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남결
동국대 윤리문화학과
참으로 안타까운 일들이 잇달아 일어나고 있다. 여섯 사람이나 되는 고귀한 생명을 앗아간 용산참사나 연쇄살인범 강호순에게 영문도 모른 채 희생되었을 수많은 여성들을 생각하면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치밀어 오르는 인간적 분노를 도저히 억제하기 힘들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었기에 우리들은 서로를 죽이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흉악해지고 말았단 말인가? 잘 모르긴 해도 우리사회가 이렇게까지 타락한 배경에는 그동안 오로지‘경쟁에서 이겨야 산다’는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이 여러 부문에서 갈등과 반목을 조장해온 결과가 아닐까라 는 추정을 해 본다.
여기서 우리는 부처님의 생명존중사상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불교만큼 모든 생명들을 소중하게 여기라고 가르치는 종교가 또 어디에 있는가! 이와 같은 사실은 불자가 되는 순간부터 누구나 지키지 않으면 안 될 오계의 첫 번째 계목이‘불살생계’인 것만 봐도 금방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비폭력이나 생명존중 등과 같은 윤리적 가치에 있어서 불교는 말 그대로 지적 소유권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불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겠지만 부처님의 말씀을 모아 놓은 경전들에서는 불살생계의 도덕적 함의를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가령, “스스로 죽이거나 남을 시켜 죽이거나 방편으로 죽이거나 찬탄하여 죽게 하거나 죽이는 것을 보고 기뻐하거나 주문으로 죽이는 그 모든 짓을 하지 말지니… 산 생명을 죽이는 것은 바라이죄”라거나“비구가 고의로 축생의 생명을 끊으면 바일제(波逸提)”라고 꾸짖는 언급 등이 그와 같은 사례들에 속한다. 또한“비구가 벌레 있는 물인 줄 알면서 스스로 진흙에 쏟거나 풀에 쏟거나 사람을 시켜서 쏟으면 바일제”라고 하며“비구가 물에 벌레들이 있는 줄 알면서도 마시면 바일제”라고도 한다. 뿐만 아니라“비구니가 봄, 여름, 겨울, 모든 때에 유행하면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바일제”임을 주지시키고 있으며“살아 있는 풀과 채소 위에 대소변을 보거나 코를 풀거나 침을 뱉지 말지니, 병자를 제외하고는 이를 마땅히 배워야 한다”라고도 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부처님은“길을 가다가 개미, 지렁이, 두꺼비, 기타 작은 벌레를 보더라도 그것들을 피해 멀리 돌아서 가야 한다. 그것은 자비로운 마음으로 중생들을 보호하기 위함”이라고 가르쳤는가 하면, 더 나아가“일체의 농작물, 꽃들과 열매, 초목과 숲을 태워서는 안 되며 파괴해서도 안 된다. 물을 빼지 말아야 하며 식물을 자르거나 베어서는 안 된다.
그 모든 것에는 다 생명을 가진 짐승들과 곤충들이 살고 있으므로 그 죄 없는 뭇 생명들을 상해하거나 그 목숨을 해치게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라는 점을 거듭 상기시키고 있다.
이런 대목들에서 우리는 부처님이 인간을 포함한 갖가지 종류의 크고 작은 생명체들을 가능하면 죽이지 말라고 당부했던 이유를 곰곰이 되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살고 있는가?
유감스럽게도 이러한 물음에 대한 불자 개인들의 솔직한 대답은 아마도 부정적일 것으로 보인다. 단적인 예로 육식이나 낙태문제만 하더라도 대부분의 불자들은 그렇게 자유롭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사실과 관련하여 영국의 불교윤리학자 데미언 키온은 일반적으로“불교는 자비롭고 인간적인 도덕가치 때문에 동서양을 막론하고 많은관심과 광범위한 존중을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의 윤리적 원칙이 생명윤리와 같은 현대사회의 도 덕적 갈등상황 속에서 어떻게 일관된 방식으로 적용될 수 있는 가를 보여주는 데 실패했다”고 적절하게 꼬집은 바 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엄청난 어휘력과 무한한 표현방식을 간직하고 있는 하나의 위대한 언어에 비유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지금까지 불교라는 언어는 문법(교학이론)의 형태로만 이야기되어 왔을 뿐 일상생활에서 꼭 필요한 언어능력, 곧 회화 구사력(응용윤리)으로 사용된 적은 거의 없었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그 결과 불교는 다른 이웃 종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고답적이고 어렵게 느껴진다는 인상을 주게 되었다고 본다. 이와 같은 일련의 흐름들은 생명존중사상을 다루는 불교학계의 접근방법이나 연구태도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즉, 불교학적 관점에서의 생명개념 자체만 지루하게 논의하다 보니 정작 부처님이 강조하신 불살생정신은 어디론가 슬그머니 사라지고 우리들에게 당장 필요한 구체적 행위원리는 아무것도 제시하지 못하고 말았던 것이다.
얼마 전부터 생명과 관련된 윤리적 쟁점들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 같다. 법원이 이른바‘존엄사’를 인정한 후 찬반 입장이 극명하게 갈리고 있는 안락사 논쟁이나 연쇄살인을 계기로 다시 거론되기 시작한 사형제도의 존폐를 둘러싼 의견 대립 등이 바로 그와 같은 우리 사회의 분위기를 전해 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안들에 대한 불교의 입장은 언제나 하나의 대원칙 하에서 도출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것은 어떤 경우에도 불교는‘생명을 존중한다’는 기본적인 가르침을 위반할 수 없다는 행위원리이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해진다. 다시 말해 존엄사나 사형제도에 대해 불교는 결코 찬성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존엄사는 아름다운 명칭에도 불구하고 세상과의 자연스러운 인연을 마감하는 절차인 죽음을 인위적으로 앞당기는 행위에 불과 하며, 사형제도 역시 국가 권력이라는 이름으로 또 다른 생명을 빼앗는 행위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불교적 지혜는 존엄사와 사형제를 거부하는 방식으로 발휘되어야 마땅 하다고 본다. 따라서 존엄사보다는 통증치료와 편안한 죽음을 준비시켜주는 호스피스의 결합을 유도하는 방향으로, 그리고 사형제도는 살아 있는 동안 자기가 지은 죄를 참회하는 정신적 고통이 얼마나 큰가를 직접 경험하게 하는 것으로 얼마든지 대체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현대사회에 부응할 수 있는 불교적 덕목들을 적극적으로 개발하는 것이야말로 이 살벌한 세상에 던져진 우리 불자들의 시대적 과제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