로 쉽게 화를 잡을 수 있다.
길동이를 다시 예로 들어보자. 길동이가 ‘야, 이 놈아’ 하니까 화가 났다. 바로 이때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욕을 듣는 순간 바로 화 모드로 들어가지 말고 ‘길동이가 야, 이 놈아 하는 <구나>’ 하고 그 사건(상황)을 자신과 뚝 떼어놓고 객관화시킨 뒤 그 화를 멀리서 건너다보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순간 벌써 맑고 시원한 에너지가 가슴에서 솟아나온다. 그 다음엔 ‘길동이가 야, 이 놈아 할 땐 그럴만한 사정(또는 연기)이 있<겠지>’ 하고 길동이가 ‘야, 이 놈아’ 한 사정이나 이유를 하나하나 생각해보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길동이가 나에게 ‘야, 이 놈아’ 하고 욕 한 것이 차라리 <감사>하게 느껴지는 지점이 생긴다. 생각해보라. 길동이가 나에게 뭣인가 크게 화날 이유가 있었는데, 그래서 몽둥이나 주먹으로 나를 패버릴 수도 있는데 ‘야, 이 놈아’ 하고 가볍게 욕으로 끝내준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또한 앞으로 다시는 만나지 말자고 아예 관계를 끊어버릴 수도 있는데 그냥 가벼운 욕만으로 끝내줘서 참으로 다행일 수도 있지 않은가.
한데, 이 외관법을 사용할 때 좀 염두 할 것이 있다. ‘구나-겠지-감사’ 명상을 처음 시작할 때는 좀 가벼운 사건(상황)부터 시작하라는 것이다. 처음부터 너무 무거운 주제, 예를 들어서 ‘남편이 술 마시고 나에게 폭력을 행사했다’던지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가 날마다 방바닥과 벽에 똥칠을 해놓는다’든지 하는 무거운 주제로 ‘나지사 명상’을 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 있다. 오히려 화가 더 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학교 갔다 온 아들이 인사도 안하고 제 방으로 들어가버렸다’든지 ‘남편이 술 마시고 조금 늦게 들어왔다’든지 하는 가벼운 주제부터 ‘나지사 명상’을 시작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차츰차츰 주제가 무거운 것으로 옮겨 간 뒤, 어느 정도 연습이 되었을 때 가장 무거운 주제로 옮겨가라는 것이다. 연습이 천재를 낳는다. 그렇게 한번 힘이 붙고 나면 웬만한 화는 저절로 다 지배하고 다스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