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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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암법견

기암법견(奇巖 法堅, 1552~1634)


極樂堂前滿月容 극락당전만월용
玉毫金相照.空 옥호금상조허공
若能一念稱名號 약능일념칭명호
頃刻圓成無量功 경각원성무량공


극락당 앞에 달님의 모습이 가득
옥호의 금상이 허공을 비추네.
만약 일념으로 명호를 제대로 칭한다면
무량한 공덕을 경각간에 원만하게 이루리.


기암 법견 스님이 읊은 「염불관念佛觀」이라는 시이다. 절집에서 아침 종송鍾頌이나 각종 재의식齋儀式 때마다 염송하는 장엄염불의 일부로 들어가 있다. 한마음으로 염불하면 비록 순식간이라도 무량한 공덕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스님은 전라북도 부안扶安출신이다. 아버지는 부안 김씨 억세(金億世)이고, 어머니 이씨가 낮잠을 자다가 기이한 스님을 보고는 임신하고 스님을 낳았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자애롭고 참을성이 있었다고 한다. 14세에는 경서經書에 통달하고 사서史書와 제자백가를 섭렵하여 글 뜻을 깨우쳤다는데, 그 고을에서 글재주를 시험하면 늘 이겼지만, 공부를 그만두고 입산하여 뇌묵당 처영(雷默 處英, 생몰년 미상) 스님에게 출가하였다.
처영 스님은 임진왜란 당시 1,000명의 승병을 모집하여 권율權慄과 함께 금산 배고개전투(梨峙戰鬪)에 참여하여 크게 전공을 세운 분이다. 이 공로가 인정되어 1794년(정조 18)에는 왕명으로 휴정·유정惟政·처영 세 분의 진영眞影을 해남 대흥사大興寺의 표충사表忠祠와 묘향산 수충사酬忠祠에 봉안하고, 관청에서 봄 가을로 제관祭官과 제수祭需를 보내어 향사享祀하게 하였다.
출가 이후 기암 스님은 내전(內典, 불교경전)에 널리 관통하고, 제자서諸子書와 역사서를 비롯한 여러 종류의 서적을 두루 섭렵하여 풍부한 지식을 소유하였다. 당시 사방의 학자들이 선비와 스님을 막론하고 물 흐르듯 몰려들었다. 그러나 길게 탄식하면서 “이것은 세간의 법이지 출세간의 법이 아니라”고 하고는 청허 휴정의 회상으로 가 불법佛法을 물었고, 스승은 정수리에 침을 놓듯 일깨워 주었다. 이에 깨달은 뜻을 시로 지어 올리니 한마디 말에 딱 들어맞았다고 한다.
이후 스님은 사명 유정 스님의 설법자리에 참석하여 “참 진리를 발휘하였는데 가죽을 벗겨 뼈를 찾아내고 모래 속을 뒤져 구슬을 얻어내듯이 하였다.”고 한다. 불성을 살펴 본분사를 해결하신 것이다. 스님의 비문을 쓴 동주 이민구(東州 李敏求, 1589~1670)는 “무량세계의 억만 중생 가운데 용맹정진하는 일개 남아”라고 칭송하였다.
장성長城의 입암 산성笠巖山城은 험준한 기암절벽으로 적을 피하는 데 있어서 첫째가는 곳이다. 지금 성 쌓는 것을 거의 마치고 또 사찰을 세워 영구한 계책으로 삼고자 현감 이귀李貴가 법견法堅 스님을 불러 그 일을 주관토록 하였다. 만약 조정에서 부총섭副總攝이라는 관교官敎를 성급成給해주고 또 인자印子를 내려 권장한다면 공을 쉽게 이룰 수 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2년 뒤의 일이다. 1594년(선조 27) 2월에 장성의 입암산성을 스님에게 맡겨 절을 세우고 방어의 임무를 주관하게 하였다. 또한 1629년(인조 7)에는 일본의 통신사로 신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도 하였다. 즉 “유정惟政의 제자 중에 법견法堅이라는 사람이 있고 태능太能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두 사람이 모두 글을 잘 짓고 시를 잘하므로 이 사람들을 왜로 들여보내어, 한편으로는 통신사通信使로 삼고 한편으로는 탐지할 계책으로 삼는다면 모든 일이 정직하여 반드시 일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조선 조정은 통신사로 탁월한 재주를 지녔던 사명당이 입적하고 난 이후 기암스님을 소요 태능(逍遙 太能, 1562~1649) 스님과 함께 일본 사정을 엿보게 하고자 한 것이다.
스님은 이후 금강산 백련암白蓮庵에 머물렀다. 어렸을 때 스님을 호남에서 만난 적이 있었던 택당 이식(澤堂 李植, 1584~1647)은 스님을 금강산 유점사에서 다시 만났다. 스님은 택당에게


