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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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부凡夫에서 인천人天의 스승으로

화악문신(華岳 文信, 1629~1707)


 


오경후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



스님의 법명은 문신文信이고 호는 화악華岳이며, 속성은 김씨이고 해남 색금현(塞琴縣, 지금의 해남임)의 화산방花山坊 사람이다. 어린 나이에 출가하여 대둔사大芚寺에서 머리를 깎았다. 얼뜨기 같아 글자를 몰랐기 때문에 대둔사로 출가하여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 가래(화삽鏵臿)·괭이 같은 것을 가지고 다니면서 팔아 배를 채웠으므로 비록 짚신을 삼아 파는 자일지라도 스님을 천하게 여겼다.
스님은 농사 기구를 팔아서 겨우겨우 생계를 이어갔는데 하루는 너무도 피곤해서 상원루上院樓 밑에 이르러 짐을 벗어 놓고 쉬고 있었다. 때마침 그 누각에서는 취여 삼우醉如三愚 선사가 대중들을 모아 놓고 󰡔화엄경󰡕의 종지를 강론하고 있었다. 당시 취여 스님은 유난히 얼굴이 붉고 윤기가 흘렀기 때문에 스승 해운이 ‘술에 취한 듯한 사람(취여자醉如子)’이라는 호를 붙여 주었으니, 장난삼아 그랬던 것이다.
스님은 불교경전을 공부한 것뿐만 아니라 담론談論을 잘하여 듣는 이로 하여금 심취하게 했다고 한다. 일찍이 스님이 대흥사 상원루上院樓에서 화엄의 종지를 연설하였는데 강론을 듣는 이가 수백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때 화악 대사는 누각 아래에서 한두 구절을 엿듣고는 그 자리에서 단박에 깨닫고, 지고 있던 농기구를 같이 장사하던 친구에게 넘겨주고 누각으로 올라가 꿇어앉아 눈물을 비 오듯이 흘리면서 불법의 진리를 가르쳐 달라고 간청하였다. 삼우 대사는 매우 기특하게 여겨 그의 소원을 허락하였다. 그날 사방에서 몰려와 강론을 듣던 대중들은 모두 놀랐다.
그때 마침 대둔사에는 토목 공사가 있었는데, 선사는 낮에는 도끼질과 벽 바르는 일을 도와주고, 매일 밤마다 주워 온 솔방울로 불을 밝히고 오경五更이 될 때까지 글을 읽기를 3년이나 하였다. 그와 같이 공부하던 도반들은 모두 뒤로 처지고 말았다.
스님은 대둔사를 떠나 여러 지방으로 구름처럼 전국 명산을 돌아다니며 선지식들을 참배하고 그들로부터 인가를 받았다. 학문이 완성되자 마침내 취여醉如 스님의 조실에서 화악 스님을 인가하는 의식을 거행하였다. 그러자 화악 스님의 문전에는 배우려는 사람들이 폭주하였다. 대둔사에서 강론 법회를 여는 날이면 모여드는 대중들이 수백 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때 사미沙彌들이 몰려들어서 대둔사의 모임에는 배우는 자가 1천여 명이나 된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때 북방에서 명성을 떨치던 월저 도안(月渚 道安, 1638~1715)선사가 소문을 듣고 와서 스님을 뵙고 그와 더불어 선지禪旨를 논하였다. 월저 스님은 9세에 출가하여 천신天信 스님의 제자가 되었다. 그 뒤 금강산에 들어가 풍담 의심(楓潭義諶, 1592~1665)의 지도를 받으며 휴정休靜의 밀전密傳을 연구하여 화엄학華嚴學과 삼교三敎에 두루 통하였다.
월저 스님은 󰡔화엄경󰡕과 󰡔법화경󰡕 등의 대승경전과 󰡔예념왕생문禮念往生文󰡕 등의 염불 관계서적 10여 종을 인출印出하여 배포하였고, 󰡔회연기會緣起󰡕에 따라서 󰡔화엄경󰡕을 국역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 스승 의심의 사업을 이어받아 국역작업을 완수하기도 하였다.
화악 스님은 월저 스님을 종주宗主로 삼을 만한 인물이라 여겨 거느리고 있던 모든 대중들을 월저 대사에게 양보하고 물러났다. 그러자 대중들은 매우 놀라며 만류하였다. 대사가 대중들을 타일러 “너희들이 알 바가 아니니라.”고 말하였다. 그리고는 스스로 작은 방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월저 대사의 화엄법회가 끝날 때까지 면벽面壁에 들어갔다. 월저 대사는 법회를 마치고 묘향산으로 돌아가서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남쪽 지방에 갔다가 육신보살肉身菩薩을 친견하였다.”


