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頂宇 스님
본지 발행인 | 구룡사 회주
『화엄경華嚴經』 「초발심공덕품初發心功德品」은 ‘미래제가 다할 때까지 그 공덕이 광대무변廣大無邊하여 끝나지 않을 것’이라 하였습니다.
초발심 공덕이란 모든 일의 원인이요, 씨앗이요, 열매이기도 합니다.
처음 발심한 보살은 부처님의 모든 공덕을 믿고 받아 지니고 닦고 얻어서 알고 증득證得했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과 평등한 성품을 느끼고 활용하는 이치를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처음 발심한 보살의 광대무변한 마음의 공덕功德이 이처럼 위대하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초발심한 보살은 이 세상 중생들을 모두 교화하고 제도해야 할 의무를 가졌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길을 떠나라, 두 사람이 함께 가지도 말라, 갔던 길로 되돌아오지도 말라” 하셨으며, “모든 이의 이익과 안락과 행복을 위해서 길을 떠나서 법을 설하라,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으니 조리 있는 말로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설하라” 하셨습니다.
오늘 오신 불자님들도 발심하셨기 때문에 이 자리에 모이신 것입니다.
때문에 발원發願하기는 사홍서원四弘誓願이어야 하고, 염원念願하기를 부처님 말씀이 아니면 생각하지 않고, 말하지 않고, 행동하지도 않는 불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한 마음이 불자의 근본 모습이어야 하 기 때문입니다.
「초발심공덕품」에, 『화엄경』을 설할 때 일만 부처님 세계에 미진수微塵數 헤아릴 수 없는 보살들이 보리심菩提心을 내었다고 하였습니다.
2,600년 불교사佛敎史 가운데 불교가 우리나라에 공식적으로 꽃피우기 시작한 지 1,700년 한국에서 1만 부처님을 모신 절은 첫 번째 사찰이 구룡산 자락에 우리 구룡사입니다. 1,400년 전 통도사에서 싹을 틔운 부처님의 불종자佛種子를 거두어 수확한 곳이 구룡사요, 구룡사에서 그 씨앗을 성숙시켜 열매를 맺어 다시 씨앗으로 심은 곳이 일산 정발산 여래사입니다.
구룡사에 1만 부처님을 모셨고, 이어 여래사에도 1만 부처님을 모셨습니다.
그리고 국내외 20여 곳의 통도사 포교당에 모신 부처님이 1만 부처님은 넘을 것입니다. 이처럼 저와 인연 맺었던 불자들이 3만 부처님을 원불願佛로 동참하여 그 불사에 함께했다는 것은 높이 평가받을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불자들의 신심과 원력은 초발심 정신으로 보리심을 내었기 때문입니다.
변조광명무여지徧照光明無餘地요
하방세계유암야下方世界有暗耶니라.
부처님의 광명이 일체중생一切衆生을 두루 비추니,
시방세계十方世界 어느 곳인들 어두운 곳이 있을 수 없느니라.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 여래如來의 종성種姓과 법보法寶의 종성과 승보僧寶의 종성이 끊이지 아니함으로 남음이 없이 똑같이 비치지 않는 곳이 없다는 가르침입니다. 햇볕이 쨍쨍한데, 그늘이 지는 것은 그 그늘을 내가 만들어서 그늘이 지는 것이지 햇빛 자체가 그늘을 만들거나 햇빛을 반사해서 그늘이 져지는 일은 없는 것처럼, 실질적으로는 어둠이니 고통이니 괴로움이니 하는 것들도 존치되어 있지 아니함을 우리는 충분히 인식하면서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보살이 보리심을 일으킨 공덕은 어찌하여 그토록 한량이 없는 것일까요.
한 생각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삼세를 밝게 통과해서 한량없는 중생을 이익되게 한 까닭입니다. 보리심이 시방에 두루하여 여러 가지 분별을 모두 다 알고 한 생각에 과거 현재 미래를 통달해서 한량없는 중생을 이익 되게 한 까닭으로 초발심의 공덕이 불가사의不可思議하다는 가르침입니다.
보리심은 어버이의 마음과도 같은 연민심憐愍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살고 있는 허상의 인생이 꿈과 같음을 알아차려서 집착과 미움을 줄여가야 합니다. 모든 중생을 따뜻하게 대해야 합니다.
젊은 시절부터 변함없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 있습니다. 저보다는 내가 살고 있는 사찰 구룡사나 여래사나 또 나와 깊은 인연을 가지고 있는 포교당까지도 나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사찰보다는 조계종단을 더 귀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보다 더 큰 것이 있다면 불교 그 자체입니다.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늘 신심을 키우고 원력을 세우고 있습니다.
