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규탁(연세대 철학과 교수)
1.
범망경에서는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인간이면 누구나 타고나면서 갖추어진, 그런 ‘도덕 감정’에 기초하여 대승 보살의 규범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선 필자가 여기서 말하는 ‘도덕 감정’의 의미를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인간이 살아온 지난 역사를 돌아보면 많은 ‘도덕 규범’이 있습니다. 이런 ‘도덕 규범’은 태어나 살면서 배우게 됩니다. 어릴 때는 부모 등 가족에게서, 좀 더 나이가 들면서 학교에서, 더 성장해서는 사회에서 배우게 됩니다. 부모 자식 사이의 효를 배우고, 형제간의 우애를 배우고, 친구 사이의 우정을, 나아가 직장에서의 예절 등 말입니다. 이런 규범들은 배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번 상상해봅시다. 이런 규범을 원숭이에게 교육하면 원숭이가 그 규범을 실천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절대 불가능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간단하게 대답하면 원숭이에게는 그런 도덕 규범을 배울 수 있는 감정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만 있는 감정, 이를 인정이라고 합니다. 인간의 마음에는 다양한 감정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감정 중에서 가장 근본적인 것, 그것이 바로 ‘도덕 감정’입니다. 사람에게 그게 없으면 사람이라 할 수 없습니다.
‘도덕 감정’이 있어야, 그것을 토대로 그 위에 도덕에 관한 각종 규범을 배워 익혀 몸소 실천할 수 있습니다. ‘도덕 감정’이 없으면, 교육이나 학습을 아무리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도덕 감정’이 태어나면서 자신 속에 저마다 씨앗처럼 갖추어졌고, 성장하면서 일정한 계기를 만나 그 감정이 활성화됩니다. 이는 인간을 이해하는 하나의 관점입니다. 인간관입니다. 인간 본성에 대한 형이상학적 가설인 셈이지요. 저 필자가 보기에 범망경이라는 책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계율 조목들은 이런 도덕 형이상학 위에서, 그 정당성이 보장된다는 해석입니다.
2.
쉽게 말해보겠습니다. 범망경 하권에는 <10중대계重大戒>와 <48경계輕戒>가 차례대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한문으로 알 수 있듯이, 이를 어기면 무거운 죄 10가지, 가벼운 죄 48가지를 범한다는 것니다. 그런데 이게 왜 죄가 될까요? <48경계>의 첫 조목이 “스승과 벗을 공경하라.”입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는가요? 이런 질문에 대해,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렵니까? 이런 질문에 대해 보통 두 가지 방법으로 대답이 가능할 것입니다. 첫째는 그래야 사람다우므로, 둘째는 그래야 세상이 좋아지므로. 첫째로 답하는 사람이 말하는 ‘사람다움’, 이것이 바로 인간에 본래 갖추어진 도덕 감정입니다, 한편, 둘째로 답하는 사람이 말하는 ‘좋아짐’이란 일종의 사회적 약속으로, 그 약속을 지키는 게 모두가 좋기 때문입니다. 첫째건 둘째건 모두 존중받을 만한 도덕에 관한 입장입니다.
범망경에 등장하는 각종 계율은 ‘사람다움’에 근거하여 조목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범망경의 이런 입장은 화엄경 「여래출현품 제37」의 다음과 같은 본문에 그 사상적 근거가 있습니다.
“이상하다, 이상하다. 중생들이 여래의 지혜를 구족하고 있으면서도 어째서 어리석고 미혹하여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는가. 내가 마땅히 성인의 도로 가르쳐서 허망한 생각과 집착을 영원히 여의고 자기의 몸속에서 여래의 광대한 지혜가 부처와 같아서 다름이 없음을 보게 하리라.”
위의 경전 본문에 보다시피 “중생들이 여래의 지혜를 구족”했다고 합니다. 즉, 여래와 똑같은 지혜가 중생들에게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문제는 어리석음과 미혹으로 인해 자신 속에 간직된 지혜를 알지도 보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부처님의 역할이 필요합니다. 자, 그러면 독자 여러분들도 위의 경전 본문에서 부처님의 역할이 무엇인지 해당 문구를 찾아보기 바랍니다.
3.
