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0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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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을 버리고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자

정우頂宇 스님
본지 발행인 | 구룡사 회주



염념보리심念念菩提心이면 처처處處가 안락국安樂國이요,
염념삼독심念念三毒心이면 처처處處가 삼악도三惡途이니라.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점점 더 자본주의적 현시대에 대해 무책임하게 외면하거나, 혹은 피해의식과 피해망상에서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자기변명에서 벗어나는 일입니다. 더 나아가 주변에 그런 이들이 있다면, 최소한 윤활유와 같은 역할이라도 하며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일들이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보조국사 지눌 스님은 “땅에서 넘어진 자들이여, 그 땅을 딛고 다시 일어나라”고 했습니다. 땅을 딛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과 용기, 지혜의 생명력은 사실 우리 모두에게 이미 갖추어져 있습니다. 왜 우리는 이토록 무기력해져 가는가, 나이가 들어갈수록 곰곰이 들여다보면, 그것은 서로 믿지 못하는 불신과 방일함, 그런 게으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수행 정진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기도하고, 참선하고, 간경하고, 염불하는 이유는 고통과 괴로움을 없애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 고통과 괴로움을 통해 오히려 마음을 성숙시키기 위함입니다. 비 온 뒤에 땅이 굳듯이, 세상을 살다 보면 아쉽고 미진하고 부족한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 한 생각만 바꾸면 고통과 괴로움이 사라지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괴롭히지 못 하도록 하게 함입니다. 고통과 괴로움은 결국 삼독심三毒心에서 비롯됩니다.
번뇌와 망상은 재색식명수財色食命壽에 대한 집착에서 근심과 걱정이 생겨나고, 그것이 우리 일상의 삶을 방해합니다. 우리는 오히려 그러한 고통을 통해 마음을 성숙시키고, 깨달음으로 이끌어가는 기도와 간경, 수행을 생활불교로 실천해야 하지 않겠는가 싶습니다. 수행 정진을 하는 삶이야말로 우리가 계속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 법문 중에 이런 가르침이 있습니다.
두 아들이 있는데, 한 아들은 우산 장수이고 한 아들은 짚신 장수였습니다.
어머니는 비가 오지 않으면 우산 장수 아들이 걱정되고, 비가 오면 짚신 장수 아들이 걱정되어 근심이 끊이지 않았고, 그로 인해 눈이 붓고 실명 위기까지 갔다고 합니다. 그 소식을 전해 들은 부처님께서 그 여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선여인이여, 비가 오면 우산이 잘 팔릴 것이라 생각하고, 날이 맑으면 짚신 이 잘 팔릴 것이라 생각하면 어찌 지금처럼 근심과 걱정 속에서 살겠는가.”
그 말씀을 듣고 생각 하나를 바꾸자, 그 여인은 늘 화창한 날처럼 미소를 잃지 않고 평생을 잘 살았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인 지혜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보시로 나타나 마음의 인색함을 없애고, 우리를 부처님의 가르침 속으로 이끌어 줍니다.


