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윤필
한국일보 기자
사냥을 취미로 삼고 사는 친구가 있습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는 합법 엽사입니다. 총기소지증을 갖고 있고, 수렵허가증도 얻어 시즌마다 지정된 사냥터에서 사냥을 합니다. 그를 만나면, 특히 겨울 사냥시즌이거나 시즌이 막 끝난 이맘때면 거의 늘, 그의 사냥 무용담을 들어줘야 합니다. 어디서 어떤 짐승을 만났다가 어떻게 사냥에 성공(혹은 안타깝게 실패)했다거나, 포획한 사냥감을 어떻게 했다거나 하는 식의 이야기입니다.
차(茶)를 즐기는 이들에게 ‘다도’가 있고 무술인에게 ‘무도(武道)’가 있듯이 사냥꾼에게도 ‘엽도(獵道)’라는 게 있어서, 새끼에게 젖을 먹이는 짐승이나 잠든 짐승은 쏴서는 안 된다는 걸 알게 된 것도 그 친구를 통해서였습니다. 엽총의 총열이 두 개인 까닭은 방심한 사냥감을 만났을 때 총알 한 발로 자신(사냥꾼)의 존재를 상대에게 알리고, 나머지 한 발로 정정당당하게 승부를 걸기 위해서라는 말을 들었던 것도 같습니다.
살생을 금하는 불교의 계율을 중히 여기는 이들에게는 ‘엽도’라는 것 자체가 위선적으로 보이겠지만, 엽사들 사이에서는 자부(自負)의 금제인 듯했습니다. 국가기관이 정한 요건과 지방자치단체가 허가한 바를 충실히 따르는 것은 물론이고, 공동체가 암묵적으로 정한 도리까지 지키고 있으니 그 너머의 것은 알 바 없다는 의미입니다. 요컨대 사냥총을 든 그에게 엽도는 금살(禁殺)과는 다른 차원에서 지켜야 할 신성한 계율이자 당당한 자부여서, 거기다 생명의 무차별적 존귀함을 화제(話題)로 삼는 일은 아예 대화하지 말자는 얘기로 이해될 듯 여겨졌습니다.
세상이 논란하는 다수의 것들이 어쩌면 그의 사례와 크게 다르지 않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가령 제주도 해군기지 건설 문제만 하더라도 군사·안보적 불가피성을 주장하는 쪽의 입장과 구럼비 해안이라는 특정 지역의 환경·생태적 가치를 중시하는 편의 입장, 나아가 생명 존중의 종교적 가치를 앞세워 군사기지 자체의 증설을 반대하는 입장 사이의 불협화음이 그러합니다. 그 미묘하고도 근원적인 코드(Cord)와 앵글(Angle)의 차이가 이해되지 않고, 또 그 차이를 넘어서는 근본적인 가치에 대한 공감이 없는 한 맞섬은 불화의 전선(戰線)을 극복하기는커녕 더욱 공고해질 뿐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그러합니다. 논쟁과 대립의 과정 자체가 그리 이성적이지 못한 듯 보이는 것입니다.
사회적·국가적인 이슈만 그러한 게 아닙니다. 굳이 사례를 들 필요도 없이, 일상의 우리 자신 역시 그리 이성적인 존재가 아닌 듯 여겨질 때가 잦습니다. 생각과 행동, 더 크고 근원적인 가치와 작지만 당장의 요구에 맞닿아 있는 사소한 가치가 충돌할 때 우리가 겪게 되는 인지부조화의 상황은 너무나 많아서, 오히려 그것이 인간의 한계 혹은 모든 생명의 슬픈 운명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반(反) 가톨릭적 인사로 알려진 독일의 한 저명한 저널리스트가 지난 2010년 7월 교황 베네딕토 16세를 만나 나눈 대담이 최근 책으로 출간됐습니다. <세상의 빛>이라는 이 책에는 환경·생태 등 문명적 재앙의 현실과 종교적 책임의 문제가 언급돼 있습니다. 세계열강이 합의했으나 실효성 면에서 그 허약함이 여실히 증명된 기후협약을 예로 들며 저널리스트는 교황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 그 결과는, 태풍·홍수로 죽은 곡식이며 과일입니다. 이러한 결과는 기후 변화와 같은 위협을 인류가 함께 노력해도 절대로 해결할 수 없다고 보는 사람들의 생각을 옳은 것으로 확인해주는 것이 아닐까요?”
이에 대한 교황의 대답은 그리 실속 있어 보이지 않습니다.
