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0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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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포교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

구룡사와 도심포교


공종원
언론인


우리나라 불교의 포교문제를 생각할 때 가장 중요한 계기가 되는 것은 대체로 세 시기로 집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는 숭유억불정책으로 일관한 조선왕조가 몰락하고 일제가 조선반도 침략을 본격적으로 진행하던 20세기 초를 들 수 있겠고, 둘째 시기는 광복 후 불교정화 과정을 거치면서 불교 종파가 분화되면서 사찰이 도심에 무수히 생기게되는 때이며 셋째는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활발한 기독교의 부흥회와 천막교회 선교활동들을 경험하고 나서 불교도 비슷한 포교형식을 도입하게 되는 1970,80년대가 주목될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 시기인 20세기 초는 나라를 잃게 된 비참한 상황과 동시에 일본 제국주의의 침탈가운데서 민족을 보전한다는 것이 우리에겐 심각한 문제였다. 동시에 불교의 입장에서는 조선왕조시기에 숭유억불정책의 희생물이 되어 위축일변도에 있었던 이 나라 불교가 이번에는 일본 제국주의가 가지고 들어오는 일본불교에 압도되어 자기 본래의 모습을 유지하기 매우 어렵게 된 시기다. 이 상황에서 우리 불교를 어떻게 지키고 키우고 펴는가하는 문제는 대단한 난제일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에 우리 불교는 비록 승려가 서울도심 사대문 안에 들어올 수조차 없었던 굴레는 벗어날 수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 총독정치의 주도아래 이미 순수성을 잃고 대처를 일삼는 일본불교 조직에 우리 불교를 포함시켜야한다는 엄청난 압력에 시달려야했다. 이렇게 내외적인 문제가 산적해 있었지만 종래 서울 도심에서 활동할 수 없었던 불교가 어려운 여건 속에서 조금씩이나마 발을 드려밀면서 도심 안에 거점을 확보하게 된 것은 그나마 불교의 새로운 모습이었다.
종단차원에서 태고사나 선학원같은 조직으로 도심포교를 확대하려는 기운이 싹트고 있었던 것은 물론이지만 스님들이 독자적으로 이런 저런 활동으로 도심포교의 지평을 확대하고 있었던 것은 주목할 대목이다.
이 가운데 종로의 대각사를 중심으로 백용성스님의 문서포교 활동이 전개되었고 한용운 스님의 ‘불교유신론’과 잡지 ‘유심’ 발행은 새시대 불교를 시민들에게 알리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백용성스님과 한용운스님은 3·1독립운동 선언당시 민족대표로 불교를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던 것도 시사하는 바 크다. 반면 이 시기에 가두 포교와 방송포교의 선구는 김태흡 대은스님이었다. 대은스님은 일제에 협력한 스님으로 낙인찍는 경우도 있으나 도심포교, 가두포교 방식으로 불교를 선전하고 신도를 늘리려고 한 불교포교 활동의 측면만을 본다면 큰 공로자임에 틀림없다.
둘째 시기인 1950년대에 불교의 정화운동이 시작되고 그 결과 조계 태고종이 분립하고 기타 각종 불교종파가 난립하면서 서울도심에는 군소종단의 대사찰과 사암들이 무수하게 나타났다.
그것이 불교의 양적팽창에 기여한 것은 수긍할 수 있지만 진정한 의미의 불교의 도심포교에 기여한 것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교리교육이나 수행방법에 대한 보급전파에는 거의 공헌이 없었기 때문이다.
셋째 시기인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우리 불교의 도심포교는 큰 획을 그었다. 기독교가 폭발적인 교세확장을 이루었던 광복과 동란이후의 시대를 거치면서 불교인들도 이른바 기독교인 선교방식의 주류가 되었던 부흥회와 천막교회의 기적을 체험하면서 불교에도 기독교적 선교방식을 도입한 것이라고 보인다. 그래서 나타난 것이 서울의 불광사, 한마음선원, 강남포교원, 구룡사, 능인선원, 삼보사, 안국선원 등이었다. 불광사를 일으킨 고광덕스님이나 한마음선원을 일으킨 대행스님은 이미 고인이 되었지만 이들이 도심에서 일으킨 포교의 원력은 남다른 것이고 그 결실도 컸다. 강남에 대가람을 이룩한 정우스님의 구룡사와 지광스님의 능인선원의 존재는 불자들 사이에 신화같은 이야기로 회자되고 있다.
여건이 어려운 강북지역에서 탄탄한 성장을 이룬 윤지원스님의 삼보사나 수불스님의 안국선원도 주목되는 예이다. 이들의 성공은 물론 창건주 격인 스님들의 대단한 원력이 있어서 가능했을 것이다. 그것을 이들 스님들의 카리스마의 결과물이라고 하는 해석도 있다. 신도들을 끌어들이고 잘 관리하기 위해 운영한 프로그램들이 훌륭했다는 해석도 있다. 불교대학 운영이나 지역단위 그룹단위 신도운영체계가 훌륭하게 작동되었다는 설명도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다.
이들 도심 사찰들은 하나의 사찰에 머물지 않고 지역마다 자매 사찰을 키우고 있다는 것도 큰 특징이다. 이들은 한결같이 사지를 발행하여 신도결속과 포교에 적절히 이용하고 있다. 어엿한 출판사까지 운영하여 도심포교의 안정감을 확보하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태어난 도심포교 사찰들이 벌써 30년 혹은 40년의 연륜을 쌓으면서 도심포교는 과거와 현재만이 아니라 자연 미래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미 창건주가 세상을 떠난 도심사찰들이 자매 지역사찰들과 함께 어떻게 계속 유대를 가지면서 발전을 거듭할 수 있는가가 관심이 되기도 한다. 창건주가 아직 살아있기는 하지만 초창기와 같은 의욕과 열의를 잃고 있는 경우도 없지 않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따라서 도심포교의 미래를 위해서는 창건 때의 열의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노력이 필요함은 물론 창건주를 대신하는 운영주체의 조직화가 무엇보다 중요할 것 같다. 개별 사찰의 독립성도 보장하면서 전체 사찰들의 유기적인 협조관계를 지속시키는 노력도 꼭 필요할 것 같다. 도심포교의 미래는 결국 신도들의 요구에 응해 적절하게 대응하는 포교사찰의 기능이 얼마나 잘 유지되는가에 달려 있을 것 같다. 시대가 변하면서 도시인의 생활이 변하고 사찰에 대한 요구도 변하겠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사찰의 존재이유가 불자들의 요구를 만족시켜주는 방향으로 진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도심사찰이 도시의 불자들에게 절실한 마음의 안정도 공급해주고 삶의 정보도 알려주며 좋은 도반들과의 관계를 유지시켜주는 등 보람있는 사찰의 구실을 계속 유지한다면 도심포교의 미래도 그리 어둡지는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