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규탁
연세대 철학과 교수

1.
필자는 2025년 중으로 󰡔범망경梵網經󰡕(상, 하)을 연구 주석으로 번역 출간할 예정이다. 고대의 많은 주석서가 있지만 10중대계重大戒와 48경계輕戒가 실린 <하권>에 주목한 나머지, <상권> 주석은 생략한 경우가 많다. 작금의 국내 독서계에 유통되는 책도 <하권>이다.
그런데 <상권>은 도덕 형이상학의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지위를 가지고 있다. 󰡔범망경󰡕의 계목戒目은 초기불교처럼 수행자 공동체의 생활 속에서 만들어진 규범이 아니다. 10중대계와 48경계는 󰡔화엄경󰡕의 법성교학法性敎學에 근거하여 대승을 추구하는 불자가 지켜야 할 규범을 작가가 새롭게 만든 것이다.
작가는 도덕적 행위의 정당성에 대한 형이상학적 근거를 󰡔범망경󰡕 <상권>에서 마련해 놓고, <하권>에서 그것을 근거로 규범을 추론(推論 Inference)한다. 초기불교의 규약주의(conventionalism) 도덕론과는 발상이 다르다. 가치철학 연구의 소재로는 물론 대승을 추구하는 한국 불자의 윤리 지침으로도 매우 중요한 책이다. 이런 점에서 <상권>은 매우 중요하지만, 우리 독서계에 유통되지 않는 실정이다.
한편, 신라 때, 원측(圓測 613~696)의 제자 태현(太賢 생몰 연대 미상) 스님이 주석한 󰡔범망경고적기梵網經古迹記󰡕에는 상권도 포함되었는데, 스님은 법상종法相宗의 입장에서 본문을 주석했다. 훈고에 많은 도움을 받았지만, 행상行相의 가닥 잡기에 있어 필자와 견해가 같지 않은 부분이 적잖이 있다. 필자는 법성종法性宗 교학에 입각하여 주석하고 해설하는 원고를 퇴고하고 있다. 󰡔범망경󰡕은 󰡔화엄경󰡕을 모방한 경전이니, 그 근원부터 다스려야 한다.

2.
위에서도 말했지만, 󰡔범망경󰡕에 나오는 계목戒目은 사람의 마음에 본바탕을 두고 있다. 서로 약속했기 때문에 지켜야 하는 것과 다르다. 그만큼 어느 사회에서나 언제나 누구에게나 적용이 가능한 보편적 가치라는 것이다. 사람 마음의 본바탕을 한자로 심지心地라고 불경에서는 표현한다. 마음을 대지에 비유했다. 온갖 식물을 비롯하여 이런저런 생명체들이 땅에 의지해서 살아간다. 그래서 땅을 마음에 비유했다. 사람마다 살아가면서 많이 경험해 보았을 것이다. 마음이 없으면, 밖에 있는 것이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범망경󰡕에는 <심지법문>으로 크게 4대목으로 나누어 소개하고 있다. 첫째는 <발심하여 불도를 이루겠다는 마음>, 둘째는 <기르고 키워가려는 마음>, 셋째는 <금강석처럼 굳세게 먹는 마음>, 넷째는 <본마음 자리 드러내기>이다. 한문으로는 ⑴발취심發趣心, ⑵장양심長養心, ⑶금강심金剛心, ⑷지地이다. 인데, 불교 교리 설명이나 큰스님들의 법문에 자주 나오는 용어이니 외워두는 게 편리하다.
지난해부터 연재한 『월간 붓다』에서 둘째의 <기르고 키워가려는 마음> 10가지 즉, ①자심慈心, ②비심悲心, ③희심喜心, ④사심捨心, ⑤시심施心, ⑥호어심好語心, ⑦익심益心, ⑧동심同心, ⑨정심定心, ⑩혜심慧心, 이 중에서 네 번째 ④사심捨心까지는 설명을 마쳤다. 이번 호에서는 ⑤시심施心 즉, <베푸는 마음>을 설명하려 한다. 먼저, 󰡔범망경󰡕의 해당 본문을 아래에 인용한다.

불자야, ‘베푸는 마음(施心)’이란 일체의 모든 중생에게 ‘베푸는 마음’을 펼치는 것이다. 몸으로 베풀고, 입으로 베풀고, 마음으로 베풀고, 재물로 베풀고, 진리로 베풀어, 일체중생을 가르치고 인도한다. 안으로는 나의 육신이나, 밖으로는 나의 모든 재물인 나라와 읍성 남자와 여자 전답과 가옥이 모두 진여眞如 모습 그대로이다. 나아가서는 재물도, 받는 자도 베푸는 자도 실재한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또한 안으로는 (나의 육신과) 밖으로는 (나의 재산이) 늘어남도 줄어듦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무심하게 베풀어서 진리에 통달하고 보시행을 실시하여 일체 갖가지 방식으로 지금 실천한다.