화악 스님은 숭정崇禎(명나라 의종毅宗의 연호) 2년 기사(인조 7, 1629)에 태어나서 강희(康熙, 청나라 성조聖祖의 연호) 16년 정해(숙종 39, 1707) 6월 26일에 적멸을 보였으니, 세속 나이로는 79세였다. 막 열반에 들었을 때에 두륜산에 우렛소리가 울렸다고 한다. 다비식을 마치고 나서 사리 2매를 얻었다. 비문은 한치응韓致應이 썼고, 비명은 다음과 같다.


유옹매궤有嗈買䤥 농기구 파는 이의 울음소리
명피중림鳴彼中林 저 숲 속에 울려 퍼졌네
유혜자선有嚖者蟬 매미 우는 소리 맴맴
기태기금旣蛻旣唫 이미 허물 벗고 노래를 읊네
황매의법黃梅依法 황매산黃梅山 홍인 대사의 법
용자수지舂者受之 방아 찧던 사람에게 주었네
산림유벽山林有壁 산림山林에서의 면벽으로
수철고비遂撤皐比 마침내 고비皐比를 거두셨네
시위능양是謂能讓 이를 일러 능양能讓이라 하나니
비이유출匪伊有出 그가 아니면 뉘라서 하랴
조불가유早不可踰 일찍이 그를 뛰어넘을 수 없기에
호위생불號爲生佛 그를 일러 산부처라 불렀네


화악 스님의 문인으로는 설봉雪峰과 벽하碧霞 등 21명이 있었으며, 스님의 진영은 대흥사大興寺 상원上院의 영각影閣에 모셔져 있다.
한편 다산 정약용도 아암 혜장惠藏이 법조法祖 화악華嶽의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다산은 화악 스님이 호방하고 뛰어났지만, 만나지 못한 것이 슬퍼서 비문을 적었다.
다산의 비문은 다음과 같다.


만년에는 술에 빠져 매일 밤 곤드레가 되어 커다란 절구공이를 들고 절의 주위를 몇 십 번 혹은 몇 백 번씩 돌았다. 그때 그는 절구공이로 집모퉁이 축대와 뜰의 낙숫물받이를 다지는데, 그 소리가 매우 야릇하고 시끄럽게 산골짜기에 울려 퍼졌다. 배우는 자들은 숨을 죽이고 감히 방문을 나오지 못하였는데, 다음날 아침 까닭을 물었으나 웃으며 대답하지 않았다. 바야흐로 입적하려 할 때에는 두륜산頭輪山에 천둥이 치더니, 다비茶毗한 뒤에는 사리舍利 두 알을 얻었다.


화악 스님의 전등傳燈 연원은 위로 서산西山의 ‘사점주四點炷’를 이었고 아래로는 혜장惠藏의 ‘사견발四見跋’에 이르렀으니, 선사는 그 가운데이다. ‘사점주’와 ‘사견발’은 서산대사西山大師에겐 네 명의 수제자가 있었으니 사점주란 그 네 명의 마음의 심지에 서산이 도道의 불을 붙여 주었다는 것을 말한다. 그 네 명 중 소요 태능消遙太能의 계통이 화악 문신華嶽文信이고, 화악 문신의 재전 제자가 연파 혜장蓮波惠藏이다. 혜장은 네 명의 스승에게 배워 깊은 이치를 터득하였으니 사견발은 그것을 말한 것이다. 그 네 명의 스승은 아암 혜장의 탑명에 나오는 춘계 천묵春溪天黙·연담 유일蓮潭有一·운담 정일雲潭鼎馹·정암 즉원晶巖卽圓이다.
다산 정약용이 쓴 화악 스님의 비명은 다음과 같다.


유조조잡有趙𠝡疀 땅파는 가래 있으니
매궤옹옹買䤥𡄸𡄸 가래 호미 사라고 외쳤다네
내석기건迺釋其㓺 이에 그 짐을 풀고
체이형종涕洟衡從 눈물 콧물 가로세로 흘렸다네
기불치희飢不値餼 굶어도 밥을 못 얻으니
해애해몽害餲害饛 쉰밥 찬밥 어찌 가리리
체동야제蝃蝀夜隮 무지개가 밤에 떠서
벽락궁륭碧落穹窿 하늘에 높이 솟았네
조창격료槽廠闃廖 조창이 고요한데
취저공공醉杵銎銎 술 취한 절구공이 콩콩 울린다.
지이자과知爾者寡 너를 아는 자 적어
유여기롱褎如其聾 귀머거리마냥 웃기만 하네
불약대경不若大驚 만 골짜기에 바람 일어
만학생풍萬壑生風 크게 놀라게 함만 같지 못하다.
백년이후百年而逅 백년 뒤에는
소약발몽昭若發矇 밝기가 발몽發矇한 것과 같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