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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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가에서 열반까지 “우리도 부처님 같이”

정우頂宇 스님
본지 발행인 | 구룡사 회주



오늘은 석가여래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80년 동안 함께 하시다 열반에 드신 날입니다. 지금으로부터 2569년 전, 2월 15일입니다.
부처님께서는 2649년 전 룸비니 동산에서 태어나셨고, 2620년 전 히말라야 설산으로 출가하셨습니다. 출가 후 6년 동안 고행과 난행을 하시며 수많은 사람들과 만나기를 반복하셨고, 그 힘든 고난과 시련을 겪으셨습니다.
전정각산前正覺山에서 각고의 수행을 하시던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단순히 몸을 괴롭히는 고행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달으셨습니다.
“이 몸은 그릇과 같아서, 그대로 두어서는 그릇에 담겨야 할 청정한 본성의 물을 담을 수 없겠구나.” 이러한 깨달음은 소치는 소녀 수자타로부터 유미죽乳米粥 한 그릇을 얻어 공양 하신 후, 보리수 아래 길상초 풀잎을 깔고 앉아 깊은 선정에 들어 마침내 정각正覺을 이루셨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614년 전 일입니다.
부처님께서는 45년 동안 전법을 펼치셨고, 그 가르침은 우리들에게 큰 지혜와 보리심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불기佛紀 2569년은 부처님께서 열반涅槃에 드신 날을 기준으로 하는 불기佛紀입니다.


과학자들은 지구의 나이를 약 45억 년으로 추정합니다. 영국 BBC 방송이나 히스토리 채널 같은 프로그램을 보면 우주와 지구의 기원에 대해 심도 있는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러한 방송에서는 미생물이 어떻게 먹이사슬을 통해 진화하여 세포 조직이 되고, 분자 단위로 발전해 오늘날의 생명체로 이어지고 있는지도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 인간 역시 지금도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습니다.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과정도 일종의 진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 몸에는 약 5만 가지 7만 종의 생명체가 나를 의탁하여 기생하고 있다.”하셨습니다. 입멸入滅한 그 스님의 다비식을 미루고 있었습니다. 부처님은 그 소식을 전해 듣고 연유를 물으니 대중들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부처님께서 ‘우리 몸에는 수많은 생명체가 의탁하여 기생하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스님이 열반하였다고 해서 그 생명체들이 모두 사라졌다고 볼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어찌 화장을 할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스님이 숨을 거둠과 동시에, 그의 몸속에 있던 생명체들은 이미 소멸되었다.”
이 일화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단순히 철학적 사유에 머물지 않고, 매우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삶은 철저한 수행과 희생의 연속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호화로운 궁궐에서 호의호식하며 살던 구담 고타마 싯다르타 태자는 출가 후 모든 것을 내려놓고 고행자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이는 단순히 육체적 고통을 감내하는 것만 아니라, 자신의 몸과 마음속 깊숙이 자리 잡은 집착과 안락함도 내려놓는 과정이었습니다. 오늘날 의학적으로 보면 우리 몸의 세포는 가장 오래 살면, 약 6년 정도 간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고행 기간 동안 세속적인 몸속 세포조차도 모두 새롭게 태어났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게 되면 하나의 생각일 수 있겠지만, 부처님의 수행 정진이 얼마나 철저했는지를 짐작하게 합니다.