인용문을 보면 그리 어려운 내용은 없다. 실천이 어려울 뿐이다. 그래도 내용을 좀 더 설명하면, 신·구·의 3업으로 남에게 베풀라고 한다. 그만큼 불교에서는 몸으로 짖는 업이며, 말로 짖는 업이며, 마음으로 짖는 업을 경계하고 있다. 착한 일도 3업으로 하는 것이고 악한 일도 3업으로 하는 것이다. 3업을 단속하는 일은 참으로 중요하다.
베푸는 내용은 우선 재물을 들고 있다. 남에게 음식이나 옷이나 나아가서는 의식주에 필요한 물자나 비용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와 함께 불교의 가르침을 전해주는 법 보시도 중요한 덕목이다. 여기에서 불교적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점이 있는데, 그것은 티를 내지 말로 무심하게 베풀라는 것이다. 남에게 베풀기도 어렵지만, 띠 없이 하는 일은 참으로 어렵다. 우리 불자들은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과연 나는 대승의 불자라고 생각하면서 얼마나 베풀고 사는지?

3.
이렇게 남에게 베푸는 <시심施心> 다음, 󰡔범망경󰡕에서는 <호어심好語心>을 들고 있다. <좋은 말하기>이다. 󰡔범망경󰡕의 본문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불자야, ‘좋은 말하는 마음(好語心)’이란, 진여 자체의 본성(體性)에 갖추어진 ‘진실을 잘 설명하는 삼매(愛語三昧)’의 상태에 들어가서, 제일의제의 법어法語와 의어義語와 일체의 실어實語로 일어一語에 모두 순응하여, 모든 중생의 마음을 조화시켜서 진심嗔心을 없애고 다툼을 없애는 것이다. ‘일체가 공인 줄을 알아서 체득되는 지혜(一切法空智)’는 인연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면서도, 그것은 남을 어여삐 여기는 마음을 낳는다. (그것은 위로는) 부처님의 뜻을 따르고, (아래로는) 모든 타인에게 수순하여, 거룩한 법어로 모든 중생을 가르치며, 항상 이와 같은 마음을 실천하여 선근을 일으킨다.

약간의 설명을 보탠다. 불교적 진리에 맞는 말을 ‘제일의제의 법어’라 했다. ‘제일의제’란 용어가 좀 어려울 수 있다. 가장 궁극적인 진리라는 뜻이다. 󰡔범망경󰡕의 내용에 따라면 일체를 공한 것으로 보는 것을 말한다. 모든 것이 조건 속에서 생긴 것이니 지나치게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모든 것이 인연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남에게 좋은 말을 하라는 것이다.
의어義語는 정의로운 말이며, 실어實語는 진실한 말이고, 일어一語는 한결같은 말이다. 이곳에서도, 󰡔화엄경󰡕에서도 강조하는 덕목으로 화내지 말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한번 화내는 것으로 수많은 복과 공덕이 사라진다고 한다.

4.
다음으로는 <익심益心>인데, 타인에게 이익이 되는 일을 하라는 것이다. 물질적인 이익은 물론 상대가 도덕적으로 잘 살아갈 수 있도록 도우라는 말이다.

불자야, ‘중생에게 이익을 주려는 마음(利益心)’이란, 중생에게 이익을 주고자 할 때는 ‘진실한 지혜 자체의 본성(實智體性)에 입각하여 ‘방편 지혜의 도(智道)’를 널리 행하는 것이다. 일체의 밝은 법문을 모으고, 관행觀行과 ‘일곱 가지 재물’을 모아, 앞에 있는 사람에게 이익을 얻게 하기 위하여 (원력으로) 육체와 목숨을 받아 이익삼매利益三昧에 들어가기도 하며, 일체의 몸과, 일체의 입과, 일체의 뜻을 나타내어 3천대천세계를 진동시킨다. 일체의 행위와 작업이 남들을 법종法種과 공종空種과 도종道種 속으로 들어가 저들이 이익을 얻고 즐거움을 얻게 하려고 하는 것이다. (서원에 따라 자신의) 형체를 6도에 나타내되 무량한 괴로운 일을 근심하지 않고 그저 남들을 도와 이롭게 한다.

위의 본문에 나오는 ‘일곱 가지 재물’은 첫째는 남과 사귐에 신뢰 있게 행동하는 것이고, 둘째는 꾸준하게 수행하는 것이고, 셋째는 계율을 잘 지키는 것이고, 넷째는 자신과 남에게 부끄러워할 줄 아는 마음을 갖는 것이고, 다섯째는 불교의 가르침을 항상 듣는 것이고, 여섯째는 마음을 항상 평정하게 갖는 것이고, 일곱째는 선정의 지혜를 갖추는 것이다.
내용을 읽어보면 실천이 어렵지 말 자체가 어렵지는 않다. 다만 여기에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점은, 이런 도덕이 모두 우리 인간의 본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는 점이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무명 번뇌 때문에 본마음을 잘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세상살이가 힘들다 보니 이런 양심 저런 마음이 가려져서 그렇지, 본마음은 누구나 다 같다는 것이다. 󰡔범망경󰡕의 교리는 이렇게 인간들의 심지心地에 입각하여, 저마다 처한 자리에서 도덕적으로 생활하라는 것이다. 그래와 나와 남이 더불어 행복해진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