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우(頂宇)스님
본지 발행인
통도사 주지
구룡사 회주
요즘 사회적인 공동체(共同體)를 들여다보면 참으로 어수선하다는 생각입니다. 넓게는 지구촌의 경제 불황과 국가 간의 분쟁 등이 그렇고 안으로는 용산의 화재참사와 연쇄살인사건 등이 그렇습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 간의 대화를 듣고 있다 보면 어렵고 힘들다는 이야기를 자주 하게 됨을 느낍니다.
그러나 「마음이 번거로우면 세상이 다 번거롭고 마음이 맑고 깨끗하면 세상 또한 맑고 깨끗해진다」고 했습니다. 다들 힘들고 어렵게 살아가고 있는 이럴 때일수록 위를 올려다보는 것보다는 아래를 내려다보는 지혜(智慧)를 발휘할 줄 알아야 합니다. 어렵고 힘든데 목까지 아프게 위를 쳐다보면서 한탄하기보다는 고개를 아래로 향해 내려다보면 나보다도 더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의 인생을 시간개념으로 보면 24시간으로 나뉘어 하루하루가 반복되고, 절기(節氣)개념으로 보면 24절기로 나뉘어 일년일년이 반복되듯이, 우리의 인생도 현재의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고 항상 변한다는 이치를 깨닫고 매사에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여기에 더하여 이 시대의 불자들에게 권하고 싶은 삶의 자세는 <화엄경(華嚴經) 이세간품(離世間品)>에 나오는 「보살의 열 가지 고달프지 않는 마음가짐」입니다.
『불자들이여, 보살마하살은 열 가지 고달프지 않는 마음을 내나니, 무엇이 열 가지인가. 이른바 모든 부처님을 공양하는데 고달프지 않는 마음과, 모든 선지식을 친히 가까이하는데 고달프지 않는 마음과, 모든 법을 구하는데 고달프지 않는 마음과, 바른 법을 듣는데 고달프지 않는 마음과, 바른 법을 말하는데 고달프지 않는 마음과, 일체중생을 교화하고 조복시키는데 고달프지 않는 마음이며, 또한 일체중생을 부처의 보리에 두는데 고달프지 않는 마음과, 낱낱 세계마다 말할 수 없이 말할 수 없는 시간을 지내면서 보살의 행을 행하는데 고달프지 않는 마음과, 모든 세계 다니는데 고달프지 않는 마음과, 온갖 불법을 관찰하고 생각하는데 고달프지 않는 마음이니, 만일 보살들이 이 법에 편안히 머물면 여래의 고달프지 않는 위없는 큰 지혜를 얻게 되느니라. 』
사람이 세상을 살다보면 고달프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때와 장소를 잘 가늠해서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것이 곧 지혜로운 삶이요, 가장 보편적인 삶의 정신입니다. 세상살이가 힘들고 어렵다고 느껴질 때일수록 긍정적인 사고를 한결같이 유지하는 것이 이러한 사바세계(娑婆世界)를 지혜롭게 살아가는 삶의 핵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힘들다고 느끼면 느낄수록 스스로의 마음속으로 들어가서 자신을 객관적(客觀的)으로 들여다보고 고달프지 않는 마음들을 가지고 사는 보살들을 통해서 우리도 고달픈 마음을 가지지 않고 살 수 있는 법열(法悅)의 마음 자세를 가질 수 있는 이치가 어디에서 생기는가를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자기가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슬픈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따라서 내가 나를 이해해야 합니다. 내가 나를 들여다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가족도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내가 나도 모르는데 누구를 들여다보고, 내가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데 누구를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어렵고 힘들다고 느낄 때일수록 스스로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중생심(衆生心)이라는 것은 분별식심(分別識心)으로 인해서 항상 흔들리게 마련입니다. 그 분별식심을 내게 하는 것이 바로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방 안의 공기 속을 예를 들어본다면, 그 안에는 미세한 먼지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전깃불에는 그 먼지들이 잘 보이지 않지만, 아침에 창문을 열어놓으면 문틈 사이로 들어온 햇살에는 공기 중에 떠다니는 무수히 많은 먼지들을 상세하게 볼 수 있습니다.
