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0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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⑬ 철학으로 해설하는 범망경

신규탁
연세대 철학과 교수


 


1.
월간 『붓다』 독자 여러분, 새해에도 행복하시고 불도 수행에 정진이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돌아보면 언제나 그렇듯이, 지난 일들에는 후회와 아쉬움이 남아있습니다. 그래도 해가 가고 나이 들수록 그런 후회와 아쉬움이 줄어드는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지난 한 해에는 󰡔범망경󰡕을 소재로 불자들의 윤리적 삶에 대해서 원고를 써왔습니다. 올해도 이어서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불교佛敎는 말 그대로 부처의 ‘가르침’입니다. 󰡔범망경󰡕은 그 ‘가르침’ 중에서도 윤리나 도덕에 관한 내용을 다룹니다. 이런 내용은 대학교의 여러 학과 중에서 철학과哲學科에서 공부하는 중요 영역입니다. 저는 불교를 대상으로 철학의 학적學的 방법론方法論을 활용하여 불교를 연구하는 연구자입니다. 요즈음 정치권에서 무슨 ‘법사’니 ‘도사’니, 또는 ‘사주’니 ‘명리’니, ‘풍수’니 ‘점’이니 하는 말들이 나돌면서, 대학의 철학과에서도 그런 내용을 배우는가? 궁금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대답부터 말씀드리면, 전혀 배우지 않습니다. 이야기가 나왔으니, 그러면 철학과에서는 무엇을 배우는가요? 이 점을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과정에서 ‘철학’ 연구자로서, 불교를 연구하는 입장 내지는 방법을 들춰보고, 역시 철학 교수로서 󰡔범망경󰡕에 주목하는 이유가 전해지길 기대합니다.


2.
철학과에서는 크게 세 영역을 배우고 연구합니다. 첫째는 <형이상학>으로, 자연학이나 개별 분과 학문의 문제를 넘어서서 또는 그것을 대상으로 삼아, 그 배후나 그 근저의 존재 일반의 성질이나 구조를 밝히는 연구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방법은 종합적이며 유기적 조망과 통합 체계입니다. 둘째는 <인식론>으로, 지식의 생성과 기원 나아가서는 형식과 방법 등을 연구합니다. 셋째로 <윤리학>인데, 도덕의 기원이나 도덕 법칙을 세우는 근거 등을 연구합니다. 이런 세 분야를 연구하기 위한 방법론으로 <논리학>은 필수로 배우고 연구합니다.
그러면 철학과를 졸업하면 어떤 직업에 종사하는가? 의학과를 졸업하면 의사 직업으로, 법학과를 졸업하면 변호사 직업으로, 그렇게 대학에서 배우는 전공은 졸업 후 전문 직업과 연결됩니다. 그러면 철학과 졸업하면 ‘철학관’ 취직하나요? 분명한 건, 대학에서 철학과 4학년 졸업해서 잡을 수 있는 전문 직업은 없습니다. 전통적인 인문학 분야(철학, 사학, 문학)의 학과들이 그렇듯이 좀 더 배워야 합니다. 대학원에 진학하여 석사 2년, 박사 3년을 마치고 박사학위를 받아야 대학의 교수가 될 자격을 갖추게 됩니다.
참고로, 2024년 현재 철학과가 설치된 4년제 대학교는 약 36(서울 15곳)곳입니다. 2025년 신입생을 모집하는 곳은 31개 학교이니, 약 5개 대학에서는 학과를 없애가는 과정으로 동국대도 그렇습니다. 점점 줄어드는 추세입니다. 현재 서울 지역에 있는 철학과 중에서 불교철학 방면 전임을 둔 곳은 다섯 곳도 안 되고, 다른 지역은 없는 곳이 태반입니다. 현실을 보면, 2025학년도 수능 지원자는 52만 2,670명이고, 일반 4년제 대학 모집 정원은 34만 934명이고, 전문대를 포함하면 50만 4,407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통계청에 따르면 2023년 출생아 수는 23만 28명이라고 합니다. 인구 감소에 따른 대학의 구조 변화는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교’라는 보편적 인류 문화는 그 가치가 무한합니다. 이 분야를 연구하는 전문가 양성은 중요합니다. 이런 점에서 ‘불교’를 종합적으로 연구하는 동국대학교의 수석 단과대학인 ‘불교대학’의 역할은 매우 중요합니다. 신도라면, 출가 불자인 스님들은 물론 재가 불자들도 이 점에 힘을 보태야 할 것입니다.


