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부
2021년은 신축년辛丑年, 소띠의 해입니다. 예로부터 우리 선조들은 소를 단순한 가축의 의미를 뛰어넘어 한 식구처럼 여겨왔습니다. 소는 우직하지만 성실하고 끈질기며, 힘이 세지만 온순하고 주인에게 순종하는 습성 때문에 다른 가축보다도 더 친근감을 가지고 대해왔습니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소는 말이 없어도 열두 가지 덕이 있다.”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소는 불교에도 자주 등장하는 동물입니다. 심우도十牛圖를 통해 사찰의 벽화로 등장하는 것이 그 예라 할 것입니다. 소는 또 불교설화로도 자주 등장하는데, 그 중 대표적인 설화가 무학대사와 소몰이 노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조선 건국 초기 무학대사는 도읍지를 찾아달라는 태조 이성계의 청을 받고 예로부터 신령스런 산으로 알려진 계룡산으로 내려가서 산세와 지세를 살펴보았으나 도읍지로는 적당하지 않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발길을 북쪽으로 옮겨 한양에 도착해서 현재의 강남 봉은사에서 하룻밤을 쉬었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 일찍 뚝섬 나루에서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 지세를 자세히 살핀 뒤 이곳이야말로 새 도읍지를 세우기에 적당한 위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는 흐뭇한 마음에 잠시 쉬고 있을 때였습니다.
한 노인이 소를 몰고 대사의 옆을 지나가면서 하는 말이, “이놈의 소는 미련하기가 꼭 무학 같구나. 왜 바른길로 가지 않고 굽은 길로 들어서느냐?”라고 꾸지람을 하며 소의 볼기짝을 채찍으로 때리고 있었습니다. 이에 무학대사가 급히 노인 앞으로 달려가서 물었습니다.
“노인장, 지금 소에게 뭐라고 하셨습니까?”
“미련하기가 무학 같다고 했소.”
“무슨 뜻으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
“듣자하니 무학이 새 도읍지를 찾아다닌다고 하던데, 좋은 곳은 놓아두고 엉뚱한 곳만 찾아다니니 어찌 미련하고 한심한 일이 아니겠소.”
무학대사는 노인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에 공손히 예를 갖추고 자신이 무학임을 밝힌 뒤 좋은 도읍지를 알려줄 것을 청했습니다. 이에 노인은 채찍을 들어 서북쪽을 가리키며 “여기서부터 10리를 더 들어가서 주변 지형을 자세히 살펴보시오.”라는 말을 남기고 대사가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는 순간 홀연히 소와 함께 사라져버렸습니다.
무학대사가 노인의 말에 따라 서북쪽을 향해 10리쯤 걸어갔더니 삼각산과 인왕산, 남산 등으로 사방이 둘러싸인 아늑한 땅이 나타났습니다. 그곳이 바로 지금의 경복궁 근처입니다. 무학대사는 그 길로 태조와 만나 한양을 새 도읍지로 정하여 도성을 쌓고 궁궐을 짓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도성을 쌓으려고 하자 무학대사와 정도전 일파 사이에는 성의 경계를 두고 심한 갈등이 빚어졌습니다. 무학대사는 인수봉 밖으로 성을 쌓아야 불교가 흥한다고 생각했고, 정도전 일파는 인수봉 안으로 성을 쌓아야 유교가 흥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의견이 팽팽히 맞서자 태조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 결정하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제사를 지내고 난 다음날이 되자 밤새 내린 눈이 모두 녹아내렸는데, 축성의 시비가 일었던 인수봉 중에서도 안쪽으로만 마치 선을 그어 놓은 듯 눈이 녹지 않은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도성은 인수봉 안쪽으로 쌓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에 무학대사는 억불의 기운이 감돌고 있음을 감지하고 크게 탄식했습니다.
여기에서 서울이라는 지명이 생겼다는 설이 있는데, “눈이 울타리를 만들었다” 하여 눈 설雪자와 울타리 울圍자를 써서 ‘설울’이라고 했다가 점차 발음이 변하여 ‘서울’로 정착되었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또 ‘왕십리往十里’라는 지명도 소를 몰던 노인이 무학대사에게 10리를 더 들어가라고 일러준 곳이 그대로 현재의 지명이 되었으며, 소를 몰고 가던 노인은 도선국사의 후신이었다는 설도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