범망경과 화엄경은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역사적으로 화엄경의 사상을 계승하여 범망경이 만들어집니다. 그런 관계로 도덕 규범의 원천에 관한 입장도 두 경전이 같습니다. 인간 본성 속에 본래 지혜智慧와 덕상德相이 갖추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그런 도덕 감정이 있으므로 깨달아 부처도 될 수 있는 겁니다.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범망경에서는 대승의 보살들이 지키고 실천해야 할 도덕 규범을 크게 네 범위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발심하여 진리의 길로 나아가기 위해 지켜야 할 열 가지 덕목인 ‘10발취심發趣心’, 둘째는 보살의 수행 길을 가는 과정에서 항상 꾸준하게 가꾸어야 하는 열 가지 덕목인 ‘10장양심長養心’, 셋째는 보살도 실천의 길에서 굳건히 지켜가야 할 열 가지 덕목인 ‘10금강심金剛心’, 넷째는 끝내 실천하여 완성해야 할 열 도덕적 경지인 ‘10지(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4.
자, 그러면 첫째 범위에 속하는 열 가지 ‘발취심發趣心’부터 설명해가기로 하겠습니다. 먼저 그 이름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범망경의 경문을 직접 인용하겠습니다.
“여러 부처는 꼭 알아야 한다. ‘굳건한 신인[堅信忍]’ 가운데로 들어가 ‘10가지 발취심[十發趣心]’을 닦아 깨침의 결과로 향한다. 첫째는 사심捨心이며, 둘째는 계심戒心이며, 셋째는 인심忍心이며, 넷째는 진심進心이며, 다섯째는 정심定心이며, 여섯째는 혜심慧心이며, 일곱째는 원심願心이며, 여덟째는 호심護心이며, 아홉째는 희심喜心이며, 열째는 정심頂心이다.”
이 인용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범망경의 법문을 설하는 분이 누구신지 알아두셔야 합니다. 그분은 바로 ‘노사나 부처님’입니다. 법회에서 법문을 설하는 주인공을 불교학의 전문 용어로 ‘설주說主’ 또는 ‘법주法主’ 또는 ‘회주會主’라고 하는데, 범망경의 설주는 노사나 부처님입니다.
범망경은 노사나 부처님께서 수많은 화신化身 부처님께 설법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위의 인용문에 “여러 부처는 꼭 알아야 한다”라고 시작된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절에 다니시면서 “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불”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화신이신데, 그분의 숫자는 ‘백억 곱하기 천’이 됩니다. 왜 이런 숫자가 나오는지는 차차 연재를 진행해가면서 설명하게 될 것입니다.
 위의 인용문에 ‘발취심’이라는 용어의 뜻은 ‘발심하여 도에 도달하겠다는 마음’입니다. 이 ‘발취심’을 열 단계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①사심捨心, ②계심戒心, ③인심忍心, ④진심進心, ⑤정심定心, ⑥혜심慧心, ⑦원심願心, ⑧호심護心, ⑨희심喜心, ⑩정심頂心. 이렇게 열 가지 마음가짐입니다.
한자를 좀 배우신 나이 드신 세대들은 대개의 뜻을 짐작하실 수 있을 겁니다. 우리말의 어원이 한문에서 나온 것이 참 많습니다. 그러니 한문을 좀 아시면 우리말을 더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게다가 전통적으로 한국에 전하는 불경이 한문으로 번역된 것이기 때문에, 불교 용어는 더욱 그렇습니다. 이번 기회에 한자 학습을 다시 시작하는 것은 어떠실지요?
열 가지 마음가짐의 내용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 차례로 살피기로 하고, 이번에는 인용문에 앞에 나오는 “굳건한 신인[堅信忍]”의 뜻을 풀이하면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운허 스님의 불교사전에 따르면, ‘신인(信忍)’이란 ‘가르침을 듣고 믿는 것’이라 합니다. 믿는 대상이 신神이 아니라, 진리를 깨친 이 즉 부처님의 가르침임을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더불어 믿기 위해 먼저 들어야 한다는 것도 말입니다.
보살도를 실천해가면 갈수록 점점 완숙해지는데, 그 단계를 모두 여섯으로 설정하고 있습니다. 그 첫째의 단계가 신인信忍입니다. 참고로, 둘째는 법인法忍, 셋째는 수인修忍, 넷째는 정인正忍, 다섯째는 무구인無垢忍, 여섯째는 일체인一切忍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인忍’이란 범어의 ‘크싼티[kṣânti]’를 번역한 것으로, 자신이 직접 체험하여 이것이구나 하고 확실히 아는 작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