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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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볕과 한 뼘, 저절로 미소꽃으로 피어나다

- 삼화사 ‘무향각’에서 -


이서연
시인


기다릴 것이 있다는 건 생각보다 괜찮은 일이다. 특히 차가웠던 계절의 끝자락 어디서부터 이유 없이 설렘을 동반하며 스며드는 봄은 기다릴만한 가치가 있는 계절임이 분명하다. 빈 들녘으로 순해진 빛이 서서히 퍼지면서 오랫동안 얼었던 땅이 숨을 쉬기 시작하는 봄은 토도독 터져나오는 신음을 꽃으로 보여 준다. 그때마다 하늘향 담은 이슬이 목마른 자연에 봄옷을 입혀준다.
그렇게 봄옷을 입고 화사하게 그대로 빛나면 좋으련만 자연은 통과의례처럼 앓이를 시작한다. 꽃샘추위를 슬쩍슬쩍 던지는 바람에 여리게 피던 꽃들이 시달리고, 겨우 숨을 쉬기 시작한 땅을 뚫고 나오던 움들이 주춤된다. 모처럼 길게 기지개를 펴고 싶은 우리 인간도 갑자기 싸늘한 바람 한 점에 펴던 기지개를 접게 될 때가 있다. 흔들리며 피는 게 꽃이라지만 꽃술을 얼게 하는 꽃샘추위엔 사람도 흔들린다. 그 순간, 미열이 있던 날 미열을 떨어낼 풍경이 필요했다. 강원도 태백 폐광지역을 돌다가 “어려운 걸 자꾸 해냅니다 내가.”라는 대사가 귀에 맴돌게 하던 인기 드라마 <태양의 후예> 촬영지를 잠시 들린 건 봄이 오글거리는 사랑을 만나게 하듯, 오글거리는 사랑이 때론 삶의 기운을 주는 특효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봄볕이 그 어떤 만물도 소생시키듯 사랑은 어려운 걸 자꾸 해내게 한다. 몸의 미열을 그곳에서 잠시 식히고던 삼척으로 들어섰다.
살다 보면 사람으로 갖춰야 할 위엄이나 기품을 인식하게 되는데 도무지 봄엔 쉽지 않다. 갯버들이 퍼지기 시작한 무릉계곡에서 꽃샘추위에서도 흔들리는 꽃잎만 봐도 슬그머니 울렁임이 시작된다. 우람한 적송이 울렁임을 잡아주지 않는다면 거침없이 시작된 봄앓이 가슴을 무릉에 놓아버리고 찾지 못할 듯 하다. 
두타산엔 부처님의 영험으로 삼국이 통일되었음으로 기리기 위해 세워진 삼화사三和寺가 있다. 무릉의 초입으로 들어가는 반석교부터 숲을 울리는 물소리가 바람까지 흔든다.


어울려 살라시며
산빛을 내리시고


비우며 채우라며
물빛을 쏟으시고


두타산 정다운 자리
불법佛法향이 가득하다
       
 봄이 피어나는 자리임을 자랑하듯 반석교의 눈뜨는 버들이 살랑인다. 담을 따라 나란히 서 있는 십이지상들이 두타산에 일찍 들어오는 노을빛을 받아 고요에 들어갈 준비를 하는 듯 보인다. 이번엔 살짝 가슴 속 미열을 다스려 보고자 천왕문으로 들어서면 반듯한 적광전이 삼층석탑을 중심에 두고 나타난다. 은은한 불빛에 철조노사나좌불의 미소가 드러난다. 마치 출렁였다면 울렁임에 마음을 놓아 버리고, 울렁였다면 출렁이는 계절을 놓아 버리라는 듯 여여하게….
 먼 타국에서 불교문화를 체험하기 위해 왔나보다. 한국의 봄향기를 산사에서 만끽하고자 템플스테이를 신청하고 천천히 포행 중인 노신사숙녀분들의 걸음에 섞여 도량을 돌아보고 함께 찻집 ‘무향각無香閣’에 들어갔다. 마치 반짝이는 보석들을 모아 놓은 듯 불교용품과 기념품들이 놓인 진열대에 독특한 소품들이 가득하다. 그 한편으로 무릉계곡 물소리가 보이는 자리에 다실이 마련되어 있다. 제법 나이가 들어 보이지만 템플스테이 체험자들은 호기심이 많다. 특히 보이차와 국화차 등 우려 마시는 차에 흥미를 보이며 미소짓는 모습에서 느리게 사는 여유가 건강한 장수요, 평생 봄빛을 지니고 사는 인생 비결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은 청춘의 상징어처럼 보이지만 사랑은 가슴 속에 봄볕을 한 뼘 거리에 두고 살아가는 이에게 평생 청춘을 허락한다는 생각이 든다. 두륜산에 해가 넘어가려는 시간이라 찻집에서 그 빛을 닮은 국화차를 한 잔 주문했다. 
 가을에 말려 둔 국화를 봄에 차로 우려 마시는 맛은 마치 기억이 가물해지는 청춘 그 어느 날에 맺혀 있는 소중한 인연을 소환하는 맛이다. 그때는 왜 그리도 뜨겁고, 왜 그리도 성급했고, 왜 그리도 상처에 퍼런 자국만 남겨야 했을까. 그러나 돌아보면 그런 인연이 아련한 추억의 보석이 되기도 하기에 미소짓게 된다. 꽃 피고 잎 돋는 무음의 소란이 한창인 봄에 산사 찻집에서 지난 날 말려 둔 차를 우려 마시는 건 그런 그리움으로 돋아나는 추억을 진하게 우려 입안에 향기로 돋게 하는 일이다.


용서할 누구 없고 용서 할 일도 없는 듯
미워 할 마음 없고 미운 일도 사라지니
피어난 봄 위의 생명 내 향기로 퍼진다


버릴 것 버리고서 버린 것을 잊은 마음
덧칠된 상처 덮고 덧난 가슴 덮어가니
그 자리 돋아난 봄의 살갗 연한 미소 짓는다


 제대로 봄볕이 든다면 만물의 표정에서 미소만 보이듯이 사람도 온몸으로 그 봄볕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누군가에게 어디서나 봄향기를 뿜어낼 수 있으리라. 그러나 그 안목이 없다면 이 지천에 아름다운 봄볕이 깔려도 무슨 소용이랴. 철불의 미소가 저토록 자비로워도 그 자비를 받을 마음이 없다면 무슨 의미이랴.
 지구 반대편에서 온 분들도 산사에서 머물며 깊이 우리나라의 자연과 산사의 아름다움, 봄향기를 받아 가려고 하는데 두타산 노을이 깔리는 시간에 산사를 나오며 아쉬움이 들었다. 하지만 가슴속 미열이 사라졌으니 아마 봄볕과 함께 마신 무향각의 국화차가 감로가 아니었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