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이라마
티베트 승왕
유혹의 세상입니다.
마음에서 법을 놓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별해탈계의 목차를 봅시다. 고향을 떠난 수행자가 법을 구하여 보살의 수행을 하지요. 마르빠 역경사의 삶을 되짚어 보세요. 물질적인 것에 얽매이지 않는 삶이란 무엇인가 그 방향을 보세요. 당신의 질문에 수행자의 표본이 되어줄 겁니다.
스승으로부터 구전 받은 대승장엄경론을 전부 다 그대로 전승한다는 것이 수월하지 않습니다.
붓다께서 법을 설하심에 가장 먼저 강조한 것은 사성제의 본질과 작용 그리고 그 결과임을 항시 숙지해야 합니다. 그 진리를 네 가지로 규정하고 괴로움의 본질을 바로 보는 것에서 나를 살피도록 하셨습니다. 고통의 원인을 찾는 과정이 바로 수행입니다. 찾은 원인을 제거하기 위해서 바른 수행이 필요합니다.
여기 화를 잘 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올바른 수행의 차제를 밟아 고통의 원인이 업과 번뇌를 제거했다면 수승하다 인정해야 합니다.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번뇌의 씨앗을 대치시키는 힘을 키우는 것이 수행력입니다.
인식하는 고통의 원인은 본질적으로 의식에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때문에 탐진치는 뿌리가 없습니다. 왜 화를 내는가? 그 이유를 묻는다면 의식에 오랜 시간 길들여졌기 때문입니다.
객진번뇌를 해석해 봅시다. 일시적으로 일어났다 이내 사라지는 것이 바로 정체입니다. 그 일시적인 현상을 바라보고 반대가 되는 의식으로 대치하여 길들일 때 삼독심은 사라지게 됩니다. 의식을 전환하는 것이 금강승 수행의 핵심입니다. 죽음이 임박하는 순간의 의식으로 그 예를 듭니다.
그 누구도 고통을 겪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외 없이 범부는 고통을 겪습니다. 사성제의 멸제는 저절로 이루어 성취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으로 존경하는 성인을 보십시오. 내면의 번뇌가 객진과 다르지 않음을 알아 무자성의 본성을 깨달은 분들입니다.
종교는 자비심의 실천을 그 목표에 둡니다. 그 가운데 불교는 나의 마음을 알고 챙김을 통해 번뇌를 제거하는 길을 지도합니다. 그 지도서가 바로 논전이며 사성제의 도제입니다. 번뇌의 뿌리는 모든 것이 실제한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분별과 망상이라고 하지요. 본래의 모습이 내가 보고 느끼는 것과 완벽히 일치하지 않음을 알아차리도록 하는 것이 바로 도제입니다.
우리의 무지는 의식 전체에 분포되어 있습니다. 그 때문에 각 상황에 맞춰 의식이 생기고 또한 멸합니다. 고통의 원인이 제거되기 위하기에 의식을 다스리고자 결심한 수행자는 반야심경의 ‘아제아제바라아제’에 담긴 진중한 함의를 헤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나의 몸과 말 그리고 생각을 조정하는 주체인 나에게 생멸하는 번뇌의 실체란 일시적일 뿐 고정되어 변화하지 않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깨달음의 가능성은 차별이 없습니다. 우리의 의식은 형색의 본성이 공함을 바로 알아 바꾸어 가는 것입니다.
기도만으로 이루는 것은 상당히 미약합니다. 법을 청하여 바르게 사유하고 실천하여 스스로가 철두철미하게 단련해가야 합니다. 세대 간의 차이라고 흔하게 말하지만, 변화와 해체는 만물의 본성입니다. 나에 대한, 세상에 대한 길들임의 방편 역시 변화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사유방식도 저 때와는 많은 부분 차이가 납니다. 코로나19 장기화로 지금처럼 인터넷을 통한 비대면 법문이 활성화된 것만 보더라도 우리 인간은 적응하는 동물임이 분명합니다. 지난 20세기의 주류인 저와 달리 지금의 젊은이들이 원하는 채널에 맞춰 가르침을 전하고 나누는 방편 역시 적극적으로 고민할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반야부에서는 한 생의 성불만을 단언하지 않습니다. 성불은 무상요가에 해당하는 경지입니다. 일반인의 한 생 동안 끌고 가는 몸으로 성불하기란 결코 순조로운 경우가 아닙니다. 밀라레빠의 수행력을 예로 들면 수행의 깊이가 생길수록 깨달음으로 근접하여 다가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스승이 제자에게 수행을 지도할 때 역시 한 생에 깨달음을 얻는다는 환상을 항시 주의하도록 당부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수심팔훈에서 일컫는 말씀 가운데, “항시 나를 가장 낮은 자리의 사람으로 임하도록 하라.”는 말씀을 유념하는 한 해의 마무리가 되기를 기원해 봅니다. 상대를 언제나 존중하고 공경하는 습관을 길들이도록 스스로 약속해 봅시다. 지금부터 일어나는 생각 행동의 기반이 되는 거친 의식을 항시 미세한 의식으로 흡수시키도록 하세요. 이러한 공성 수행의 방식을 통해 가장 미세한 의식만 남기도록 해봅시다. 미세한 의식은 초미세한 의식으로 점차 흡수시켜 봅시다. 점차 본존으로서의 자부심이 샘물이 솟듯이 피어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