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0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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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의 철학자

홍성범
숲해설가


​세상은 온통 ‘더 빨리’를 외친다. 더 빠르게 연결되고, 더 빠르게 성취하며, 더 빠르게 소모되는 것이 효율이라는 이름으로 미화된다. 하지만 이러한 질주의 끝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대개 공허함이다. 정점을 향해 치닫는 속도는 우리에게 주변을 돌아볼 여유를 앗아갔고, 무엇보다 ‘나 자신’으로 존재하는 법을 잊게 했다.
​이 소란스러운 문명의 소음에서 잠시 벗어나 숲의 심장부로 걸어 들어가 보자. 그곳에는 인간의 시간관념으로는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침묵의 거인들이 서 있다. 수백 년, 혹은 수천 년을 한자리에 서서 하늘을 받치고 있는 장수목長壽木들이다. 그들에게 다가가 물어본다. “어떻게 그토록 오랜 시간, 흔들림 없이 존엄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까?” 나무는 대답 대신, 제 몸에 새겨진 촘촘한 나이테로 답한다. 그들의 장수 비결은 역설적이게도 ‘느림’과 ‘비경쟁’이었다.
​식물학적으로 볼 때, 빨리 자라는 나무인 ‘속성수’는 대개 수명이 짧다. 포플러나 아까시나무처럼 한 세대 안에 거대한 몸집을 불리는 나무들은 세포의 크기가 크고 조직 사이의 밀도가 낮다. 그들은 남보다 먼저 햇빛을 차지하기 위해 수직 성장에 집중한다. 그러나 성급한 성장은 기초가 부실한 법이다. 작은 병충해에도 쉽게 무너지고, 강풍이 불면 맥없이 꺾여버린다.
​철학적으로 볼 때, 이는 ‘존재의 밀도’에 관한 문제다. 마틴 하이데거는 존재를 ‘시간’ 속에서 파악했다. 속성수는 시간을 ‘통과’할 뿐, 시간을 ‘축적’하진 못한다. 반면 장수하는 나무들은 시간을 자기 몸 안으로 꾹꾹 눌러 담는다. 그들에게 시간은 단순히 흘러가는 물리적 양이 아니라 질적인 무게로 치환된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나무인 미국 화이트마운틴의 ‘브리슬콘 소나무’를 보자. 무려 5,000년 가까이 살고 있는 이 나무의 서식지는 비옥한 토양도, 따뜻한 햇볕이 내리쬐는 평원도 아니다. 해발 3,000미터가 넘는 척박한 고산 지대, 산소조차 부족하고 칼바람이 몰아치는 돌밭이다. 이곳에서 브리슬콘 소나무는 1년에 고작 0.1밀리미터 정도만의 두께를 늘린다. 너무 느려 성장이 멈춘 것처럼 보일 정도다. 하지만 이 지독한 느림 덕분에 나무의 밀도는 바위처럼 단단해진다. 워낙 조직이 치밀해 해충이 파고들 틈조차 없고, 곰팡이조차 그 단단함에 혀를 내두르고 돌아선다.
​브리슬콘 소나무의 철학은 ‘결핍의 수용’이다. 풍요로운 곳에서 남과 경쟁하며 속도를 내는 대신, 가장 척박한 곳에서 오직 자신만의 속도로 내면의 단단함을 완성했다. 이것은 스피노자가 말한 ‘코나투스(Conatus)’, 즉 자기 존재를 보존하려는 본능적 의지의 극치다. 남보다 앞서기 위한 욕망이 아니라, 자기 본질을 지키기 위한 인내의 시간이다.
​숲의 현자들은 결코 경쟁하지 않는다.
숲을 가만히 관찰하면 ‘수관 기피(Crown Shyness)’라는 경이로운 현상을 볼 수 있다. 나무들이 하늘에서 서로의 가지가 닿지 않도록 일정 거리를 두고 자라는 현상이다. 그들은 옆 나무를 이기기 위해 가지를 뻗어 햇빛을 가로막지 않는다. 대신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며, 비어 있는 공간을 향해 자신의 가지를 뻗는다. 지혜로운 균형과 절제의 공존 방식이다.
​인간 사회의 불행은 대개 ‘비교’에서 온다. 옆 사람이 나보다 앞서가면 나의 속도는 곧 무능함이 된다. 그러나 나무의 시간에서 느림은 무능이 아니라 ‘신중함’이다. 은행나무는 수십 년이 지나야 비로소 열매를 맺는다. 주목은 천 년을 살기 위해 백 년 동안은 눈에 띄지도 않을 만큼 작게 머문다. 그들은 옆 나무가 꽃을 피운다고 해서 결코 조급해하지 않는다. 내 안의 생명력이 차올라 밖으로 터져 나올 그 ‘결정적 순간(Kairos)’을 묵묵히 기다릴 뿐이다.
