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운
텃밭농부
동지가 지났다. 겨울은 더 깊은 곳으로 미끄러지듯 흘러들어간다. 깊은 심연의 시간이다. 멈춰 있지 않다. 짙은 어둠 속에서 빛의 입자를 향해 꿈틀대고 있으니, 암중모색이다.
내 겨울의 밭은 고요하다. 가장자리 응달엔 잔설이 하얗다. 바람의 놀이터다. 살짝 언 겉흙 위로는 바람이 흐르고 있고, 햇볕이 바람에 너울거리다가 흙 위에 살짝 내려앉는다. 내 밭의 마늘은 덮어둔 검불 속에서 순을 내밀었다. 이 순간 저 초록의 색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 새순은 뿌리에서 비롯되었으며, 순은 뿌리를 기른다. 저렇게 순과 뿌리는 어우러지면서 겨울을 지내고 있다. 사랑으로 맺어진 저 둘은 시린 겨울을 서로를 북돋우며 지내고 있다. 온기가 느껴진다. 박노해 시인은 겨울의 따뜻함을 노래했다.
사랑하는 사람아
우리에게 겨울이 없다면
무엇으로 따뜻한 포옹이 가능하겠느냐
무엇으로 우리 서로 깊어질 수 있겠느냐
이 추운 떨림이 없다면
꽃은 무엇으로 피어나고
무슨 기운으로 향기를 낼 수 있겠느냐
눈보라 치는 겨울밤이 없다면
추워 떠는 자의 시린 마음을 무엇으로 헤아리고
내 온몸을 녹이는
몇 평의 따뜻한 방을 고마워하고
자기를 벗어버린 희망 하나 커 나올 수 있겠느냐
아아 겨울이 온다
추운 겨울이 온다
떨리는 겨울, 사랑이 온다. 
-겨울 사랑-
움켜쥔 손바닥 펴기
잎을 떨군 나뭇가지는 스산하다. 이리저리 뻗은 나뭇가지가 어수선한데, 날이라도 흐려지면 살짝 부는 바람에도 몸이 오싹해진다. 목덜미를 스치는 바람이 얄밉다. 지난 여름, 등짝에 내려앉는 햇볕이 무거워 끙끙댔는데, 지금은 오히려 그 뜨거움이 그리워질 정도다.
나무들은 잎눈으로 겨울을 지난다. 가지에 돋은 잎눈은 새끼손톱의 반의 반도 안 되는 크기다. 여러 겹의 비늘을 만들어 꽁꽁 싸매고 있다. 죽은 듯 고요하지만, 뜨거움을 품고 있다. 겨울은 에너지를 응축하는 시기이다. 차면 넘친다고 했다. 겨울이 깊어지는 것은 저 너머에 봄이 오고 있다는 소식이다. 분명 오고 있다.
봄은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온다. 사람의 작용이 없어도 온다. 계절의 오고감은 자연의 일이다. 계절로서의 봄은 기다리면 오기 마련이지만, 사람 사는 세상을 더 따뜻하게 하는 일은 저절로 이뤄지지 않는다. 사람이 행해야 할 일이다.
이념의 좌우를 넘어서, 인종과 성, 나이와 지역의 차이를 넘어 사람을 포함한 생명붙이의 삶을 어렵게 하는 것 중 가장 큰 위협 요소는 급격한 기후의 변화다. 기후위기, 기후재난의 시대이다. 지난 초겨울에 스페인은 물난리를 겪었다.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한 폭우가 발렌시아 지역에 쏟아졌다. 이백 명 넘는 사람들이 순식간에 목숨을 잃었다. 사람 외의 생명은 또 얼마나 휩쓸려갔을까. 여느 때라면 한적할 골목이었던 곳에는 자동차들이 겹겹이 처박혔다. 끔찍한 광경이다. 지금까지의 재난 예방 시스템으로는 감당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문제는 이런 일이 지구 곳곳에서 더욱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재난 예방 시스템을 강화하면 인명과 재산 피해를 줄일 수는 있겠지만, 재난의 발생을 애초에 없애지는 못한다. 온실가스로 인한 지구 대기권의 기온상승, 이로 인한 수증기의 증가가 폭우의 원인이다. 온실가스를 줄이는 게 답이다.
