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경후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
선조선의 불교가 역사상 유래 없는 탄압과 소외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청허 휴정과 송운 유정의 기여가 있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조선건국 이후 불교계는 토지와 노비가 국가로 귀속되고, 출가를 제한하고 부녀자들로 하여금 절에 가는 것을 금지하는 등 지속적인 불교탄압정책으로 인하여 겨우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었다.
한편 임진왜란이라는 전대미문의 전란은 조선의 역사를 그 이전과 이후로 구분 지을 수 있을 정도로 큰 변화를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청허와 송운의 전쟁 참여와 극복을 위한 노력은 그동안 부정적 인식과 소홀하게 대접받고 있던 불교계의 사회적 위상을 긍정적으로 향상시키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두 스님의 활약으로 조선불교계는 사회경제적 위상뿐만 아니라 불교계 자체의 정통성과 체계를 다시 확립하는 변화를 가져오게 하였다.
스님의 법명은 유정惟政이고, 자는 이환離幻, 호는 사명四溟·종봉鍾峰·송운松雲이다. 그는 1544년에 밀양군 무안면 고라리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풍천豊川 임씨任氏로, 증조부 효곤孝昆은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장악원정(掌樂院正, 정3품)에 이르렀다. 할아버지 종원宗元은 유학幼學이며, 아버지 수성守成은 교생校生으로 달성 서씨 가문에 장가 들었다. 스님의 비문과 행적을 살펴보면 증조부는 일찍이 대구 부사를 지낸 인연으로 조부 대에 집을 밀양으로 이사하였다고 하니, 그 전까지는 아마도 서울에 살다가 낙향한 것 같다.
스님은 7세에 조부祖父에게 역사를 배웠고, 13세(1559)에는 황여헌黃汝獻으로부터 『맹자』를 배우다가 어느 날 저녁 책을 덮고 탄식하면서 말하되, “세상의 학문은 미천하고 고루固陋하여 세상의 인연을 번거롭게 하는 것이니, 어찌 불교의 무루학설無漏學說을 배우는 것만 같겠는가!” 하고 곧 직지사直指寺로 가서 신묵화상信.和尙을 은사로 하여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 처음부터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을 열람하다가 얼마 되지 않아 이미 오묘한 종지宗旨를 깨달았으므로 여러 노숙老宿들이 모두 찾아와서 배우고 질문하였다.
18세 되던 1561년에는 선과禪科에 응시하여 장원급제한 후 봉은사에 머물며 불교 경전을 부지런히 읽었다. 20여 세에 동년배들로 갑회甲會를 조직하고 갑회문을 지어 나라와 백성을 위해 기도하며 건전한 승려 생활을 실행하자는 뜻을 다짐하였다. 이 무렵 사암 박순, 아계 이산해, 재봉 고경명, 고죽 최경창, 자순 임제 등 사대부 문인들과 시를 지으며 교유하였다. 한번은 허균의 형 허봉과 중국의 문장가 한유韓愈의 글 한 편을 외우는 내기에 이겨 책 한 권을 받았다. 기대승奇大升이 이야기를 듣고 “재주만 믿고 스스로 만족하면 학문에 발전은 없을 것”이라 하니, 이 말을 새겨듣고 공부에 열중하였으며, 소재 노수신에게서 많은 책을 빌려 읽는 이외에도 사자(四子, 공자·맹자·증자·자사)와 이백李白, 두보杜甫의 시를 배워 일취월장하였다.
33세 되던 해에는 직지사 주지를 그만두고 묘향산 보현사로 들어가서 비로소 청허淸虛의 제자가 되었다. 청허는 심지법문心地法門을 제시하여 바로 성종性宗의 도리를 전수하므로 스님은 크게 깨닫고 곧 언어문자를 모두 쓸어버렸다. 또한 종래에 말 좋아하던 문인이나 학자들과 교류하여 희롱하던 모든 것을 참회하는 마음으로 정리하고 3년 동안 고행정진苦行精進하여 정법正法의 골수를 얻었다. 청허스님을 하직하고 풍악산楓岳山으로 가서 보덕사報德寺에서 3년간 정진한 후, 남쪽으로 발길을 돌려 팔공산八公山·청량산淸凉山·태백산太白山 등을 두루 순례하였다.