우주는 약 137억 년이고, 지구는 약 45억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후 미륵보살彌勒菩薩이 용화세계龍華世界의 교주로 오시기까지는 56억 7천만 년이 걸린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시간의 흐름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길지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간은 참으로 짧습니다.
소년으로 출가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6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 세상에 얼마나 더 머무를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50년 간격으로 부처님을 뵙고자 한다면 50여 명의 줄을 세우면 부처님께서 계시던 그 시절을 만날 수 있으니 2,600년이라는 시간도 결코 긴 시간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엊그제 꽃띠, 소년이었던 정우도 이렇게 시간은 흘러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하루하루가 쏜살같이 지나가며 지구는 하루에 약 4만 km를 자전하고, 공전을 통해 매년 태양계를 한 바퀴씩 돌아옵니다. 저는 지금까지 태양계를 74번 돌고 있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2,600년 전이라 해서 멀리 계신 것이 아닙니다. 숫자로 보면 그 시간이 아득한 거리처럼 느껴질 수 있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나이를 거리로 환산해 본다면, 우리는 이미 먼 길을 걸어온 셈입니다. 이런 소중한 시간들을 허투루 보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더욱 깊숙이 깨닫게 됩니다. 남은 시간이라도 알차고, 짬지게, 그리고 건강하게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어느 날 제자가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어찌하여 여래께서는 2월 달에 열반에 드시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2월은 봄이다. 봄에는 만물이 자라나고, 꽃이 피며, 열매를 맺는다. 강물이 불어나고, 설산의 눈이 녹으며, 모든 동물들이 새끼를 낳는 때이니라.”
자연의 순환 속에서 중생들은 봄이 항상 계속될 것이라는 착각을 하며 살아갑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를 경계하시며, 모든 것은 무상無常하다는 진리를 강조하셨습니다. “중생들이 항상恒常함에 집착하므로, 나는 무상의 이치를 설한다. 그러나 여래는 변하지 않느니라.”
이와 같은 가르침이 부처님의 근본 법문입니다. 모든 것은 무상하고 덧없습니다. 하지만 여래는 항상 존재합니다. 축원을 올릴 때도 부처님의 십호十號를 떠올리며 기도 합니다.
여래如來, 응공應供, 정변지正遍知, 명행족明行足, 선서善逝, 세간해世間解, 무상사無上士, 조어장부調御丈夫, 천인사天人師, 불세존佛世尊 이시여.
부처님께서는 태어나신 날(4월 8일)도, 출가하신 날(2월 8일)도, 깨달음을 이루신 날(12월 8일)도 모두 8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열반에 드신 날은 보름(2월 15일)이었습니다. 그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사람들은 늘 부처님께 궁금한 것이 많았고, 그 가르침을 깊이 알고 싶어 했습니다. 고려대장경, 신수대장경, 속장경, 티베트장경, 남방장경 등 수많은 경전이 번역되어 있습니다. 해인사 국보 제32호인 고려대장경만 해도 81,258장의 자작나무 목판에 양면으로 새겨져 있으며, 경전으로 묶으면 6,791권이 됩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 남기신 법문이 어찌 그것만 이었겠습니까.


부처님께서는 열반경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떠남을 보고 그것을 죽음으로 알지 말라. 열반涅槃은 죽음이 아니니라.”
우리 스님들이 입적하시면 열반에 드셨다고 합니다. 열반이란 무엇입니까?
번뇌가 사라진 상태. 즉, 열반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 경지를 의미합니다. “이 가르침대로 살아간다면, 비록 나와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나는 항상 너희와 함께하리라.” 죽음이란? 육신의 소멸일 뿐, 진리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우리도 마음속 번뇌를 여의고, 무상의 이치를 깨달으며, 이 순간들을 충실히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금金을 귀히 여기듯이, 본성 또한 귀한 것입니다. 순금이 99.99%라면, 나머지 0.01%는 이물질이 섞여 있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정확히 표기된 숫자는 정직함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본성도 이와 같습니다. 본성이 99.99% 믿음으로 가득 차 있고, 보리심菩提心으로 발현된다 하더라도, 그 안에 0.01%의 의심이나 불신이 섞여 있다면 문제가 됩니다. 그 작은 불순물이 우리의 깨달음을 방해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천불千佛이 한꺼번에 이 세상에 나타난다 해도, 그 의심과 불신이 있는 한 우리를 구제할 방법이 없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죽음이란 무엇일까요? 죽음은 단지 육신의 죽음일 뿐입니다. 이 몸은 부모님께 물려받은 것이기에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이는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생로병사生老病死의 법칙입니다. 그러나 여래如來는 육신이 아닙니다. 부처님은 깨달음의 지혜智慧 그 자체입니다. 육신은 언젠가 소멸되겠지만, 깨달음의 지혜는 영원히 진리의 길 위에 살아 있습니다.
우리도 육신은 언젠가 사라지겠지만, 우리의 본성은 태어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 불생불멸不生不滅, 더럽혀지지도 않고 깨끗해지지도 않는 불구부정不垢不淨, 늘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는 부증불감不增不減한 진리 속에 존재합니다. 우리는 육신의 한계를 넘어 본성을 깨닫고 이를 믿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열반에 드시기 전 마지막 설법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떠난 후에는 내가 남긴 가르침이 곧 그대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
모든 것은 덧없고 무상하나니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여라.”
모든 것은 변하는 무상함 속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를 두려워하거나 집착하지 말고, 오히려 부지런히 정진하며 진리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오늘 열반재일涅槃齋日을 봉축하는 연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본성을 되새기는 것은 중요합니다. 이제는 마음을 다잡고 함께 노력해야 합니다. 다가오는 부처님오신날 봉축 기간 21일간 발심기도를 합니다. 하루라도 더 젊을 때, 조금이라도 더 건강할 때 함께 동참하여 정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본성은 순금純金과 같습니다. 금은 어떤 모양으로 변하든 그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본성 또한 몸이 늙고 병들고 죽더라도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를 잘 알지 못하고 살지만, 우리의 본성은 언제나 진리 속에 살아있으며 죽지 않고 있음을 직시하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