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범
숲해설가
도시에 사는 현대인이 숲을 찾으려면 적어도 몇 시간 운전하는 수고를 해야 한다. 숲은 더 말할 나위 없이 우리에게 많은 것을 선사하지만 그만큼 접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많은 도시인들은 가까이에 있는 도시 숲을 갈망한다.
창경궁은 이러한 필요에 가장 적절한 해답이다.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창경궁은 벚꽃놀이의 명소로 알려진 곳이다. 일제는 1909년 조선왕조의 궁궐을 훼손하기 위해 창경궁에 동물원과 대온실 그리고 춘당지를 만들고 벚나무를 대대적으로 심었다. 이름도 창경원으로 바꾸고 유원지로 만들었다. 이후 창경궁은 역설적이게도 단골 가족 나들이와 수학여행의 명소가 되었다.
1984년에 들어서야 창경궁 복원은 시작된다. 동물원을 지금의 경기도 과천시 서울대공원으로 이전하고 창경원에 무수히 많이 식재되었던 벚나무들을 뽑아내어 지금 여의도 국회의사당 주변 윤중로로 옮겼다. 그 자리에 한반도 중부지방 대표 수종을 심었으니 슬픈 역사를 간직한 창경궁은 비로소 도심 가까이에서 다양한 나무들을 쉽게 만날 수 있는 지금의 훌륭한 도시 숲으로 재탄생했다.
새로 심은 나무로 인해 5대 궁궐 중에서 나무 종류가 가장 많다. 최근 조사에 의하면 창경궁에는 교목 95종 5,789그루, 관목 78종 48,879그루로 약 55,000그루의 나무가 있다. 수종이 다양하여 사계절 모두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한반도에만 고유하게 존재하는 1종 1속의 희귀식물인 미선나무도 창경궁에서 만날 수 있다.
창경궁은 창덕궁과 합쳐서 동궐이라고 한다. 19세기 초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동궐도》라는 상세한 궁궐 배치 그림이 남아 있는데 2백여 년 전에는 궁궐에 어떤 나무를 심고 가꾸었는지를 짐작하기에 모자람이 없는 귀중한 자료다. 《동궐도》와 비교하면서 현재의 창경궁을 살펴보는 것도 매우 흥미로운 공부거리다.
봄이면 창경궁 곳곳에서 소나무 사이사이에 갓 잎이 피기 시작하여 길게 늘어진 버들이 유난히 눈에 띈다. 옥천교 주변은 형형색색의 꽃으로 만개한 홍매화, 살구나무, 앵도나무, 자두나무로 별천지가 된다. 궐내각사 방향과 춘당지 주변에는 철쭉, 진달래, 백당나무, 미선나무, 히어리, 황매화 등으로 어느 유명 공원 부럽지 않은 아름다움을 연출한다.
여름이면 회화나무와 느티나무의 무성한 잎들과 배롱나무의 화려한 꽃들로 이 또한 장관이다. 창경궁은 가을 단풍 명소로도 부족함이 없다. 창경궁을 복원하면서 단풍나무를 일부러 많이 심어 궁궐 단풍의 백미다. 단풍 드는 시기가 다른 곳보다 조금 늦어 11월 중순을 넘겨야 절정을 이룬다. 겨울에는 눈 덮인 춘당지 주변에서 호젓하게 한국 정원의 단아한 아름다움을 느끼기에 좋다.
이렇듯 창경궁 숲은 사계절 내내 우리들 가까이에서 자연의 건강과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제대로 느껴보려면 계절을 달리하여 적어도 1년에 5회 이상 방문하여 변화를 느껴보는 것을 추천한다.
창경궁 숲에는 1984년 이후 새로 심어진 나무 외에도 500년 이상 된 느티나무와 회회나무, 300년 이상 된 주목과, 황철나무 그리고 자주 접하기 힘든 백송 등 조선 역사와 함께한 오래된 나무들이 많다.
이중 대표적인 관람 포인트를 몇 가지 소개하면 선인문 주변에 기이한 형태로 자라고 있는 회화나무다. 이 나무는 400년 이상 된 나무로, 1762년 임오화변壬午禍變 당시 뒤주에 갇혀 8일간의 무더위 속에서 죽어간 사도세자와의 일화로 유명하다. 아버지 영조에 의해 죽임을 당한 사도세자의 한이 나무의 형태를 지금처럼 비틀게 했다는 것이다. 기형의 회화나무는 사도세자의 주검이 나간 선인문 주변에 있으니 호사가들의 소재가 되기에 충분해 보인다.
