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허 해일(暎虛 海日, 1541~1609)
오경후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
영허스님은 청허 휴정(1520~1604)스님과 동시대를 살다 갔다. 같은 스승에게서 배웠고, 사형師兄이기도 한 청허에게도 법法을 물었다. 그는 우리에게 친숙한 스님은 아니다. 조선시대 불교사를 공부하는 이들조차도 아는 사람이 드물다. 문집이 남아있지 않았다면 묻힐 뻔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월간 『붓다』에 소개하여 스님의 수행과 덕화를 되새길 수 있어 여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다. “보잘 것 없는 나무가 산을 지킨다.”고 한 집안의 전통과 명맥은 대들보나 기둥만이 지키는 것은 아니다.
스님은 법휘法諱가 해일海日이고, 별호別號가 영허暎虛이다. 실호室號는 보응당寶應堂이라고 한다. 속성은 김씨로 전라북도 만경현(杜陵) 사람이다. 대대로 유학을 숭상하는 사족士族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 어머니가 이상한 사람으로부터 밝은 구슬을 받는 꿈을 꾸고 임신해서 태어났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글 읽는 놀이를 하면서 자랐다. 8세 때는 『대학大學』을 읽으면서 사람들로부터 ‘기동奇童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명민했지만, 15세에 과거시험에서는 합격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의 재주가 비록 세속에서는 빛을 보지 못했고, 중간에 뜻이 꺾여졌지만 문집을 남겨 수행자로서의 삶이나 그 시절 불가佛家의 공부법을 터득하고 후세에 전해준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스님의 문집 『영허집暎虛集』은 목판본 4권 1책으로 남아있다. 스님의 행적과 함께 1권에는 5언절구 5편과 7언절구 17편, 2권에는 5언율시 29편, 3권에는 7언율시 14편과 ‘부賦’인 「부설전」, 4권에는 금강산과 묘향산 등을 만행하고 남긴 「유산록遊山錄」 등이 수록되어 있다. 글재주를 익힌 스님의 서권기書卷氣와 수행의 흔적이 남아있다.
스님은 19세에 능가산楞伽山 실상사實相寺에 들어가 인언印彦대사에게서 삭발염의하고 5년 동안 시봉하며 여러 경론을 탐구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무상無常함을 느끼고 지리산에 주석하고 있던 부용 영관(芙蓉靈觀, 1485~1572)을 찾아가 3년 동안 시봉하며 선禪과 교敎에 관한 서적을 열람하고 가르침을 받았다. 또 풍악산楓嶽山으로 가서 학징대사學澄大師에게 계율에 관한 모든 일들을 물었고, 묘향산에 주석하고 있던 청허 휴정에게 석존이 설하신 팔만사천의 진리를 묻기도 하였으며, 상비로암上毘盧庵에서는 10년 동안 참구參究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49세 되던 해(선조 22) 다시 능가산으로 돌아와 『지장경』을 독송하였는데, 지장보살이 감로수로 관정灌頂하는 꿈을 꾸고는 마음이 환하게 열려 이후부터는 걸리는 바가 없었다고 한다.
선조 24년(1591), 은사 인언스님이 입적하여 다비하고는 묘향산에서부터 시작하여 한 산에서 한 철을 지내면서 스님과 거사들에게 염불念佛 수행을 중심으로 한 정토업淨土業을 닦아 그 효과를 거두게 하였다. 스스로 염불 수행을 하면서 대중들에게 불교를 홍포하는데 진력한 것이다.
선조 38년(1605) 봄에 다시 실상사로 돌아가 스님들을 크게 모아 여러 경론을 강설하였으며, 선조 40년(1607)에는 광덕산廣德山 연대암蓮臺庵으로 가서 지내다가 이듬해인 1608년 6월에 두류산 대암臺庵으로 들어갔다. 그 이듬해인 광해군 원년(1609) 2월 5일에 대중을 불러놓고 “그대들은 모두 각자가 무상하고 신속迅速함을 염念하여 진중하고 진중하라.”고 하고는 조용히 입적하였다. 세납 69세였다.
스님이 입적한 날로부터 49재까지 하늘에 상서로운 빛과 기운이 서려 있었다고 한다. 무상함과 영원한 것이 없이 빠르게 변하는 것을 철저하게 깨닫기를 바라는 스님의 유언이 그대로 진여眞如를 말하는 것 같다.
