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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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숲 겨울나무


홍성범
숲해설가


겨울철 나무들은 그대로가 침묵의 원형이다. 떨쳐버릴 것들을 죄다 훌훌 떨쳐버리고 알몸으로 의연히 서 있는 나무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침묵의 실체 같은 것을 감지할 수 있다. 저 산마루에 빽빽이 서 있는 나목들은 겨울 산의 아름다운 풍경이다. 허공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나무들의 자태가 더욱 정답게 다가선다.
산마루의 나목림 사이로 달이 떠오를 때, 나무와 달은 둘이면서 하나를 이룬 겨울 산의 신비롭고 황홀한 아름다움이다. 겨울 숲을 대하고 있으면 우리 안에서도 침묵이 차오른다. 침묵의 의미를 거듭 챙기게 된다. 평소에 무심히 쏟아버린 말의 가벼움과 침묵의 무게에 따른 그 상관관계를 헤아린다.
법정스님의 「겨울나무에서 침묵을」 중에서


겨울산에 가보자.
우리는 산과 들에 주로 꽃을 보러 또는 형형색색의 단풍을 보러 간다. 그래서 봄이면 이산 저산 등산객으로 넘쳐나고, 가을 단풍철에는 주요 단풍 명소가 교통전쟁이다. 이 또한 찌든 도시를 떠나 삶의 여유를 갖고 자연을 접하는 바람직한 활동이다.
이제 겨울산에도 가보자. 겨울산에 주목하는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많지 않다. 등산로가 미끄럽고 위험해 많은 안전 장비가 필요하기에 상당한 준비를 하지 않으면 접근하기가 쉽지 않은 것도 현실이다. 하지만 한 번 겨울산을 접해본 사람들은 단번에 겨울산의 매력에 빠지고 만다.
상고대, 하얀 설산 능선과 발목까지 빠지는 눈길을 걷다 보면 마치 동화 속의 겨울왕국에 온 착각에 빠지기에 충분하다. 어린 시절 눈싸움 하며 추위도 시간 가는 것도 잊고 즐거웠던 그 시절이 저절로 떠올려진다. 요즈음 도시에서 많은 눈을 오래 보지 못하는 현실과 대비되어 더욱 그렇다.
어느 등산가는 사계절 중 겨울산이 단연 최고이며 자신은 겨울산에 안전하게 가기 위해 봄부터 가을까지 산행로를 탐색한다고 한다. 그만큼 겨울산은 특별하고 매력적이다.
겨울산에서는 그동안 무성한 나무 잎에 가려져 다른 계절에는 잘 드러나지 않았던 산의 근육을 제대로 볼 수 있다. 혹자는 이를 ‘산결’이라고도 하고 ‘골계미’라고도 한다.
전망 좋은 산 정상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 산등선과 골짜기, 굽이치는 산의 물결을 제대로 감상해 보는 기쁨을 꼭 경험해 보자. 두꺼운 눈을 덮고 있어도 좋고 눈이 녹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 산의 골격을 보는 것은 더 좋다.
체력이 허락되지 않은 분들은 곤돌라를 이용해서라도 꼭 경험해 보기를 권해 본다.
겨울산에 가면 하얀 설경만 감상하지 말고 잠시 여유를 가지고 겨울 숲, 겨울나무도 자세히 관찰해 보자.
겨울에도 푸른 잎을 간직하고 있는 상록 침엽수는 하얀 눈과 대비 되어 겨울에 더욱 늠름하고 아름답다. 모든 낙엽 활엽수는 가을에 다 잎을 떨고 있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은 나무도 있고 열매를 아직도 매달고 있는 나무도 제법 있다. 겨울 숲에 가면 이렇듯 봄이나 가을 못지않게 다양한 나무의 살아가는 방식을 볼 수 있다.
그런 나무들에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관찰하고 나무와 교감해 보자.
겨울나무는 죽은 듯이 보인다. 하지만 자세히 관찰해 보면 새로운 성장을 준비하는 생명력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겨울나무 가지 사이로 보이는 넓어진 하늘도 나뭇잎의 저항이 사라진 자유로운 바람 길도 느껴보자. 나뭇잎에 가려져 있어 보지 못했던 새나 청서의 둥지들도 찾아보자. 평온하고 여유로운 공간에서 조용히 움직이며 살아가는 여러 생명체와 한 해 동안 나무와 함께 살아갔던 생명의 흔적들을 찾아보는 재미는 숲이 비어야 비로소 보이며 느낄 수 있는 겨울산만이 주는 선물이다,
나무는 겨울이 오기 전부터 치밀하게 준비한다.