임진년(1592, 선조 25) 여름에 왜적이 영동嶺東에 침입하여 유점사楡岾寺까지 몰려왔다. 이때 혹자가 말하기를, “우리나라 사람이 길잡이 노릇을 한다.”라고 하니, 대사가 말하기를, “왜적이라면 글로 타이르기 어렵겠지만, 그래도 우리나라 사람이 있으면 잘 일러서 깨우칠 수 있겠다.”라고 하고는, 10여 명의 문도를 이끌고 곧장 산문山門으로 들어가니 왜적들이 문도를 모두 결박하였다. 대사가 홀로 중당中堂에 이르니, 왜적의 두목이 대사가 비범한 것을 알고는 빈주賓主의 예로 대하면서 문도를 풀어 주었다.
대사가 글로 써서 문답을 하니 왜적들이 공경하며 심복하고는 깊은 산속을 가리키며 보내 주었다.
허균이 쓴 스님의 비문가운데 일부분이다. 1592년(49세) 6월에 금강산 유점사에 일본 삼길성森吉成의 부대원들이 침입하여 스님들을 결박하고 보물을 강요했다. 대사는 밖에서 이 소식을 듣고 태연하게 사찰 대웅전으로 들어가 대장과의 필담으로 불교의 자비를 설하였다. 이에 들은 승려들을 풀어 주면서 팻말에 “이 절에는 도승道僧이 있으니 다시는 들어오지 말라.”라고 게시한 다음 물러갔다. 수일 뒤 다시 주둔 본부가 있는 고성高城으로 내려가 적장에게 “인명을 해하지 말라.”라고 설득하니, 그들은 계를 받들고 3일 동안 예우한 뒤 전송하였다. 이로써 영동의 9개 군郡이 무사하였다고 한다.
전란이 시작된 이후 스님은 청허의 휘하에서 의승대장에 임명되어 2천 명의 승군을 거느리고 평양성에 웅거한 왜군을 교란하면서 후방과의 연락을 차단하는 전과를 올렸으며, 마침내 1593년(50세) 초 조·명 연합군은 평양성을 공격하여 탈환하였다.
이듬해인 1594년 4월부터는 서생포 왜성을 찾아 가등청정과 회담을 진행했고, 조정에 「갑오년 4월에 청정淸正의 진영에 들어가서 정탐한 기록」 및 「별도로 왜적의 정세를 보고한 글」을 올리기도 하였다. 9월에는 상경하여 두 차례의 정탐과 회담 내용을 토대로 올린 상소문에서 제반 개혁안을 펼쳤다.
대사가 돌아오자 성상이 불러 대궐에 오게 하여 일의 정황을 낱낱이 묻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옛날에 유병충劉秉忠과 요광효姚廣孝가 모두 산인山人으로서 국가에 공로가 있었다. 그대가 만약 머리를 기르고 환속한다면 사방 백 리가 되는 지역을 맡기는 것과 삼군三軍의 지휘를 맡기는 것도 불가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였다. 그러나 대사는 감히 할 수 없다고 사양하였다. 성상 또한 대사의 뜻을 꺾지 않고 특별히 무기고에 있는 갑옷과 무기를 주면서 남은 왜적을 공격하게 하였다.
선조가 스님을 불러 공적을 치하하고 “만약 환속을 한다면, 응당 백리百里의 소임을 맡길 것이요, 삼군三軍의 장수를 제수할 것이다.”라고 권유한 내용이다. 그러나 스님은 이를 사양하였다. 스님은 그해 11월에 정3품 절충장군첨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이후 스님은 강화회담에 참여하였으며 전란 이후까지 그 활동은 계속되었다.
급기야 가강家康을 만나서 양국의 생령이 오래도록 도탄에 빠진 정상을 자세히 말하였다. 가강도 불교에 귀의한 자였으므로, 대사의 말을 듣고는 신심信心을 내어 부처님처럼 공경하였다. 그리하여 협약을 제대로 맺고 귀국하게 되었는데, 그 기회에 포로로 잡혀간 남녀 1천5백 명을 한꺼번에 데려오면서 스스로 곡식을 마련하여 그들을 먹이며 귀환하였다.
전란이 끝난 1604년의 일이다. 조선사절단으로 일본에 간 스님이 전란 당시 포로로 잡혀 간 조선인 1,500명을 49척의 배로 귀국시킨 것이다. 경비의 상당 부분은 대사가 지참한 노자와 일본에서 받은 적지 않은 예물로써 충당하였다. 1610년(67세) 8월 26일 여러 제자들을 불러 모으고 드디어 작별을 고하고 적멸에 드니, 광해군光海君은 전교를 내려 조상하고 장례에 쓸 물목을 지급하게 하였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