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02월호

    다시듣는 큰스님 법문
    이달의 법문
    화보
    다람살라소식
    화엄경 열두 꼭지
    시심불심
    시심불심
    불서
    선지식을 찾아서
    불교관리학
    건강한 생활

과월호보기

부휴문중浮休門中의 선양자

취미 수초(翠微 守初, 1590~1668)


오경후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


日斜簷影落溪濱일사첨영락계빈
簾捲徵風自掃塵염권징풍자소진
窓外落花人寂寂창외락화인적적
夢回林鳥一聲春몽회림조일성춘
해 기우니 처마 그림자 시냇가로 떨어지고
발 걷으니 가벼운 바람 티끌 절로 쓸어주네
창밖에 꽃 지고 인적은 고요한데
새들의 봄노래에 꿈을 깨었네
이덕무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권35 / 「승취미僧翠微」중에서


조선후기 박학다식하고 고금의 기문이서奇文異書에도 달통했던 청장관靑莊館 이덕무(李德懋, 1741~1793)가 칭송했던 취미 수초 스님의 시이다. 그는 “스님의 시로서 우리나라에서는 뛰어나게 아름다운 것이 없다.”고 했지만, 오직 고려高麗의 선탄禪坦 스님과 근세의 취미 스님의 ‘수기睡起’라는 시는 자못 청경淸警하여 선발할 만하다고 하였다. 문장에 개성이 뚜렷해 문명文名을 일세에 떨쳤던 이가 꼽을 정도였다면 단순히 시적 재능에 머물러 있지 않았을 것이다.
스님은 휘는 수초守初이고, 자는 태혼太昏이며 호는 취미翠微이다. 속성은 성成씨인데 본은 창녕으로 조선 시대 명신인 성삼문의 방계 후손이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여의고 형과 형수에게 의지하였는데, 놀 때에는 반드시 불사佛事를 흉내 냈고 앉아 있는 모습이 마치 선정禪定에 들어 있는 스님의 모습과 같았다. 지학(志學, 열다섯 살을 달리 이르는 말.)의 나이에는 어떤 범승이 “어찌 이리도 늦었는가”라고 버럭 나무라는 꿈을 꾸고는 형에게 꿈을 이야기하고 출가의 허락을 구하였지만, 형은 손으로 선사의 입을 막고 “그런 말을 하지 말라.”라고 말했다. 스님은 그로부터 열흘이 지나서 성벽을 넘어 설악산으로 도망가서 경헌敬軒 스님에게 의탁하여 머리를 깎았다.
1606년(선조 39) 17세 때는 남쪽의 두류산頭流山에서 당대 최고의 고승인 부휴 선수浮休善修 스님으로부터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부휴 스님은 당시 소장로小長老로서 제일 상좌로 있었던 벽암 각성碧巖覺性 스님에게 “훗날 크게 깨치는 사람이 나온다면 반드시 이 사미가 그 주인공일 것이다. 이 늙은이가 그대에게 부촉하니 잘 이끌고 보호해 주거라.”라고 당부하였다. 20여 세에는 방방곡곡을 두루 참방하였다. 당시 스님에게는 네댓 명의 도반이 있었는데 그들이 ‘오烏’라는 글자를 가지고 운을 삼아서 시를 청했다. 스님은 먼저 ‘금唫’ 자를 내놓더니, 마지막 대목에서 “평생 동안 사치품이란 없었는데(平生無長物평생무장물)/오로지 대지팡이뿐이라오(唯有竹枝烏유유죽지오)”라고 읊어 재치를 보이기도 하였다. 어느 날 벽암 스님이 법좌에 오르자, 취미 스님이 법좌를 세 바퀴 돌고 나서 예배하고 질문드리니, 벽암 스님이 말씀하셨다. “어디에서 한 동이를 얻었기에 베 짜는 노파가 찾아온 것인가?” 그러자 스님이 말했다. “내려놓고자 하나 집착거리가 없습니다.” 벽암 스님이 부휴 스님에게서 전해 받은 부촉을 은밀하게 지시하고 나서 “그대야말로 종문宗門의 표준이로다.”라고 그것을 설법으로 드러내어 인가하고 말했다.
1629년(인조 7)에는 대중의 간곡한 청을 받아들여 세상에 나와, 옥천玉川의 영취사靈鷲寺에서 개당하였다. 당시 정승 장유張維가 희고 상인希古上人으로 하여금 북한산에 절을 짓게 하고 특별히 취미 스님을 강주講主로 청하였다. 스님이 이를 굳이 사양하고 춘파春坡 스님을 천거하니, 스님을 더욱 존경하여 유리염주琉璃念珠 한 꾸러미를 보내 주었다. 1632년(인조 10)에는 관북關北에 초청되어 설법을 하다 󰡔설봉어록雪峯語錄󰡕을 읽고 오도悟道하였는데, 자신이 몸담고 있는 부휴 문중 이외의 가르침에 마음을 움직인 계기가 되었다. 이와 같이 스님은 관북·관서지방의 오도사悟道寺·설봉사雪峯寺 등을 편력하면서 설법하다가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영남과 호남지방 등지를 다니면서 전란 속에서 방황하는 사람들을 교화하기도 하였다.
1659년(효종 10) 겨울에 스승 벽암 각성 스님이 병에 걸리자 화엄사로 모시고 돌아왔지만, 이듬해 정월에 벽암 스님이 입적하였다. 이에 스님은 조계대도량曹溪大道場으로 옮겨서 전후 12년 동안 주석하였다. 스님은 사찰 내에 네 곳의 대전(大殿, 화엄전·팔상전·약사전·관음전)이 있었는데 불상이 없어 장인에게 명하여 주조하도록 하였다. 네 곳의 대전에는 실제로 여섯 구의 불상을 비롯하여 많은 탱화가 있었는데, 그 수가 수천 점이었다.
1667년(현종 8) 가을 7월에 묘향산에 있었는데, 그곳에서 다음과 같은 󰡔선문염송禪門拈頌󰡕에 수록된 게송을 열람하였다.