“이 산에 머문 지가 삼십여 년이요, 이 산골짜기를 벗어나지 않은 지가 또 이십 년 가까이 된다”고 하였다. 당시 스님의 나이가 81세라고 했으니 50 초반에 금강산으로 들어온 것이다.
스님을 다시 본 택당은 “이목耳目이 아직 총명聰明한 데다 옛사람과 같은 순후淳厚한 기상이 또 넘쳐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선禪에 관한 뜻을 이야기할 적에는 왕왕 기발奇拔한 면모가 엿보이기도 했다.”고 했다.
공부가 무르익은 것일까. 택당이 어렸을 때 스님을 호남에서 만났을 때와는 전혀 다른 인상을 안겨 주었다고 한다. 적지 않은 시간 속에서 스님의 삶이 그만큼 수행으로 치열했음을 의미한다.
스님은 백련암白蓮庵에서도 한가하지 않았다. 학식과 덕행을 흠모했던 제자들이 운집했던 모양이다. 스님의 비문은 “스님들 모여드는 모습이 / 목마른 사람이 강으로 달려가는 듯했고 / 물을 실컷 마시듯이 법사의 가르침을 듣고 돌아갔지만 / 강물 마르지 않듯 법사의 가르침은 고갈되지 않았네.”라고 하였다.
전란이 있었고, 말발굽이 지나간 땅에서는 한동안 쌀 한 톨 나지 않았다. 굶어 죽은 사람들도 있었고, 전염병이 돌아 들판에 버려진 시신도 적지 않았다. 살아남는 것만도 기약할 수 없는 어려운 지경이었다. 그 힘겨운 시기에도 당시 스님들은 부처님의 혜명을 이어가기 위해 자신을 채찍질한 것이다. 덕과 학식이 있는 스님이 계시다는 소문만 들어도 천리 길을 멀다 않고 달려갔다. 스님은 제자들의 모든 망념을 끊어 주고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다.


따를지 어길지의 구분은 각기 의리가 있고 의리가 귀결되는 곳에 행동이 달려 있다. 사람이 덧없는 세상을 사는 것은 순식간일 따름이니 하물며 백발이 다 된 사람은 어떻겠습니까. 부자(유몽인)께서는 재상이었으니 어찌 자유로울 수 있겠습니까. 운명이 있는 것이니, 작년에 큰 병을 앓았음에도 요행히 죽지 않은 것은 하늘이 도운 것입니다. 행여 이해하신다면 의리에 따라 행할 뿐입니다.


내가 말하였다.


“오호라! 아아! 저도 알고 있습니다. 저는 이제 늙었으니 세상에 무슨 뜻이 있겠습니까. 마땅히 그대와 더불어 기달산의 여러 암자를 주유하며 여생을 마치고자 합니다.”
위의 글은 조선시대 한성부좌윤, 대사간 등을 역임한 문신이었던 유몽인(柳夢寅, 1559~1623)이 기암 스님에게 조언을 구했을 때 남긴 말씀이다. 즉 유몽인은 광해군 때 인목대비를 폐위시키자는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났을 때 여기에 가담하지 않고 도봉산과 금강산 등에서 은거하며 성안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이 글은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고 화를 피해 금강산을 떠나 급히 서쪽으로 길을 떠나려 할 때 스님에게 조언을 구한 것이다. 스님은 떠날지의 여부는 의리로 구분하며 행동 역시 의리에 귀결된다고 했다. 사람의 명은 하늘에 달렸으니 오직 의리에 따라 처신하라고 당부하였다. 유몽인은 스님의 말씀을 듣고 산을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유몽인은 인조반정이 일어난 해에 죽었다.
기암 법견 스님이 1634년 9월 세납 83세로 입적하시니 다비하여 유점사 서쪽에 사리탑을 만들었다. 다음은 스님이 마지막으로 남기신 임종게臨終偈이다.


打破.空埋日月 타파허공매일월
山河大地一坑藏 산하대지일갱장
病中不病者何去 병중불병자하거
溪水金剛今古聲 계수금강금고성


허공을 쳐부수고 일월을 파묻으며
산하대지를 한 구덩이에 집어넣네.
병중에 병들지 않는 것이 어디로 가랴.
금강의 시냇물 소리 예나 지금이나 같은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