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頂宇 스님
본지 발행인 | 구룡사 회주
일념보관무량겁一念普觀無量劫하니
무거무래역무주無去無來亦無住로다.
한 생각으로 널리 무량한 세월을 관하니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고 머무름도 없음이로다.
『화엄경華嚴經』은 80권 39품으로 10조9만5천48자요, 4구게四句偈가 10만 게송이니 광대무변한 경전입니다. 이 경전 중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에 문수보살文殊菩薩이 각수보살覺首菩薩 재수보살財首菩薩 보수보살寶首菩薩 공덕수보살功德首菩薩 목수보살目首菩薩 정진수보살精進首菩薩 법수보살法首菩薩 지수보살智首菩薩 현수보살賢首菩薩과 법을 묻고 답을 한 뒤, 여러 보살들이 문수보살에게 법을 묻고 문수보살이 각수보살 등 여러 보살들에게 답합니다.
그 중에 문수사리보살이 정진수보살(근수勤首보살)에게 법을 물었습니다.
“불자여, 부처님의 가르침이 하나이거늘 중생은 보고 어찌하여 즉시에 일체 모든 번뇌의 속박을 끊고 벗어나지 못합니까. 그러나 그 색온色蘊 수온受蘊 상온想蘊 행온行蘊 식온識蘊의 5온五蘊과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와 무명無明, 탐욕애착貪慾愛着에는 차별이 없으니 이것이 곧 부처님의 가르침이 모든 중생에게 혹은 이익이 있기도 하며 혹은 이익이 없기도 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천차만별로 서로 다르게 살게 되는지를 문수보살의 경계가 아니라 우리 입장에서 근수보살에게 묻고 근수보살이 문수보살에게 답答하였습니다.
“불자여, 자세히 들으십시오. 내 이제 사실대로 답 하리니, 혹 어떤 이는 빨리 해탈하고 혹 어떤 이는 벗어나기 어려움이 있습니다. 만약 한량없는 모든 허물을 소멸하고자 하거든, 마땅히 부처님 법 가운데서 항상 용맹하게 정진할 지니라.”
오욕五慾의 삶으로 인해 지옥地獄 아귀餓鬼 축생畜生 아수라阿修羅 인간人間 천상天上의 6도六道를 끊임없이 윤회輪廻 하면서 살게 되는지에 대해서, 아는 것만큼 전하여 주겠다는 것입니다. 용맹정진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게을러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을 여러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자 합니다.
“비유하건대 조그마한 불에 땔감이 젖어 있으면 그 불이 빨리 꺼져버리듯이 부처님의 교법 가운데서 게으른 이도 또한 그러하니라.”
불씨가 시원찮은데 땔감마저 물에 젖어 있으면 어떻겠습니까?
그 불은 금방 꺼져버릴 것입니다. 이와같이 부처님 교법 가운데서도 게으름은 물에 젖어 있는 땔감과 같다는 것입니다. 땔감이 불에 꺼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게으르지 않은 정진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나무를 비벼서 불을 구할 때 불이 나기도 전에 자주 쉬면 불기운이 따라서 소멸하듯이 게으른 사람도 또한 그러하니라.”
이 비유는 부처님 당시에는 성냥이나 라이터로 불을 쉽게 켤 수 있는 도구가 없었던 시대임을 알 수 있습니다. 부싯돌을 부딪치거나 나무를 비벼서 불을 지피던 시절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나무를 비벼서 불을 구할 때 불이 일어나기도 전에 자주 쉬면 어떻게 될까요? 불기운은 일어나려다 소멸되고 일어나려다 소멸되고 하겠지요. 게으른 사람의 인생도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신심 있는 이가 발심을 해서 정진하는 것을 진지한 삶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정진이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진지한 삶입니다.
갈팡질팡 횡설수설 우왕좌왕 하지 않는 생활입니다. 나무를 비벼서 불을 구할 때에는 쉬지 말고 나무를 부비어야 합니다. 불기운이 생길 때까지 쉼 없이 비벼야 하는데, 중간에 자꾸 쉬면 백 년이 가도 불은 지펴지지 않을 것입니다.
“마치 사람이 화경火鏡을 가졌으나 솜털로 햇빛을 받지 아니하면 마침내 불을 얻을 수 없듯이 게으른 사람도 또한 그러하니라.”
화경은 볼록렌즈나 또는 돋보기입니다. 돋보기를 태양 빛이 투영되게 들고 있어야 불이 생깁니다. 그러나 불이 생기게 하려면 끈기가 있어야 합니다.
