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0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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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인연법을 잘 알고 실천하는 대승의 수행

신규탁(연세대 명예교수, 철학 전공)


 


1.
󰡔범망경󰡕에서는 대승 수행자가 지켜야 할 가치 덕목을 크게 네 단계 10항목으로 나누어, <10 발취심>, <10 장양심>, <10 금강심>, <10 지>를 차례로 나열하고 있다. 필자는 <월간 붓다> 12월호에서 <10 금강심>의 셋째에 해당하는 회향하는 마음인 <회향심>을 소개했다. 2026년 신년 정월호에는 넷째의 <공한 줄 아는 마음>과 다섯째의 <곧은 마음>과 여섯째의 <물러나지 않는 마음>을 소개하려고 한다. 한문으로 하면 달조심達照心과 직심直心, 불퇴심不退心이다.
먼저 달조심達照心을 소개하기로 한다. 한자의 말 그대로, 살피는 마음인데, 그것도 꿰뚫어 살피는 마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그렇게 꿰뚫어 살핀다는 것인가? 대답은 일체법이 공空한 줄을 꿰뚫어 살핀다는 것이다. 또 통通이라는 글자에는 통달通達의 뜻도 있다. ‘살핌(照)을 통달한 마음’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고 ‘통달하게 살핀다’로 번역할 수 있다. 󰡔범망경󰡕의 해당 본문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달조심達照心이란, 일체 모든 법의 참다운 성품(實性)을 잘 알고(忍) 순응하는 것이다. 성품과 성품마다 결박도 없고 해탈도 없고 걸림도 없어, 법에 통달하고 뜻에 통달하고 말에 통달하고 교화에 통달한다. 3세의 인과와 중생의 근기와 수행이 진여에 딱 들어맞아, 실다운 작용도 없고 그 없다는 작용마저도 없으며, 명칭이나 작용도 없어 작용 작용마다 일체가 모두 공하다. 공하고 공하여 공에 통달하니, 이를 두고 일체 법이 공한 줄을 통달했다고 한다.


위의 본문에 나오는 ‘잘 알고(忍)’라는 말 속에는, ‘도리에 안주하여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 것’이라는 뜻이 담겨있다. 그러면 법의 참다운 성품은 어떠한가? 모든 것은 어느 것이나 인연이 모여 만들어진 것으로, 불교에서는 이것을 연기緣起이니, 무아無我이니, 공空이니, 무상無常이니, 등등 다양한 말로 표현하고 있다. 같은 뜻을 문맥에 따라 달리 사용하고 있다. 참다운 성품(實性)이란 그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우리는 󰡔범망경󰡕 본문에 등장하는 이런 표현을 통해, 󰡔범망경󰡕은 반야부의 경전이 유행하던 시기에 출현한 경전임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이렇게 일체의 공을 여러 각도에서 설명하면서도 다음에 나오는 ‘직심(直心 곧은 마음)’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걸 보면, 오염이 없는 청정한 마음을 연상하게 한다. 바로 이런 점이 󰡔범망경󰡕이야말로 후기 반야 사상을 담고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자, 그러면 이하에서는 직심(直心 곧은 마음)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2.
직심(直心 곧은 마음)을 설명하는 󰡔범망경󰡕의 본문 속에서는 ‘참된 성품(眞性)’이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그러면서 ‘참된 성품(眞性)’은 공하다는 점을 분명하게 하고 있다. 참되기는 하지만 그 참됨은 공하다는 것이다. 이런 뜻을 󰡔범망경󰡕의 본문에는 ‘공진성空眞性’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공한 ‘참된 성품’이라는 뜻이다. 자, 그러면 이 대목을 󰡔범망경󰡕의 본문을 아래에 인용하여 함께 읽어보기로 한다.


곧은 마음(直心)’이란, 곧게 살피는 것이다. 대상과 관계를 맺어 무명을 일으키는 나 자신을 똑똑하게 관조하여, ‘남(生)이 없는 지혜’에 드는 것을 말한다. 무명도 공하고 나도 공한데, 그런 공함 역시 또 공하다. 공한 가운데 또 공한 이치의 마음은 있다고도 할 수 있고 없다고도 할 수 있는데, 분명한 것은 ‘도의 종자(道種)’는 파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떤 번뇌도 없는 중도인 ‘이 하나의 관觀’으로 일체 시방의 중생을 교화하며, 모든 중생을 변하여 모두가 궁극의 지혜에 들게 한다. 이런 지혜는 공하면서도 참된 성품이니, 이런 참된 성품을 깨쳤기 때문에 3계에 윤회하는 결박을 받지 않는다.