그것이 보리심이 되어서 함께하는 우리가 될 수 있도록 매일매일 다듬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대하든 우리 불자들은 연민심과 사랑과 자비로 대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곳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살고 있는 나의 모습이 업력중생業力衆生일지라도 긍정적인 생각을 유지하고 사는 것, 이것이야말로 참된 부처의 성품을 잃지 않고 보리심을 여의지 않는 삶이라 할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지극히 슬픈 일입니다.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살펴보면서 자화상을 들여다볼 수 있는 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보리심을 일으킨 공덕이 무궁무진 불가사의 측량 불가한 것임을 보고 알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경전에서 초발심의 공덕의 크기에 대해 이르기를, 한 생각에 끝없는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일념공양무변불一念供養無邊佛), 또한 무수한 중생들에게 공양을 올리고(역공무수제중생亦供無數諸衆生), 모든 향과 꽃과 아름다운 꽃다발, 과실(이향화급묘만悉以香華及妙鬘), 보배깃발과 당기·번기·일산·의복으로 공양을 올리고(보당번개상의복寶幢旛蓋上衣服), 좋은 음식과 앉을 자리와 법상과 도량으로 공양을 올리고(미식진좌경행처美食珍座經行處), 여러 궁전을 세상에서 제일로 잘 꾸며서 공양을 올리고(종종궁전실엄호種種宮殿悉嚴好), 비로자나 부처님의 이마에 올려있는 아름답고 아주 값진 구슬과(비로자나묘보주毘盧遮那妙寶珠), 여의주와 마니구슬과 같은 보배들을(여의마니발광요如意摩尼發光耀), 순간순간 이와 같은 것들을 공양을 올려서(염념여시지공양念念如是持供養), 무량겁의 세월을 지나면서 공양한다고 하면(경무량겁불가설經無量劫不可說), 그 사람의 복의 공덕이 얼마나 많겠는가 생각하겠지만(기인복취수부다其人福聚雖復多), 그러나 발심의 공덕이 큰 것에는 미치지 못한다(불급발심공덕대不及發心功德大)라 했습니다.
그러니 처음 발심한 이에게는 욕계慾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를 지나서 가장 높은 이름을 얻었다고 하는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항상 그러한 마음과 자세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따라서 보리심을 일으킨 보살은 행하는 바가 부처님과 똑같다 할 것입니다.
일체 집착을 떠난 것도 똑같습니다. 일체 법문에 들어가지 못한 데가 없고 일체 국토에 모두 다 나아갑니다. 아니 계신 곳이 없습니다.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십니다. 보리심을 일으킨 보살은 일체 지혜의 경계를 다 통달해서 일체 공덕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보리심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보리심은 깨닫는 마음입니다. 보리심을 일으킨 보살의 덕은 지혜의 밝은 광명 햇빛과 같고 모든 행을 갖추기가 보름달 같고 그 공덕은 바다처럼 항상 가득해 때가 없고 걸림 없어 허공과 같습니다.
원효스님은 『금강삼매론金剛三昧論』 서문에서 ‘있다고 할까 아니 한결같은 목숨이 텅 비어 있고, 없다고 할까 아니 만물이 다 여기로부터 나오네. 그것은 광활한 것이다. 대 허공과 같이 사私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평등한 것이다. 큰 바다와 같이 지극히 공평한 것이다. 그것을 일컬어 도리 아닌 지극한 도리라 하며 그것을 일컬어 긍정 아닌 대 긍정이라 하는 것이다. 그것을 목격한 대장부가 아니고서야 누가 언설을 넘어선 대승을 논하고 사려가 끊긴 대승에 깊은 믿음을 일으키게 할 수 있으랴.’라고 했습니다.
모든 행을 갖추기가 보름달 같고 공덕은 바다처럼 항상恒常하여 때가 없고 걸림이 없어 허공과 같다고 한 것처럼, 초발심한 공덕의 크기 또한 그러하다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또 맑고 밝은 지혜의 광명은 태양과 같고 온갖 아름다운 보살행을 갖춘 모습은 보름달 같다는 것입니다. 무량무변한 공덕이 넘쳐나는 것은 저 오대양 육대주, 태평양 바다와 같고 허물도 없고 번뇌도 없고 걸림 없기가 마치 허공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불법을 수행해서 중생들에게 법을 널리 베풀려고 할 때 가장 필요한 것은 서원의 힘이요, 원력의 힘이요, 발원의 힘입니다.
중생衆生을 다 건지고, 번뇌煩惱를 다 여의고, 법문法門을 다 배우고, 불도佛道를 다 이루겠다는 서원誓願의 힘이 보리심에서 발심해 이루어지는 광대무변廣大無邊한 발원인 것입니다.
아무리 지혜가 깊고 자비가 높다 하더라도 중생을 교화하겠다는 원력이 없으면 안 됩니다. 그렇게 부처님 법이 2,600년 동안 전해 내려왔고 이 시대의 우리가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시대의 우리 불자들은 그러한 사명감과 자긍심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가족들에게 그리고 이웃들에게 전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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