承春高下盡嬋妍승춘고하진선연
雨過喬林叫杜䳌우과교림규두견
如服一杯降氣湯여복일배강기탕
胷次灑落乃掩卷흉차쇄락내엄권
봄을 맞은 산과 강은 모두가 아름다운데
비가 그친 교목 숲에는 두견새 울어 댄다
강기탕을 달여 한 잔을 쭉 들이켜니
가슴이 상쾌하고 시원해 이내 책을 덮네


이에 탄식하고는 “무릇 모든 문자는 술지게미와 같은 것인데 어찌 다른 맛이 있겠는가?” 이에 이르러 좌선의 자세를 취하고 설법을 하여 문풍이 엄격하였다.
스님은 1668년 정월, 제자들에게 영북嶺北으로 갈 것을 알리고, 2월에는 오봉산五峯山의 삼장사三藏寺에 들어갔다. 4월 병기가 나타나자 부백府伯인 홍 공洪公이 약을 들고 문안을 하러 찾아오니 스님은 거절하고 말했다. “생과 사는 운명이지요. 그런데 어찌 약을 쓰겠습니까?” 6월 목욕을 마치고 옷을 갈아입고서 목탁을 쳐서 대중에게 이별을 고하여 말했다. “나는 79년을 살아왔는데, 65년을 출가인으로 살았다. 그런데 무엇이 불만이겠는가? 그러니 탑도 세우지 말고 비명도 새기지 말라.” 어떤 사람이 게송을 요구하자 스님이 말했다. “선정의 마음을 어지럽히지 말라.” 이후 3일이 지나자 재齋를 마치고 자신이 기거하던 방을 돌면서 ‘무량수불無量壽佛’을 염불하다가 가부좌한 채 서쪽을 향해 앉은 채로 입적入寂하였다. 스님이 입적한지 7일이 지나서 다비를 하는 자리에 여섯 고을의 사람들이 모두 모여들었다. 정골사리인 금광사리金光舍利가 튀어나오자 호남의 송광사와 설봉산 석왕사, 그리고 오봉산 삼장사에 부도를 세웠다. 세수는 79세이고, 법랍은 65년이다.
스님은 󰡔취미대사시집翠微大師詩集󰡕 1권을 남겼으며, 대표적인 제자로는 성총性聰·해활海闊·민기敏機 등이 있다. 이들 스님들은 조선시대의 불교계를 주도한 고승들이다. 특히 백암 성총 스님을 비롯한 제자들은 쇠락한 송광사의 보조국사의 가풍과 부휴 선수 문중을 선양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이로써 부휴 선수 스님 문중은 조선후기 불교계에 대표적인 문중이 되었다.
취미 스님은 선교일치禪敎一致라는 한국불교의 전통을 계승하고, 나아가 정토문淨土門과 성도문聖道門의 2문門을 합일시키려 한 회통적會通的 성격을 반영시킨 고승이다. 특히 회통의 이론적 기반을 화엄사상華嚴思想에 두고 원융무애圓融無碍한 경지를 모색하였다. 또한 선승禪僧인 스님이 정토왕생淨土往生과 타력신앙他力信仰을 주장한 점은 조선후기 불교계의 수행체계를 파악할 수 있는 한국불교사상사에서 주목되는 한 유형이기도 하다. 아울러 스님의 유학에 대한 식견은 당시의 유학자인 김육金堉·이식李植·이안눌李安訥 등과 교유하면서 높이 평가받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