​나무의 나이테는 겨울의 산물이다.
따뜻한 봄과 여름에 자란 부분은 색이 연하고 무르지만, 혹독한 추위를 견디며 자란 부분은 색이 짙고 단단하다. 장수하는 나무일수록 이 짙은 선들이 촘촘하게 박혀 있다. 느림이란 결국 고통을 온전히 통과해내는 시간이다.
​우리의 삶에서도 ‘느린 시간’은 대개 시련의 시기와 겹친다. 일이 풀리지 않고, 성취는 멀어 보이며, 세상으로부터 잊힌 것 같은 시기다. 하지만 철학자 니체가 말했듯, 나를 죽이지 못한 고통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 그 정체된 것 같은 시간 동안 우리 영혼의 나이테를 가장 조밀하게 형성시켜야 한다. 빨리 달려가는 사람은 결코 가질 수 없는, 삶의 깊이와 통찰이 그 ‘느린 구간’에서 잉태되는 것이다.
​이제 수천 년을 살아온 숲의 노철학자에게 우리는 배워야 한다.
​첫째, ‘내면의 밀도’에 집중하라. 겉모습을 부풀리는 성장은 한 번의 태풍에도 무너지지만, 안으로 다져진 단단함은 세월을 이긴다. 당신이 지금 더디다고 느껴진다면, 그것은 당신이 무르고 성긴 나무가 아니라 단단하고 귀한 나무로 빚어지고 있다는 증거다.
​둘째, ‘비교의 속도계’를 버려라. 숲에는 1등 나무도 꼴찌 나무도 없다. 오직 제 속도로 자라는 나무들만 있을 뿐이다. 타인의 성취를 기준 삼아 자신을 채찍질하는 행위는 스스로를 수명이 짧은 속성수로 만드는 길이다.
​셋째, ‘기다림’의 가치를 복원하라. 뿌리를 깊게 내리지 않은 채 꽃부터 피우려 하지 마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내실을 다지는 시간은 결코 헛된 시간이 아니다. 그것은 다가올 천 년을 버티기 위한 필연적인 축적의 시간이다.
​넷째, ‘고독’을 즐겨라. 장수하는 나무들은 대개 고산 지대의 고독한 환경에서 홀로 자란다. 군중 속에서 남을 의식하며 자란 나무는 목재로서의 가치도 떨어진다. 홀로 서서 비바람을 맞으며 스스로의 중심을 잡는 법을 배울 때, 비로소 존재는 위대해진다.
현대 문명에서 시간은 ‘직선’이며 ‘화살’이지만, 나무에게 시간은 ‘순환’이며 ‘축적’이다.
​느림은 게으름이 아니다. 그것은 본질을 훼손하지 않으려는 고집스러운 성실함이다. 자기를 잃어버릴 정도로 빨리 달려서 목적지에 도착한들, 그곳에 서 있는 ‘나’는 이미 빈껍데기일지도 모른다. 차라리 조금 늦더라도, 제 속도를 지키며 한 걸음 한 걸음 단단한 무늬를 새기며 걷는 이가 결국 가장 멀리 간다.
​오늘도 숲은 말이 없다. 그저 묵묵히, 아주 느리게 대기를 정화하고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을 뿐이다. 경쟁하지 않고도 숲을 이루고, 서두르지 않고도 수천 년의 세월을 이겨낸 그들의 지혜 앞에 고개가 숙여진다. 우리들의 삶이 지금 너무 느리게 느껴진다면, 지금 세상에서 가장 단단하고 아름다운 나이테를 새기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깨닫자.
​성장이 더디다고 느껴질 때, 세상의 속도에 숨이 찰 때, 숲으로 들어가 고목의 줄기를 가만히 짚어보자. 수천 년의 침묵 속에서 나무가 속삭일 것이다. 삶은 속도전이 아니라 자신만의 결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라고. 느림은 결코 뒤처짐이 아니라 비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을 거대한 침묵의 성을 쌓는 시간이라는 것을 말이다.
​결국 마지막까지 숲을 지키는 것은 화려한 속성수가 아니다. 느리지만 멈추지 않고 자기만의 생을 밀고 나간 고독하고 단단한 나무들이다. 우리도 그렇게, 조금은 느리더라도 저마다의 향기와 결을 지닌 고유한 나무로 자라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