3.
주변 이야기가 길어졌는데, 제가 어떠한 입장에서 󰡔범망경󰡕을 읽고 해설하는 지를 설명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당연, 저는 철학 연구자로서 접근하고 있습니다. 󰡔범망경󰡕에는 인간들의 윤리적 행위와 관련하여 다양한 주장을 쏟아 내고 있습니다. 작년에, 독자님들께 설명드린 내용만 보아도, 󰡔범망경󰡕에서는 대승의 보살 운동을 하는 불자가 지켜야 할 도덕률 열 가지가 있습니다. 10가지란, ①자심慈心, ②비심悲心, ③희심喜心, ④사심捨心, ⑤시심施心, ⑥호어심好語心, ⑦익심益心, ⑧동심同心, ⑨정심定心, ⑩혜심慧心입니다. 이 열 가지 마음가짐을 ‘기르고 키워가야[十長養心]’ 한다고 합니다. 불자라면,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당위當爲를 말합니다. 그러면 그런 당위성은 어디에 근거할까요? 왜 그런 도덕 덕목을 지켜야만 합니까?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범망경󰡕에 등장하는 이런 도덕률은 물론 그런 도덕률을 주장하는 근거를 추궁합니다. 윤리적으로 그런 도덕적 행위나 주장의 당위성이 어디에 근거하는 지를 따지는 것입니다. 그저 무엇 무엇을 해야 한다고 주장만 할 경우, 그런 주장을 내가 따라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저는 ‘합리성’이라 부르겠습니다. 남에게 그렇게 하자고 이야기할 경우, 거기에는 합리적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누군가가 사무실이나 건물의 공간을 임대하여 사용할 경우, 주인과 사용자가 계약을 맺습니다. ‘약속’이기 때문에 상호 간에 권리와 의무가 발생합니다. 󰡔범망경󰡕에 등장하는 각종 윤리적 행위의 정당성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스스로가 󰡔범망경󰡕에 나오는 내용을 지키겠노라는 ‘약속’이 있어야, 그런 뒤에 그것을 지켜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모든 ‘약속’에는 그 내용이 있게 마련입니다. 보험 가입을 사례로 들면, 소위 ‘약관’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범망경󰡕 전체는 말하자면 그런 ‘약관’에 해당합니다. ‘약관’을 잘 읽고 보험에 가입하듯이, 󰡔범망경󰡕을 잘 읽고 이해한 뒤에 <범망경 보살계> 수계를 받아야 합니다. 수계 행위는 일종의 ‘약속’입니다. 여러분들도 아실 겁니다. 수계 할 때 세 분의 스님 앞에서 수계가 진행되는 것을 말입니다. 세 스님 가운데 한 분이 ‘교수사敎授師’인데, 글자 그대로 ‘가르쳐 주는 스승’입니다. 󰡔범망경󰡕의 내용을 가르쳐 주는 분입니다. 이 스님의 역할은 보험으로 말하자면, 약관을 설명해 주는 일이지요. 설명을 들은 뒤에, 그 내용에 동의하면 계를 받는 것입니다. 수계 후에는 지켜야 합니다. 잘 지키는가를 확인하는 절차는 ‘포살’입니다. 그러니 ‘수계’와 ‘포살’ 한 세트입니다.


4.
위에서 필자는 ‘약속’에 의한 행위의 당위성을 이야기했습니다. 그것은 나와 󰡔범망경󰡕과의 관계입니다. <내>가 <󰡔범망경󰡕에서 제시하는 약관 내용>을 체결할지 말지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나>와의 관계를 논하기에 앞서, <󰡔범망경󰡕에서 제시하는 약관 내용> 그 자체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소위 ‘약관’으로서의 정합적인 이유가 성립되느냐는 문제입니다. 󰡔범망경󰡕에 등장하는 다양한 윤리적 행위와 도덕률은 어떻게 그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소위 소승계小乘戒라고 말하는 초기 불교의 󰡔사분율󰡕 등은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에 제정된 것이니, 승단에 출가한 자라면 그것을 지킬 의무가 있습니다. 특히 출가해서 수행하는 공동체 생활에 관련된 <율律>은 일종의 ‘약속’입니다. 그런데 󰡔범망경󰡕은 출가수행 공동체 생활 관련 <율律>은 아닙니다. 초기 불교처럼 그런 교단 구성원들의 합의로 만든 ‘약속’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약속’에 의해 당위성이 마련된 게 아니라면, 󰡔범망경󰡕은 그 정당성을 어디에서 확보할까요? 그 대답은 이렇습니다. 󰡔범망경󰡕은 대승 불교의 <형이상학>에서 행위의 정당성을 확보합니다. 대승 불교 중에서도 좁히면 󰡔화엄경󰡕의 <형이상학>에 기초합니다. 󰡔화엄경󰡕의 <형이상학> 근본에는 ‘일심一心’의 사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역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국회에서 법을 제정할 경우, 새로 제정하는 법이 <헌법>에 부합하는지를 검토하고, 나아가 기존의 각종 법과 상호 관련성 및 모순성을 검토합니다. 한 ‘국가’ 내에서의 모든 법령은 <헌법>이 기준입니다. 범위를 넓혀 ‘특정 국가’에 한정하지 않고, 소위 ‘보편 국가’로 범위를 넓힌다면, 개별 법률은 물론 <헌법>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헌법>의 법으로서의 근거는 무엇일까요?
󰡔범망경󰡕의 기준은 대승 경전입니다. 대승 경전 중에서도 󰡔화엄경󰡕인데, 이 경의 내용은 대소승大小乘을 모두 아우르는 일승一乘인 동시에 불교 역사에 등장하는 모든 가르침[敎]을 모두 포함하는 원교圓敎라고 합니다. ‘일승 원교 대방광불화엄경’이라는 호칭을 많이 들어보셨을 터이니 따로 설명을 보태지는 않겠습니다. 󰡔화엄경󰡕은 ‘특정 불교’의 한정성을 넘어서는 ‘보편 불교’인 ‘일심一心’의 가르침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일심一心’이란 인간이면 모든 이에게 본래 갖추어진 도덕 감정(Moral sense)입니다. 도덕률을 만들 수 있는 인간의 보편 감정입니다. 또 모든 판단의 근거입니다. 판단의 근거와 이 감정이 있어야, 이 근거와 감정에 토대하여 각종 도덕률을 그 시대에 맞게 그 문화 전통에 맞게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범망경󰡕에서는 그것을 ‘심지心地’라는 용어로 표현합니다. 마음이라는 땅 위에서 생물이 자라고 그 활동이 펼쳐지기 때문입니다. 필자는 이런 철학, 철학 중에서도 위에서 말한 <윤리학>의 연구 방법으로 󰡔범망경󰡕을 해설하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