티끌은 방 안의 공기 중에 항상 흔들리고 있었지만 햇빛이 들어오기 전까지 우리는 눈으로 보지 못하다가 창문을 통해 햇빛이 들어오게 되자 확연하게 볼 수 있는 것처럼, 우리 마음속에서 항상 흔들리고 있는 미세한 번뇌(煩惱)와 망상(妄想)도 그냥은 보이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것을 보려면 기도(祈禱)를 해야 합니다. 정진(精進)을 해야 합니다. 수행(修行)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불자의 따뜻한 기운을 가지도록 노력을 해야만 합니다. 그 기도와 정진과 수행과 노력이 바로 공기 중의 미세한 먼지를 볼 수 있게 하는 햇빛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기도와 정진과 수행의 노력을 하게 되면, 빛에 의지해서 티끌이 보이듯이 미세한 번뇌도 사유를 통해 보게 되는 것인데, 그렇게 번뇌를 보게 되었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 번뇌를 여의는 공부를 해야 하는데, 우리는 그것을 생활불교인(生活佛敎人)으로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즉, 지혜를 갖추게 되면 번뇌는 저절로 볼 수 있습니다. 마치 아침에 햇빛이 들면 어둠은 저절로 사라지고 해가 지면 어둠은 저절로 오듯이, 지혜와 어리석음의 차이도 이와 다르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행복(幸福)과 불행(不幸)도 마찬가지입니다. 행복도 나에게 있고 불행도 나에게 있는 것이기 때문에 행과 불행 중 어떤 것을 지탱해서 살아가느냐가 관건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를 간단히 설명하자면 TV를 볼 때 리모컨으로 채널을 바꾸는 것과 같다할 것입니다. TV를 보다가 재미가 없으면 채널을 바꾸듯이 불행한 마음을 행복한 마음으로 전환하면 됩니다. 중생심의 작용으로 분별심이 일어나고, 그로 인해 생기는 번뇌와 망상에 찌들어 있는 마음상태를 진지한 삶을 살아가는 수행정진으로, 기도의 힘으로 제거하게 되면 우리의 마음은 자연스럽게 맑고 깨끗해진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해서 마음이 깨끗해졌으면 이제는 버리고 놓는 공부를 해야 합니다. 이 버리고 놓는 일 또한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비유컨대, 눈 먼 장님이 길을 걸어가다가 발을 헛디뎌 스스로 생각하는 절벽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장님이 순간적으로 손을 뻗어 의지할 것을 잡았는데, 그 절벽이 깊지 않아 발과 땅 사이가 한 뼘 정도밖에 되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장님은 볼 수가 없기 때문에 꽉 움켜잡은 손을 놓지 못하고 아이고 나 죽네, 나 좀 살려주세요!라고 소리만 치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이 광경을 보고 손 놓으세요, 손 놓으세요.라고 한결같이 소리를 쳤습니다. 그러나 장님은 떨어지면 죽는 줄 알고 끝까지 손을 놓지 못하고 살려달라고만 소리치다 힘에 부쳐 어쩔 수 없이 손을 놓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손을 놓을 걸 괜히 고생만 했네.라며 기분 나빠 했습니다. 그때 누군가가 세심하게 배려해서 가까이 가서 손 놔도 괜찮습니다. 거기가 바로 땅바닥입니다.라고 친절하게 설명해줬더라면 쉽게 해결될 일을 아무도 그렇게 해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마치 자신의 일을 다른 사람이 대신해 줄 수 없는 것처럼….
번뇌 망상이라는 것도 장님이 움켜쥐고 있는 손과 같은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놓으면 됩니다. 진정한 생활불교인이 되고자 한다면 번뇌 망상을 쉽게 놓을 수 있는 공부를 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비추어보아야 할 것은 보살이 고달프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이 특별하게 다른데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불보살님처럼 훌륭한 어른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한결같은 모습은 따뜻하고 편안하고 넉넉하고 너그럽고 포근한 마음으로 감싸 안아주고 다독거려주는 그러한 모습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거기에서 고달픈 마음을 내서야 되겠습니까? 또 많은 선지식들을 친히 가까이 하는데 고달픈 마음을 낼 수 있겠습니까? 또 모든 법을 구하는데, 바른 법을 듣는데, 바른 법을 말하는데, 일체중생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그 사람의 잘못된 부분을 바로 잡아 주는데, 낱낱 세계마다 말할 수 없이 말할 수 없는 시간을 함께 지내면서도 더불어 보살의 행을 행하는데 고달픈 마음을 낼 수 있겠습니까? 현재 우리의 삶이 조금 힘들더라도 이처럼 경전의 가르침을 목격하게 되면 이를 배워서 실천하면 됩니다.
보살이 이렇게 고달프지 않는 마음을 가지는 것처럼 우리도 또한 그렇게 하면 됩니다. 우리도 부처님 같이, 우리도 불보살님 같이 고달프지 않는 마음과 세계에 함께 있다는 믿음으로 어디에 가더라도 고달프지 않는 마음으로 다니고, 온갖 부처님의 법을 관찰하고 생각하는데도 고달프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부모형제와 함께 어울려 살고 이웃과 함께 어우러져 살고 도반과 함께 어우러져 사는데, 언제 만나도 기쁘고 좋아야지 고달플 시간이 어디 있겠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고단한 것과 고달픈 것을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은 사대육신을 가지고 있는 한 고단해야 합니다. 고단한 몸은 괜찮습니다. 운동 후에 고단한 것은 괜찮다고 합니다. 집안 살림살이 하면서 고단한 것은 괜찮다고 합니다. 거기에는 우리들이 충분히 제어할 수 있는 에너지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게으르게 사는 것은 고달픈 삶입니다. 현재 자신의 삶에 안주하는 것 또한 고달픈 삶이요, 편안하게 드러누워 있는 것도 고달픈 삶입니다. 고달픈 삶이라는 것은 정신이 병들어가고 있고 황폐화되어 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기도와 수행과 정진의 삶이 육체적으로는 다소 힘들다 하더라도 그것은 고단한 것이지, 고달픈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불자는 절대로, 보살은 절대로, 우리 어버이는 절대로 자식한테 고달픈 마음을 내지 않는 그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도하는 시간만 기도정진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일상생활 자체가 기도요, 정진이요, 수행의 시간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삶이 고단해서 한숨이 나온다면 그냥 한숨만 팍팍 쉬지 말고 거기에 관세음보살님을 실어 보내는 연습을 해보십시오. 거기에 지장보살님을 실어보십시오. 그러면 속이 훨씬 시원해질 것입니다. 한숨만 팍팍 쉬는 것보다 관세음보살님, 지장보살님을 그 호흡에 실어 보내는 것이 훨씬 시원한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삶이 몸에 배인다면 자연히 마음은 따뜻하고, 넉넉하고, 온화하고, 편안하게 바뀌게 됩니다.
모두가 살아가기 힘들다고 하는 요즘이야말로 우리 불자들이 고달프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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