“위협적으로 다가오는 재앙에 대해 도덕적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인식이 도처에 있습니다. 아울러 지구 전체 차원의 책임이라는 의식도 있습니다. 윤리를 더 이상 일정 집단이나 민족과 결부 지어서는 안 되고, 지구와 모든 사람을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교황의 답변은 인간이 선한 존재라는 전제에 기반 합니다.
“사람은 확실히 도덕을 인식하는 잠재력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이 잠재력을 정치 의지와 행위로 바꾸는 일은 자기 포기의 자세가 없어 다시 불가능해집니다. 그런 일은 국가 살림으로 전환되고 결국에는 개개인이 부담해야 하는데, 그러다 보면 다시 각각의 집단마다 서로 다른 부담이 문제가 됩니다. 이를 통해 분명해진 것은, 인류 전체, 특히 개발과 진보의 중심 역할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새롭고 심오한 도덕의식이나 인생의 가치관이 될 자기 포기에 대한 마음가짐 없이는 정치 의지도 결국 효과를 거둘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교황의 해법이란 모든 개인이 인류 모두가 긍정하는 위대한 도덕 의지를 결정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 구심점에 교회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직 교회만이 자기를 포기하도록 마음을 움직일 수 있고 도덕의 근본이 되는 태도를 영혼에 새겨 넣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과연 인간 일반은, 교황 말씀처럼, 자기(소아적인 욕망)를 포기하고 도덕의 근본을 영혼 속에 새겨 그에 따라 실천할 수 있는 존재일까요. 불교식으로 표현하자면, 중생은 지금껏 외면하거나 등한시해 온 내면의 궁극적 가치를 체화해 물질 숭배와 이해타산의 소아 너머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그래서 눈앞의 개인과 집단의 이익, 국가의 이익을 넘어 인류 보편의 이익을 위해 당장의 손해를 감수할 만큼 지혜로운 존재로 거듭날 수 있을까요. 누가 제게 대답을 요구한다면 저는, 유감스럽게도, 미적거릴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가능하다면 그 고통스러운 질문을 외면하고 싶습니다. 제 생각이 비관적이어서가 아니라 정말 모르겠기 때문입니다.
최근 출간된 <불교와 과학, 진리를 논하다>(운주사 발행)라는 책은 일본의 저명한 진화생물학자와 불교학자가 과학과 종교의 대립과 접점을 두고 나눈 인식을 담고 있습니다. 두 저자는 물질과 정신, 의식과 무의식, 생과 사, 절대존재 등 7개의 주제에 대해 각자의 생각을 피력하면서 두 영역의 접점과 대척점을 모색합니다. 그 책에서 생물학자는 진화론의 아버지로 꼽히는 찰스 다윈의 자서전 한 구절을 인용합니다.
“내 인생의 후반기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회의주의 또는 합리주의의 확산이다.(…) 우리는 만물의 시작에 얽힌 신비를 풀 수 없다. 그러므로 나 개인적으로는 불가지론자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생물학자는 특정 종교에 깊이 심취할 경우 그 가르침에 의문을 제기하기 어려워지는 반면 이 세상 만물의 구조와 내력을 의심하는 것은 대단히 과학적인 태도라며 과학과 종교의 어긋남을 설명합니다. 하지만 신비를 풀기는 불가능하다는 다윈의 태도와 석가의 가르침에서 공통점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즉 석가는 시간에 시작은 있는가, 우주의 외부는 어떻게 되어 있는가, 인간은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 같은 질문을 받아도 대답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석가의 침묵은 그로부터 수백 년 후에 등장한 대승불교의 현자 유마거사의 침묵으로 이어집니다. 어떠한 문제에 대해 문수보살이 ‘법은 말을 초월한다. 온갖 문답을 떠나는 것이 그것이다’라고 대답한 데 반해 유마는 말없이 침묵을 지켰고 이를 본 문수보살이 그의 침묵을 칭찬했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또 <논리철학논고>의 저자 비트겐슈타인의 핵심적인 논제 즉, 철학과 자연과학 모두 논리의 토대 위에서만 성립 가능한 학문이지만 그 너머에 -논리로 파악할 수 없는 광대한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줄도 알아야 한다-는 점을 덧붙이기도 합니다. 그 신비와 침묵 안에서 저자는 종교와 과학의 화해 가능성을 품어 안는 듯합니다.
우리, 그리고 전 인류 앞에 놓인 숱한 어려운 문제들 앞에서 입을 다물고 물끄러미 바라만 보는 일 -그것이 반성적 사유든, 염화시중의 교감이든, 어쩔 줄 몰라 택한 묵묵부답이든- 이 현명한 처신인 듯 보일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따지고 보면 인간의 비행과 악행 가운데 몰라서 저지르는 악행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세상이 너무 소란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