이와같이 함영당涵影堂이 쓴 「보응당영허대사행적普應堂暎虛大師行蹟」에서는 공안公案을 들어서 참선하고 간경看經, 염불 등을 겸하여 수행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청허 휴정이 선교학을 비롯한 조선불교의 수행체계를 수립하면서 조선불교는 선교통합의 면모를 갖추었다.
스님의 「결제結制」라는 시는 “발길 금한 청산에서(禁足靑山裏) / 석 달 동안 어김이 없길 염하노니(九旬念無違)”라고 하여 결제기간 동안 선방에서 수행하여 “머리에 붙은 불을 끄듯 힘써 도를 구하고(頭燃求至道) / 살얼음을 밟는 듯 삿된 생각 두려워 하네(履薄畏邪思)”라고 읊고 있다.
「『능엄경』을 읽다」라는 시에서는 “일생이 헛된 꿈과 같고(一生同幻夢) / 삼계가 공화와 같구나.(三界若空華)”라고 하여 모든 것이 다 공空임을 깨달으면 걸릴 것이 없다고 한다. 이 삼계약공화三界若空華는 부처님이 문수보살에게 “25가지 원통의 수행문 가운데 아난이 구경각을 이루려면 어떤 근기가 상응하겠는가”라는 물음에, 문수보살이 부처님에게 게송으로써 대답한 내용이기도 하다.
心香也一炷 심향야일주
日夜想西方 일야상서방
夢入華池裏 몽입화지리
身遊寶樹傍 신유보수방
觀音同汲水 관음동급수
勢至共眠床 세지공면상
開佛眞知見 개불진지견
無非極樂堂 무비극락당
마음의 향 한 줄기
밤낮으로 서방정토를 염하네.
꿈에 화지에 들어가고
몸은 극락세계 곁에서 노니네.
관세음보살이 물을 길음과 같고
대세지보살이 평상에서 쉬는 것과 한가지네.
부처님의 참 지견을 열면
극락당 아님이 없네.
영허스님의 「염불」이라는 시이다. 스님은 향을 올리고 밤낮으로 서방정토를 생각한다고 했다. 심지어 꿈속에서도 부처의 세상을 생각하니, 몸도 항상 극락세계에서 노닌다고 했다. 시 가운데 ‘개불진지견開佛眞知見’은 본심을 바로 열면 본마음이 정토라는 유심정토唯心淨土를 표현한 것이다. 중생이 법에 미혹하지 않아 한 생각에 부처의 지견을 열면 극락정토가 나타난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럼 불지견을 어떻게 닦아야 하는가. 결국 일상에서의 염불 수행이 선정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선정일치禪淨一致와 유신정토唯心淨土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음의 시에서 스님의 진면목을 볼 수 있다.
一肩霞衲任風塵 일견하납임풍진
定靜功夫亦不眞 정정공부역부진
虎穴魔宮隨處樂 호혈마궁수처락
逍遙天地作閑人 소요천지작한인
한 벌 누더기를 이 풍진 세상에 맡겼으니
고요히 앉아 하는 공부 진짜가 아니네.
범의 굴 악마의 궁전을 이리 저리 누비면서
이 천지에 마음대로 노니는 나그네 되리라.
다들 선禪이니 교敎니 염불念佛이 최고라고 떠들어 대지만, 그 경계를 벗어나는 일은 애쓴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다. 저자거리와 고요한 도량을 구분하지 않고, 여염집을 선방으로 여기는 것이 공부의 시작이자 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스님은 “범의 굴, 악마의 궁전을 이리저리 누비는 나그네가 되기”를 그토록 바란 것이다.
스님은 「부설전浮雪傳」도 지었다고 한다. 어려서 불국사 원정선사에게 출가한 부설스님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담은 소설이다. 즉 구도의 길에 오른 부설스님은 세간에 머물다 인연이 닿은 묘화와의 사이에 등운과 월명 남매를 두었다. 부설스님은 스스로 ‘병부病夫’라 칭하며 수도에 전념했다. 묘화, 등운, 월명도 불법에 귀의해 정진했다. 부안 등운암과 월명암의 암자 이름이 등운과 월명 남매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스님은 「부설전」에서 진정한 수행과 깨달음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불교계가 탄압과 소외로 암울한 상황의 연속이었지만, 스님은 자신이 수행자였음을 잃지 않았고, 선과 교, 염불이 모두 안식처였음을 알았기 때문에 산중과 저자거리를 가리지 않고 눈에 보이고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이 진여의 세계요 극락이었던 것이다. 이런 분들에게 세간의 영고성쇠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