불이 붙을 때까지 돋보기를 움직이면 안 됩니다. 아무리 좋은 돋보기라도 성냥불 켜듯 곧바로 불이 붙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불이 붙을 때까지 화경에 솜털을 끈기 있게 붙들고 있어야 합니다. 이 역시 게을러서는 할 수없는 일입니다. 그러니 인생도 방일放逸하지 않아야 하고 불이 붙을 때까지 방심放心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혜도 없고 경험도 없는 사람을 어린아이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비유하건대 밝은 햇살 아래서 어린아이가 두 눈을 가리고서 왜 보이지 않느냐고 말하듯이 게으른 사람도 또한 그러하니라.”
어리석은 사람은 귀 막고 소리친다는 말이 있습니다. 스스로 공부하지 않고 불도佛道가 없다고 말한다면, 밝은 햇살 아래에서 눈을 가리고 햇빛이 없다고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현실과 동떨어진 생각을 하면서 불도佛道를 이루려는 것을, 게으른 사람에 대한 비유도 있습니다.
“한 터럭 끝으로 큰 바다의 물을 떠내서 모두 다 말리려 하듯이 게으른 사람도 또한 그러하니라. 또 겁화劫火가 일어날 때 적은 물로 불을 끄려고 하듯이 부처님의 교법 가운데 게으른 사람도 또한 그러하니라.”
겁화는 화산이 터지고 지진이 나고 삼재팔난三災八難 일어난 것을 말합니다. 화산이 터지고 지진이 났는데 작은 물로 끄려고 한들 꺼지겠습니까? 표주박으로 바다 물을 떠낸다고 해서 바닷물이 마르겠습니까? 겁화에 몇 바가지 물을 가지고 그 불을 끄려고 한다면, 표주박으로 바닷물을 다 퍼내서 말리려고 하듯이, 매사를 쉽게 대해서는 안 된다고 하신 가르침입니다.
『열반경』에 “어린 왕과 어린 수행자, 새끼용과 작은 불씨, 이 네 가지는 아무리 작아도 가벼이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현재는 미약한 존재로 보일 수 있지만, 성장하면 큰 힘을 갖게 되기 때문에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되고 늘 경계 삼아서 조심하고 조심하라는 가르침 이셨습니다.
우리 속담에 백문이 불여일견百聞而不如一見이요 백견이 불여일미百見而不如一味라는 말이 있습니다. 백 번 들어도 한 번 보는 것만 못하고 백 번 보아도 한 번 체험한 것만 못하다는 이 비유에서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이가 허공을 보고 단정히 앉아서 움직이지 않고 말로만 허공에 올랐다고 하듯이 게으른 사람도 또한 그러하니라.”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실 때,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하신 말씀이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라.” 하셨습니다. 게으름이란 가장 나쁜 해독害毒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온갖 비유를 들어가면서 게으름을 경책하셨던 것입니다.
근수보살에게 문수보살이 물었던 것이 왜 똑같은 법을 전하는데도 어떤 이는 깨닫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깨닫지도 못하고, 어떤 이는 이익을 얻기도 하고 어떤 이는 얻지도 못한다고 하는가, 과연 그 허물은 누구의 허물이겠습니까?
병든 이가 명의를 만나서 아무리 좋은 약방문을 받아도 그 약을 먹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말장난에 놀아나지 말고 이치를 현량해서 헤아릴 줄 알고 그 뜻을 잘 살펴서 볼 줄 알면 동요되거나 흔들림이 없을 것입니다.
나무를 비벼서 불을 구할 때도, 불이 일어나기 전에 쉬었다 비볐다 하기를 반복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입맛이 없을 때, 한 숟가락씩이라도 먹는 것이 낫습니다. 먹으면 아예 안 먹은 것보다 든든하고 영양실조로 어려움을 겪지 않는 이치를 우리들은 일상생활 속에서도 충분히 인식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수행이란 안으로 실다운 덕을 쌓기 위함입니다. 실다운 덕 없이 한없이 듣기만 한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행동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신심信心은 도道의 근본根本이요 공덕功德의 어머니라 했습니다.
그러나 신심이라는 생명력을 가지고 있어도 발심發心하지 못하여 마음을 일으키지 않으면,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삼일수심三日修心은 천재보千載寶요 백년탐물百年貪物은 일조진一朝塵이라 했습니다. 3일간만 진지하게 정진해도 천 년을 덮고도 남을 보배를 지닐 수 있다 했듯이 늘 진지한 삶의 현장에서 열심히 정진하며 부처님 정법을 받들며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부처님 법을 믿고 따르는 진정한 불자佛子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추신. 정진수보살과 근수보살은 같은 보살입니다.
      보살의 명호 정진수精進首보살과 근수勤首보살의
      정진은 진지함이요 근수보살은 부지런함의 상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