많은 나라의 정부는 지속가능한 발전과 환경정의를 환경정책의 목표로 삼고 있다. 생태주의의 입장에서는 미흡하지만, 이 목표마저도 구호에 머물고 있다. 목표를 이루기 위한 사업의 실행은 더디기만 하다. 탄소에 기반한 경제체제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지금 움켜쥐고 있는 것을 놓아야 하는데, 손바닥을 펴지 못하고 있다. 불교에서는 이와 같은 상황을 안수정등(岸樹井藤의 비유를 들어 사람의 어리석음을 그리고 있다.
“한 나그네가 아득히 펼쳐진 넓은 벌판을 가고 있는데, 갑자기 사방에서 사나운 불길이 일어났습니다. 불길에 둘러싸여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해하고 있는데, 갑자기 코끼리 한 마리가 나타나서 나그네를 향해 사납게 달려드는 것입니다. 코끼리를 피하려고 죽을힘을 다해 도망가다가, 언덕 아래에 이르러 우물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는데, 마침 등나무 넝쿨이 그 우물 안으로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급한 김에 코끼리를 피해 등나무 넝쿨을 붙잡고 우물 속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우물 바닥에는 커다란 구렁이 세 마리가 입을 벌리고 내려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등나무 넝쿨을 붙잡고 위를 올려다보니, 위에는 독사 네 마리가 혀를 날름거리며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내려갈 수도 없고, 다시 올라갈 수도 없는 처지가 되어버렸습니다. …  이제는 죽을 수밖에 없구나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어디선가 달콤한 액체 한 방울이 얼굴에 떨어졌습니다. 혀로 핥아 먹어보니 꿀이었습니다. 나무 위에 지어놓은 벌집에서 꿀이 한 방울씩 흘러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허기도 지고 몹시 갈증도 났던 이 나그네는 방금까지 두려워했던 상황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이제는 떨어지는 꿀 한 방울을 받아먹으려고 온 정신이 팔려있는 것입니다.”
이 설화는 인간이 탐진치(貪瞋癡), 즉 탐욕과 성냄 그리고 어리석음이라는 3독(毒)에 빠져, 무상의 깨달음을 이루지 못한 채,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도 오욕락의 꿀 한 방울에 목숨을 매는 현실을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현, 네이버 블로그 ‘안수정등의 이야기’] 151
새로운 상상 ‘녹색 헌법’
새로운 상상이 필요하다. ‘녹색 헌법’을 떠올려본다. 이 용어는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녹색전환연구소라는 곳에서 6년 전인 2018년에 펴낸 것이니 아주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내용은 우리의 생각을 넓일 수 있게 해주니 새롭다.
헌법 개정은 오래된 의제이다. 10년 안쪽에 내놓은 것만 보아도 여럿이다. 2014년 국회의장 직속 헌법 개정 자문위원회에서 내놓은 헌법 개정안, 2015년에 대한민국 시도지사협의회에서 헌법학회에 의뢰해 내놓은 개정안, 2016년 지방분권개헌국민행동에서 내놓은 개정안, 2017년 국회 개헌특위 자문위에서 내놓은 개정안이 있다. 그 외 여러 시민단체에서 개정안을 내놓았다. 모두 새로운 사회 흐름과 미래가치를 반영하는 내용을 담았다.
위에서 언급한 ‘녹색 헌법’에서는 ‘생명’과 ‘민주주의’를 주요 가치로 여겼다. 머리말(전문)은 “대한민국은 생명을 소중히 여깁니다”라고 시작하며, “사람뿐 아니라 자연에 깃든 모든 생명을 가꿉니다. 서로 돕고 살리는 세상을 되찾기 위하여 1919년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였으며 생명의 존엄과 민주주의를 지키는 사회를 일구어왔습니다. 헌법은 모든 생명이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기 위한 우리의 약속입니다. … ”라고 이어진다. 헌법 제1조에서는 “모든 생명은 존엄한 가치가 있다”라고 선언한다. 꿈같은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수많은 나라에서 생명의 가치를 헌법에 반영하고 있다. 우리의 상상력이 무디었을 뿐이다. 긴 겨울 암중모색의 시기에 ‘녹색 헌법’을 생각거리로 삼을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