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0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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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포교는 법신사리 봉안이다

홍사성
불교평론 주간


부처님은 열반하면서 두 가지 사리를 남겼다. 색신사리色身舍利와 법신사리法身舍利다.
색신사리란 부처님을 화장한 뒤 수습한 유골을 말한다. 부처님의 인격을 그리워한 사람들은 이 사리를 수습하여 여덟 군데에 나누어 모셨다. 또 부처님을 화장할 때 생긴 재와 유골을 수습할 때 담았던 그릇도 부처님의 흔적이라 하여 탑에 봉안되었다. 탑은 부처님의 유골을 봉안한 것이므로 엄밀한 의미에서는 무덤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불교도들은 탑을 단순한 무덤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부처님이 입멸한 다음에 부처님을 대신하는 대상은 그분이 남긴 유골(사리)이었다. 따라서 불교도들은 불탑佛塔을 찾아가 꽃과 향을 공양하며 예배했다. 이 같은 사정은 《장아함경》24권, 《십송률》60권 등에 자세히 기록돼 있다.
이와는 달리 법신사리란 부처님이 남기신 가르침을 말한다. 부처님이 남긴 색신사리는 아무리 그 수효가 많다 해도 유한할 수밖에 없다. 또한 법을 중시하는 불교에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인 교법을 유지하고 전승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이를 위해 제자들은 교법을 결집하고 문자로 정리해 유통시키는 일에 전념했다. 특히 대승불교가 흥기하면서는 교법을 기록한 경전을 법신사리라 하여 탑에 봉안했다.
이 무렵부터 사리신앙은 형태와 경향이 달라졌다. 불탑신앙에서 경전신앙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팔천송반야경》은 이러한 사상적 경향이 잘 나타나 있다. 이 경전 제3장과 4장은 부처님 유골에 대한 숭배나 육신의 부처님에 대한 동경보다는 진리에 대한 귀의를 강조하고 있다. 왜냐하면 ‘진리(반야바라밀)야말로 진정한 여래의 몸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법신으로 이루어진 존재다. 물질로 이루어진 신체를 부처님의 몸으로 생각해서는 안 되며 반야바라밀을 법신의 완성으로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신관佛身觀의 변화는 ‘여래의 유골을 안치하고 공양하는 것보다 반야바라밀(경)을 책으로 만들어 안치하고 공양하는 것이 더 큰 공덕이 있다.’는 경전숭배로 바뀌었다. 탑에는 색신사리 대신 경전을 봉안하고 그것을 법신사리라 부르며 공양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펴기 위한 경전신앙은 사경공덕의 강조로 이어졌다. 인쇄문화가 발달하지 않았던 옛날,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유포하는 방법은 경전을 많이 베껴서 이웃에게 읽히는 일이었다. 경전편찬자들은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사경寫經의 공덕을 크게 강조했다.
앞에서 예로 든 <반야경>은 물론이고 <법화경><금강경> 같은 모든 대승경전의 ‘유통분’은 사경의 공덕이 어떤 것과도 비교되지 않는다고 했다. 고려시대 때부터 성행한 경전 옮겨 쓰기 즉 사경법회寫經法會는 신앙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 법회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보다 바르게 이해시키는 효과 외에도 경전을 대량 보급하는 계기가 되었다. 경전에 대한 유통공덕의 강조는 나중에 이웃에게 책을 선물하는 ‘법보시法布施’라는 독특한 문화를 발전시키기도 했다. 불교가 이렇게 경전유통에 큰 관심과 노력을 기울인 것은 활자매체의 장점인 정확성과 기록성을 이용해 정법을 오랫동안 보존하고, 바르게 전지하며, 널리 확대하고 보급하기 위해서였다.
불교의 경전유통에 대한 열의는 고대사회의 인쇄술과 제지술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됐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이나 금속활자 인쇄본이 모두 불교의 경전이나 저술이라는 사실은 불교와 인쇄문화의 상관관계를 말해준다. 널리 알고 있듯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본은 1966년 불국사 석가탑에서 나온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다. 석가탑을 751년 조성했으나 대영박물관 소장 당나라 함통9년(869) 간기刊記의 <금강반야바라밀경>보다 118년이 앞선다. 금속활자 인쇄본도 1375년 우리나라 청주에서 인쇄된 <직지심체요절>이 최고본이다. 소르본느대학이 소장하고 있다가 1972년 파리에서 열린 ‘책의 역사’에 첫 선을 보인 이 책은, 1450년 독일의 마인츠에서 구텐베르크가 찍었다는 42행의 <성경>보다 77년이 앞섰다.
불교의 문서포교 의지를 가장 적극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은 고려시대에 완성된 대장경의 조조다. 두 차례에 걸쳐 조조된 고려대장경은 불교의 경전보급사업을 국가적 차원에서 시행한 것이란 점에서도 주목된다. 고려가 고려대장경 초조본을 제작한 것은 현종2년(1011년) 거란의 침입을 계기로 시작해서 선종4년(1087년)까지 76년 동안이었다.
이 대장경은 고종19년(1232) 몽고의 침입을 받아 소실되는 비운을 맞았다. 고려정부는 몽고의 침입을 불력佛力으로 극복하기 위해 강화에서 다시 대장경 조조를 착수했다. 고려는 이곳에서 고종 23년(1236)부터 고종38년(1251년)까지 16년 동안 그야말로 국력을 모아 총 1511부, 6802권, 81,258판의 세칭 ‘팔만대장경’을 만들었다.
그러나 과거의 이 같은 적극적인 문서포교 전통이 오늘에도 계승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몇 년 전 통계이긴 하지만 <한국출판총람>에 의하면 지난 불교계가 한 해 동안 발행하는 도서의 숫자는 겨우 1백50여종 안팎이다. 불교전문서점도 사찰서점을 포함해 겨우 1백여 개가 조금 넘는다.
불교출판의 저성장 원인은 간단하다. 불자들이 책을 사지 않고 읽지 않기 때문이다. 불교도서는 3백 쪽짜리 단행본 1천부가 판매되는 기간이 1년 이상 걸린다고 한다. 물론 그 배경에는 기획, 편집, 유통구조 등 복잡한 요인이 있다. 그렇더라도 수백만 원 이상의 제작비를 투입한 도서가 몇 년이 지나도 재고로 남아돈다면 문서포교의 미래는 기대할 수 없다. 불교도서가 대형서점의 한쪽 구석에 초라하게 자리 잡고 있는 이유는 오늘의 문서포교 실상을 말해주는 현주소다.


부처님을 머리에 모시고 수억겁을 지날지라도
假使頂戴經盡劫
몸으로 의자를 만들어 부처님을 모신다 해도
身爲床座遍三千
만약 전법을 해서 중생을 제도하지 못한다면
若不傳法度衆生
끝내 부처님의 은혜를 갚았다 할 수 없으리라
畢竟無能報恩者
<화엄경>에 나오는 게송이다. 전법은 부처님의 교법을 영속시키는 방법이다. 교법을
영속시키려면 부처님의 가르침이 담긴 경전과 불서를 널리 보급해야 한다. 모든 불자는
문서포교에 앞장서야 한다. 이것만이 부처님이 남긴 진정한 사리인 법신사리를 봉안하는
길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