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주 / 북 에디터, 자유기고가
새벽 4시….
제법 떨어진 농막에서 쇠죽을 끓이기 위해 어머니는 부산하게 채비를 하십니다.
“아니, 이 새벽에 어디 가? 설날인데….”
“쇠죽 끓이러.”
“아니, 여즉 소 먹여?”
“맨날, 느그 아배가 먹였는데, 오늘 차례 지내러 큰집 가셨잖아.”
“….”
“나는 밥 먹었나 안 물어봐도 소는 밥 먹였나 꼭 물어보니….”
그러고 보면, 아버지의 동물사랑은 유별납니다. 귀성길 버스를 타기 전날, 부러 시간을 내어 관람한 영화 ‘워낭소리’의 할아버지처럼 말입니다.
지하철을 타고 출근하는 어느 날, 선반에 있는 무가지에서 영화 관련 기사 하나를 보았습니다. 기사 속 노인은 투박한 손 가득, 워낭을 담고 있습니다. 40살 먹은 소와 80살 노인이 40년을 서로 의지하며 인생사 굽이굽이 비척대며 살아온 이야기를 ‘다큐멘터리’로 찍었다는 기사와 함께….
며칠인가 벼르다, 영화 속 할아버지의 얼마 남지 않은 치아처럼 듬성듬성 자리를 채운 영화관 좌석에 몸을 기대고 영화를 봅니다.
첫 장면부터 멍멍합니다.
다 낡은 수레처럼 허물어져가는 육신의 노부부가 산사의 긴 계단을 버겁게 올라가, 법당에 삼배 하고 탑전에도 삼배를 합니다.
“소가 많이 생각나재요?”
할머니가 할아버지에게, ‘떠나버린 소’를 묻습니다.
화면은 다시, 아직 소가 살아 있던 때를 보여주며, 꾸벅꾸벅 졸고 있는 노인을 수레에 태운 소 한 마리가 신작로를 걷습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소만큼이나 오래 묵은 낡은 라디오에서 옛 민요가 흘러나옵니다. 수레를 타고 가는 노인도 서두르지 않고, 졸음에 겨운 노인을 태우고 가는 소 또한 서두르지 않습니다. 그들이 걸어온 세월의 깊이만큼, 소의 뼈마디에 붙어 있는 가죽의 윤곽이 뚜렷할 따름입니다.
영화는 노인과 소와, 노인과 노인의 평생 반려자의 일상을 덤덤히 쫓아갑니다. 노인이 밥을 먹는 모습, 꼴을 베는 모습, 힘겨운 들일을 하는 모습, 나들이옷을 입고 신작로로 나가는 모습 등등….
그 모든 장면에서 이제는 희유한 ‘사람과 또 다른 생명’이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오로지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는’그 어떤 것이 아닌, 사람과 소통하며 서로 도우는 존재로 존재하던 ‘그 시절’을 영화는 담담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고대 인도의 후기 베다 시대는 제사를 지내기 위해 많은 암소를 도살하였습니다. 중요한 손님이 방문해도 암소를 도축하였습니다. 오죽했으면 그들은 손님을 ‘고그나(goghna, 암소를 죽이는 자)’라 칭했을까요? 그렇게 소를 죽이고 소를 먹었던 인도인들이 언제부터인가 희생제의에 소를 사용하지도 않고, 먹지 않으며, 신성한 존재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대략 기원전 1000년에서 600년 사이, 아리아 인들은 인더스 강을 넘어 지금의 갠지스 강과 야무나 강 사이의 대평원에 정착하며, 목축생활을 접고 농경생활로 향해 갑니다. 이 시기, 그들은 소를 이용하여 쟁기질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우유를 얻고, 가죽을 얻고, 희생제의에 ‘제물’로 사용하던 소의 힘이 ‘농경’에 도입되며, 토지의 생산력은 비약적으로 증대되었습니다. 소를 이끌고 경작할 수 있는 모든 지역이 개발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리안들의 강역은 남쪽 지방까지 뻗어 나갔고, 마침내 소가 가진 ‘생산력’을 숭상하며, 소를 신성시 하고 아낀다는 ‘인도의 신화’가 탄생하게 됩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할아버지는 고대의 인도인처럼 소와 함께 밭을 갈고 소와 함께 짐을 나릅니다. 이제는 ‘늙음’이라는 고통을 안고, 지게 가득 땔감을 짊어지고 가는 할아버지나, 할아버지 옆에서 수레 가득 땔감을 싣고 가는 소의 걸음은 여전히 늙고 힘없는 육신이지만, 둘이 나란히 걸으니, 의지가 되고 힘이 됩니다.
농약 치는 논을 지나면 부러 소의 입에 ‘그물망’을 씌우고, 행여나 당신이 경작하는 전답의 풀을 소가 먹다 해를 입을까 농약도 치지 않습니다. 바로 옆 논이 트랙터나 콤바인으로 경작을 하고 ‘조금 더 쉽게 농사를 짓고, 조금 더 많은 수확을 위해’ 농약을 치더라도, 할아버지는 조금 덜 얻고 조금 더디 갈망정, 제초제 대신 묵묵히 풀을 뽑습니다.
영화 말미, 할아버지는 소의 목에 거의 평생 매달려 있던 ‘워낭’을 떼어냅니다. 소의 코뚜레를 떼어냅니다. 그렇게 할아버지와 소가 교감하는 매체-코뚜레, 워낭-가 소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조금 후, 소의 목이 땅 아래로 내려앉습니다. 마침내 소가 저 세상으로 간 것입니다. 할아버지의 반려이자 도반이 저 세상으로 간 것입니다.
화면 내내 영화는 해설자를 따로 두지 않고, 할머니의 ‘지청구’로 상황을 설명합니다.
할아버지의 인생이기도 한 할머니의 지청구는 “너 보다 우리가 먼저 갈 줄 알았는데….”, 소를 보내면서 말을 잇지 못합니다. 오랜 시간, 소와 할머니는 경쟁자였지만 또 한편으로 할아버지의 동반자라는 공통점을 가졌으니, 할머니의 눈물은 할아버지의 반려-소를 떠나보내는 그 어떤 ‘슬픔’보다 할머니의 동무이자, 애환을 함께 나눴던 ‘동무’를 보내는 슬픔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시, 시골 집 소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어머니는 새로 온 소에게 뿔이 없다는 것이 못내 못마땅합니다. 어찌어찌하여 도짓소로 들여왔는데, 소를 내주는 측에서 ‘대량관리’를 하려면 ‘뿔이 없어야 편하다’며 그만, 소의 뿔을 없애 버렸답니다. 그것도 소의 뿔에다 아주 몹쓸 약품 처리를 하였다는….
그런 소를 보며, “야, 소가 뿔이 있어야지. 커다아란 게, 뿔이 없으니, 소 같지가 않다야.”아쉬워 합니다.
우걱뿔이만큼은 아니라도, 이쁘장 하니 뿔 있는 소의 모습은 지극히 평화롭고 당연합니다. 풀을 먹고 되새김질 하는 소의 모습도 지극히 당연하며, 생명을 보듬으며 농사를 짓던 농부의 모습과, 농부와 함께 밭을 갈던 소의 모습 또한 지극히 당연한 이치인데….
언제부터인가 당연함이 전혀 당연하지 않은 이 세상에서, 나와 함께 가는 동반자를 배려하며 소를 몰고 가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더욱 와 닿습니다.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