궐내각사 초입에 있는 500년 이상 된 또 다른 회화나무도 흥미롭다. 원래 회화나무는 궁궐의 권위를 상징하는 나무다. 그 기원은 주나라 때 삼괴구극三槐九棘이라 하여 조정의 외조에 세 그루의 회화나무를 심고 3정승에 해당되는 삼공이 이에 마주보고 앉았다는 주례에서 기원한다. 또 좌우에 각각 아홉 그루의 대추나무를 심어 고관들이 둘러앉았다고 한다.
창경궁 궐내각사 초입의 회화나무는 긴 세월을 보여주듯 어른 세네 사람이 들어가도 될 정도로 속을 비우고 있다. 그럼에도 신기하게도 웅장한 자태로 창경궁 대표 수종으로 위풍이 당당하다. 자신의 속을 비웠기에 큰 키를 버티고 서 있는 회화나무를 보면서 비움의 철학을 생각해 본다.
또 다른 나무는 7, 8월에 한창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배롱나무다. 회화나무와 마주보고 있다. 아름다운 배롱나무의 명소로 알려진 담양 명옥헌, 안동 체화정, 논산 종학당, 화순 만연사 대신 도심 가까이에서 즐거움을 선사한다.
춘당지 방향으로 발길을 돌려 백송 3그루도 만나보자. 백송은 중국 중북부 지역이 원산지인데 창경궁 백송은 중국을 왕래하는 사신들이 묘목을 가져다 심은 것으로 보인다. 백송은 나무껍질의 색깔이 어릴 때는 회녹색이다가 자라면서 껍질이 계속 벗겨지면서 점점 회백색으로 변해간다. 백송으로 유명한 곳은 천연기념물 제8호로 500년 이상된 서울 재동 백송인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깨끗한 흰색을 보여주는 백송이다.
창경궁 3그루 백송의 특이한 점은 다 나이가 달라 수피의 색깔이 청년기 회녹색부터 백색의 장년기 노송을 동시에 비교하면서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창경궁 숲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나무는 춘당지 서쪽 창덕궁 담 주변에 있는 500년 이상 된 느티나무다. 이 나무 주변은 산속 숲처럼 아늑하여 잠시 시간을 내어 사색하면 마음의 위안이 될 것이다.
이외에도 함인정 남쪽 300년 된 주목과 150년 된 향나무도 좋은 볼거리다. 아쉽게도 주목은 몇 년 전 고사하여 지금은 형태만 유지하고 있지만 그 자태는 여전히 신비롭다.
여름에는 황철나무도 보기 좋다. 창경궁에는 100년 이상 된 황철나무 2그루가 관천대 주변에 있는데 높이가 30미터 정도 자라는 큰키나무로 꽃은 암수딴그루이며 5월경에 황색의 꽃이 잎보다 먼저 핀다. 동그란 열매가 여름에 익는다.
시간의 여유가 있다면 춘당지를 지나 창경궁 북쪽 끝에 있는 대온실도 들러 보자. 각종 분재가 잘 가꾸어 지고 있는데 애호가들은 사진 찍기에 바쁘다. 보기 힘든 극락조화, 아네모네도 만날 수 있다.
창경궁은 본래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 이방원의 처소로 세종이 지은 수강궁 터에 성종 14년 세조비 정희왕후, 세조의 장남이었으나 일찍 죽어서 추존된 덕종비 소혜왕후 즉 인수대비와 예종비 안순왕후 세 분의 대비를 위하여 지은 여인의 궁궐이다.
창경궁을 짓고 난 다음 해인 성종 15년(1484) 임금은 장원서의 노비들을 동원하여 궁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게 빨리 자라는 버들을 심으라고 한다. 《동궐도》를 보면 창경궁의 여러 곳에 능수버들이 그려져 있다. 능수버들이 지금도 창경궁 곳곳에 많은 이유다. 좋은 의미로는 사생활 보호를 위한 배려였으나 궐내 여인들에게는 바깥세상과의 완전한 단절은 아니었을까.
조선 궁궐 조경은 자연 순화의 원칙을 고수한다. 일본이나 중국처럼 인위적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표현한다. 단순하고 소박하면서도 결코 초라하지 않게 건물과 어울림을 한껏 고양시킨다. 창경궁에서 궁궐 조경원칙을 살펴보는 것도 좋은 포인트다.
설레는 봄, 멀리 떠나지 못하는 아쉬움을 도시숲 창경궁 옥천교 주변의 매화, 살구나무, 앵도나무, 자두나무의 화려한 꽃을 보며 달래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