우리의 마음은 항상 밖으로 향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이 마음은 지난 경험의 축적인 기억을 되살려내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범망경󰡕의 본문은 주문하고 있다. 그렇게 밖으로 향하는, 내지는 자신의 내면적 경험으로 향하는 자신의 마음을 똑똑하게 관조하라고. 마음의 재료 거리가 되는 대상들은 모두 공하고 무상하다고 말이다. 그리하여 ‘남(生)이 없는 지혜’에 들라고 말이다. 이 ‘남(生)이 없는 지혜’야말로 바로, ‘도의 종자(道種)’라고 말하고 있다. ‘도의 종자(道種)’란 도를 이룰 수 있는 씨앗이라는 뜻이다. 이런 ‘도의 종자(道種)’는 그 무엇으로도 파괴할 수가 없다고 한다.
위의 인용문에서 “‘이 하나의 관觀’으로 일체 시방의 중생을 교화한다”라고 했는데, 여기서 말하는 ‘이 하나의 관觀’은 일체가 남(生)이 없는 줄을 관찰하는 것으로, 이런 관찰로 말미암아 3계에 윤회하는 속박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신이 윤회에 들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남(生)이 없는 줄을 관찰하는 지혜로 말미암아 시방의 중생을 교화하여, 그들도 역시 궁극의 지혜 즉, 남(生)이 없는 줄을 관찰하는 지혜의 안목을 갖추게 한다는 것이다.


3.
이상에서 직심(直心 곧은 마음)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하에는 ‘물러나지 않는 마음(不退心)’을 소개하기로 한다. 말 그대로 어떤 경우에도 바른 지혜에서 후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른 지혜란, 나와 나를 이루고 있는 요소는 물론, 나의 인식 대상이 되는 외부의 일체 모든 존재란 영원한 게 없다고 아는 지혜이다. 즉, 공하고 무상하고 무아인 줄을 아는 지혜이다. 이런 지혜를 갖추어, 설사 3계의 윤회에 들더라도 이런 지혜를 유지해 간다는 것이다. 3계의 번뇌 속에 살더라도, 이런 지혜의 마음에서 후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범망경󰡕의 본문을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물러서지 않는 마음이란, 일체의 범부의 지위에 들지 않고, 잡되게 길러온 여러 가지 소견을 일으키지 않으며, 또한 인습적으로 알아 온 ‘나’란 존재가 있다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다. 3계에 윤회하는 업의 길에 들어가서도 역시 공을 실천하여 물러서지 않는다. 제일의 중도로 해탈한 상태로 행하므로 수행에 물러남이 없고, 진실이란 둘이 아니기 때문에 도를 이루겠다는 생각에서 물러남이 없다. 공은 ‘관찰하는 지혜(觀智)’를 낳아 여여하게 상속하고, 각종 가르침마다 마음을 둘이 아님에 들게 한다. 항상 실체 없이 인연 따라 생긴 것임을 알아, 바른 마음을 낸다.
 
본문 인용에 나오는 ‘잡되게 길러온 여러 가지 소견’이란, 번뇌의 일종이다. 번뇌를 크게 나누면 탐, 진, 치, 만, 의, 견. 이렇게 여섯 덩어리로 나눌 수 있다. 이를 근본 번뇌라 하는데, 그중 견(見 잘못된 소견)은 다시 크게 다섯 가지 소견으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신견(身見, 有身見)인데, 5온을 자아로 보는 실체론적 생각이다. 둘째는 변견(邊見, 邊執見)인데, 이는 불타가 답하지 않았던 14무기의 세간의 상견常見·단견斷見·유변견·무변견·육체와 영혼의 동견·이견, 여래의 사후 존재의 유견·무견 등의 극단적인 잘못된 생각을 갖는 실체론적인 생각이다. 셋째는 사견邪見으로, 이는 일체의 사악한 견해를 말한다. 10사의 사견(十事邪見)은 보시·헌공·제사·선악업의 과보·저승·래세·부·모·화생 유정·수행증과자 등을 부정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이는 불교의 3보를 부정하는 사견을 말한다. 넷째는 견취(見取, 見取見)인데, 이는 자기중심적인 악견으로 자파의 설만이 진리이고, 타파의 설은 모두 틀렸다고 보는 배타적인 생각을 말한다. 다섯째는 계금취(戒禁取, 戒取, 戒禁取見)인데, 이는 외도가 설하는 해탈·생천의 방법을 말한다. 이런 모두가 ‘잘못된 소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