봄부터 자신의 몸집을 키우고 자라는데 총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여름이 깊어지면 스스로 조금씩 성장을 멈추기 시작한다. 햇살이 여전히 머리 위를 작열하고 날씨가 추워지려면 아직 시간이 한참을 남았어도 더 이상 가지를 뻗어 나가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게 멈춘 가지 끝에 꽃을 피운다. 한여름 우리의 눈을 기쁘게 하는 나무들의 다양한 색의 꽃들은 가지가 성장을 멈췄다는 증거인 것이다. 멈추지 않고 계속 자라기만 한다면 풍성한 꽃도 튼실한 열매도 볼 수 없다.
자신의 잎을 떨어뜨리고 추운 겨울에 대비하는 몸을 만드는 온대지방의 나무는 봄이 되면 성장호르몬을 통해 가지를 자라게 하고 부피를 키운다. 그러나 가을이 되면 가지와 잎을 연결했던 관을 막고 잎을 떨어뜨려 최소한의 에너지로 겨울을 지낼 준비를 한다.
추위가 닥치면 동물은 안전한 곳으로 이동하지만 움직일 수 없어 고스란히 추위를 견뎌야 하는 나무는 스스로 저온 순화한다. 몸의 물기를 빼고 세포 내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 등의 농도를 높게 하여 농축된 세포액의 어는점을 낮춘다. 생장과 호흡을 줄여 세포 내 당분함량을 증가시켜 영하 30도의 혹한에서도 얼지 않고 생존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 저온순화가 되면 식물이 어는점 이하의 일정 온도에 노출되어도 추위를 견딘다.
그리고 남은 영양소를 1년생 가지에 옮겨 저장한다, 그래서 나무의 1년생 가지에는 나무의 고유한 특성, 즉 나무의 미래가 온전히 보전되어 봄으로 비상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
겨울나무를 자세히 관찰해 보면 품종마다 다른 눈(Bud)이 있다.
나무의 종을 식별하기 위해서는 특히 생식기관 또는 열매와 종자가 중요하지만 대부분의 나무는 개화기가 그리 길지 않아 관찰시점을 놓치면 확인이 어려워진다. 그러므로 나무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나무의 눈에 주목한다. 나무의 겨울눈은 종마다 근연종과 구별되는 특색을 갖춘 경우가 많고 특징이 상당한 일관성을 띠기 때문이다. 더욱이 겨울눈은 겨우내 긴 시간 동안을 관찰할 수 있어 종을 식별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겨울눈의 외양뿐만 아니라 겨울눈이 시간의 흐름에 어떻게 전개되는지 지속 관찰하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경험이 될 것이다.
겨울눈 안에는 여린 잎들과 꽃들이 잠자고 있다. 혹독한 추위를 잘 견디고 나면 언제 겨울이었냐는 듯 푸른 잎들과 꽃들이 기지개를 켤 것이다.
나무는 겨울눈을 만들 때 내년에 굵게 뻗어 갈 가지는 어느 방향으로 할지, 주변 나무와 겹치지 않으려면 어느 가지를 뻗어야 할지 미리 계산하여 먼저 설계한다. 그 다음 가지의 영양 상태를 분석하여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 자손을 번식시킬 수 있는 꽃눈을 만들지, 수꽃눈만 만들어 꽃가루를 받을지, 아니면 가지와 잎을 만들어 나무의 몸을 성장시키는 일에 집중할지 판단하여 겨울눈에 숨겨 놓는다.
나무는 이러한 막중한 기능을 담당할 겨울눈을 보호하는 장치도 마련한다. 겨울눈을 자세히 보면 두꺼운 털로 덮여 푹신하고 동통한 모습도 있고, 얇은 옷을 여러 겹 겹쳐 입고 있기도 하다. 습기나 곤충으로부터 겨울눈을 보호하기 위해 밀랍이나 송진으로 덮여 있기도 하다. 나무는 자신의 모든 미래가 담겨 있는 겨울눈을 추위와 주변 환경으로부터 완벽하게 보호한다. 실로 놀라운 준비다.
도저히 생명을 유지할 수 없을 것 같은 환경을 묵묵히 견디고 있다가 봄이 오면 어김없이 여린 잎을 내고 화려한 꽃을 피우는 모습에서 죽음과 삶의 강렬한 대비를 느낀다는 것은 지나친 감상이 아니리라.
이제 겨울산에 가면 오감의 문을 활짝 열고 겨울나무가 들려주는 긴 침묵의 시간을 느껴보자.
나무는 스스로 멈춰야 할 때를 잘 안다.
지금까지 최선을 다해 성장했고 욕심을 내어 더 클 수 있다는 것도 알지만 어느 순간 스스로 자라기를 멈춘다. 결국 나무에게 있어 멈춤은 자신을 위한 약속이면서 동시에 주변 생물들과 맺은 공존의 계약인 셈이다.
인생도 가던 길을 멈추고 숨을 돌려야 한다.
나무처럼 멈춰야 할 때를 알기란 쉽지 않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