『화엄경華嚴經』에 “믿음은 도의 근본이요, 공덕의 어머니”라 하셨습니다.
공덕이란 복福과 덕德과 지혜智慧가 합해진 것입니다. 우리는 복과 덕은 열심히 짓고 있으나, 공덕을 쌓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기 때문이라 합니다. 그래서 내려놓는 공부를 하라는 것이지, 집을 팔아 나누어 주고 전세나 월세로 살라는 뜻은 아닙니다. 믿음이란 가야 할 길을 가는 본바탕이며, 도리를 잊지 않게 하는 힘입니다. 그 믿음이 복·덕·지혜인 공덕장을 증장시키고, 능히 부처님의 경계, 여래지如來地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 『화엄경華嚴經』의 가르침입니다.
보리심菩提心을 일으킨 불자들이 반드시 실천해야 할 다섯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좋은 벗을 가까이할 것.
둘째, 성내는 마음을 끊고 다스릴 것.
셋째, 스승의 가르침을 따를 것.
넷째, 자비와 연민의 마음을 일으킬 것.
다섯째, 부지런히 정진할 것.
진지하게 살아가는 삶, 그것을 우리는 정진이라 합니다.
이를 위해 세상 사람들의 이목을 나의 이목으로 삼으라고 합니다.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에도 이런 가르침이 있습니다.
“맑은 눈으로 비추어 보지 못할 것이 없고, 밝은 귀로 듣지 못할 것이 없다. 어찌 자신의 이목만을 고집하여 미혹에 빠지려 하는가. 함부로 다른 사람의 허물을 말하지 말라. 언젠가는 반드시 나에게로 돌아와 나를 해칠 것이다.
오늘은 남의 허물을 말했으나, 내일은 그가 나의 허물을 말할 것이다.”
요즘 종단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여러 생각들이 일어나는 그것들을 마음속 깊이 가라앉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마음이 번거로우면 세상도 번거롭고, 마음이 맑고 밝으면 세상 또한 맑고 밝아집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변화함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집착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치우치고 얽매이고 빠지는 것을 집착執着이라 합니다. 소유와 지배의 욕구, 그것을 불교에서는 업業, 곧 까르마(Karma)라고 합니다.
우리가 집착하는 것들은 본래 집착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이 세상에 영원히 상주불변하는 것은 없습니다. 집착은 결국 불길 같은 고통만을 낳을 뿐입니다.


중생은 두 가지 삶을 산다고 합니다. 하나는 지혜로운 삶이고, 다른 하나는 어리석은 삶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조건 없이 보살행菩薩行을 실천하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욕심이 많고, 욕심 많은 사람은 화를 잘 내며, 화를 잘 내는 사람은 어리석습니다. 탐·진·치 삼독심은 이렇게 맞물려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을 살아 보면 ‘아니다’ 싶을 때 돌아설 줄도 알아야 합니다.
수행의 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지혜로운 견해, 계·정·혜 삼학을 닦고 보리심을 증장시키는 길에서 연민憐愍과 자비慈悲의 마음으로 판단한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삶의 방향을 바로잡아 갈 수 있습니다.
경전에 나오는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비유도 그렇습니다. 각자 만지는 부분만 말할 뿐인데, 눈 뜬 이는 모두가 무엇을 말하는지 압니다. 단견에 빠진 이들의 말도 지혜로운 이는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습니다. 사회의 많은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는 인간 스스로가 만든 것입니다. 상호 신뢰를 쌓는 일에서부터 해결은 시작됩니다. 기억하고 분노하기보다 잊고 용서하는 것, 그것이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 천년만년 사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서로 맞물려서 조화롭게 살아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분노는 판단력을 흐리게 합니다.
그래서 달라이라마 스님도 “가슴으로 결정하면 쉽게 풀릴 일을 머리로 계산하다가 낭패를 보게 된다.”고 했습니다. 이기심利己心을 제어하려면 미래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위하고 살피는 이유는 그 사람이 아름답기 때문이 아니라, 친절하기 때문입니다. 친절은 곧 서비스입니다. 가족에게, 이웃에게, 인연 있는 모든 이에게 친절해야 합니다. 돌아다보면, 베풀었던 순간들이 인생에서 가장 깊이 있게 남는 기억이 아니겠습니까.
종교란 본래 원융무애圓融無礙한 살림살이를 하는 것이며, 세상에 따뜻한 서비스와 포근함을 전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의 많은 문제점 또한 상호 신뢰를 쌓는 데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아일랜드 민요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행복해지기 위해 친절할 시간을 내라. 행복으로 가는 길이다.
꿈을 꾸기 위해 시간을 내라. 뜻을 품는 것이다.
사랑을 위해 시간을 내라. 구원을 받는 자의 특권이다.
주위를 살피는데 시간을 내라. 이기적으로 살기에는 짧은 하루다.
웃기 위해 시간을 내라. 영혼의 음악이다.”
시간은 시계가 없어도 가고 있습니다. 욕심을 내려놓으면 마음의 고통도 사라집니다. 모든 집착에서 벗어난 이는 공포를 초월합니다.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볼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자유로워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