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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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보살행 실천의 여러 단계 모아 보기

신규탁(연세대 명예교수, 철학 전공)



1.
󰡔범망경󰡕에서는 대승 수행자가 지켜야 하는 가치 덕목을 크게 넷으로 10항목씩 묶어, <10발취심>, <10장양심>, <10금강심>, <10지>를 단계별로 제시하고 있다. 필자는 4월호부터는 <10지>를 시작하려 한다. ‘10지’에서 ‘지’ 자는 한자로 ‘地’로 쓰는데, ‘지위’ 또는 ‘경지’ 또는 ‘위치’의 뜻이다. 그것을 나열하면 ①평등지, ②선혜지, ③광명지, ④이염지, ⑤혜조지, ⑥화광지, ⑦만족지, ⑧불후지, ⑨화엄지, ⑩입불계지, 이렇게 모두 열 단계의 경지이다.
󰡔범망경󰡕의 <10지> 소개를 시작하는 이 시점에서, 먼저 󰡔화엄경󰡕의 총 39품 속에 들어있는 「십지품 제26」에 나오는 <10지>의 이름을 소개한다. 그것은 ①환희지, ②이구지, ③발광지, ④염혜지, ⑤난승지, ⑥현전지, ⑦원행지, ⑧부동지, ⑨선혜지, ⑩법운지, 이렇게 열이다. 경전이 만들어진 시간상의 순서는 󰡔화엄경󰡕에 나오는 <10지>가 먼저 세상에 유행되고, 󰡔범망경󰡕의 <10지> 이야기는 그것을 모방하여 만들어진다. 이런 시간적 선후 관계로 두 경전을 서로 비교하면서 읽어가는 것이 서로의 의미 이해에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2.
󰡔범망경󰡕에서 제1지인 ①평등지平等地에 대해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이하에 그 본문을 인용하여 소개한다.


노사나불께서 말씀하셨다.
1,000명의 석가모니불이여, 그대가 10지에 무슨 뜻이 있는지를 물었지. 만약 불자여, 보살이 <‘일체를 평등하게 보고 행동하는 지혜’라고 불리는 체성지(平等慧體性地)>에 들어가는 것이다.
진실한 가르침으로 일체 행을 실천하여 빛나는 광채를 완전히 갖추고, 네 천하를 다스리는 전륜왕의 과보를 누린다. 갖가지 ‘교화 방법(乘)’을 활용하여 마음대로 교화하되 어디에서나 이치로 교화한다. 신통력과 10력十力과 10호十號와 18불공법十八不共法, 그리고 부처님의 정토에 머무름과 한량없는 큰 서원과 두려움 없는 말솜씨, 그리고 모든 논의와 모든 수행법을 배워 실천한다. 부처님 집안에 태어나 불성佛性의 지위에 앉아, 일체 장애와 범부의 몸과 인과를 끝내 받지 않아 기쁨을 완전하게 즐긴다. 한 불국토에서 더 나아가 무량한 불국토에 이르기까지 들어가며, 한 겁에서 무량한 겁에 이르도록 들어간다. 말할 수 없는 법을 가히 설하며, 일체 법을 돌이켜 반조하며, 일체 법을 역순으로 관찰한다. 언제나 진·속의 2제 속으로 들어가면서도 제일의제第一義諦 속에 머문다.
하나의 지혜를 사용하여 10지의 순서를 알아 낱낱의 사안으로 중생을 보되 마음마다 항상 중도中道이며, 하나의 지혜를 사용하여 일체 불국토의 다른 성품과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을 알되 몸과 마음이 변하지 않으며, 하나의 지혜를 사용하여 12인연과 10악十惡의 종성을 알되 보리의 수행 길에 항상 머물며, 일체 지혜를 사용하여 유와 무의 두 모습을 보며, 하나의 지혜를 사용하여 10선十禪에 속한 각각의 수행과 37조도품에 들어갈 줄 알되 다양한 몸으로 6도六道에 몸을 드러내며, 일체 지혜를 사용하여 시방에 있는 갖가지 물질들을 알며 그 각각에 나아갈 줄 알아 육신의 과보를 받되 마음마다 얽매임이 없어 일체를 밝게 비춘다.
그러므로 무생無生의 <신인信忍>과 <공의 지혜>가 항상 눈앞에 드러난다. 제1지와 제2지로부터 더 나아가 부처님 경지에 도달한다. 그 중간의 일체 법문을 일시에 행하기 때문이다. 바다처럼 하염없는 수행과 원력을 간략하게 설명했는데, 비유하면 바닷물 한 방울을 가는 털끝으로 찍어낸 것과 같다.


3.
이상이 󰡔범망경󰡕에서 말하는 <10지> 중에서 맨 첫 단계의 수행 지위인 ①평등지平等地를 설명한 본문을 한글로 번역한 내용이다. 일반 독자님에게 더욱 그렇겠지만, 이 분야를 직업으로 전공하는 교수에게도 문장이 매우 어렵다. 어려운 이유는 필자의 실력이 부족한 점에도 원인이 있고, 한편으로는 한문의 원래 문장이 불완전한 점에도 원인이 있다. 감히 말하자면, 󰡔범망경󰡕이 구마라습의 번역이라고는 하지만 번역의 ‘역어譯語’나 단어를 엮어 문장화하는 과정에서의 ‘윤문潤文’이 불충분했다. 그런데 중국에서 유통되었던 구마라습 삼장께서 번역하신 경전들은, 󰡔범망경󰡕 <상권>과는 달리, 중국의 지식인들에게 다른 어떤 역경사의 번역보다 문장 좋은 것으로 평가되었다. 그런데 󰡔범망경󰡕 <상권>은 그렇지 못하다. 왜 그럴까? 이상하게도, <상권>은 문장이 불완전하지만, ‘10중대계重大戒’와 ‘48경계輕戒’를 설하는 <하권>은 문장이 상대적으로 안정되어 있다.
아무튼 <상권>은 번역하기가 참으로 어렵다. 신라 때에 태현太賢이라는 법상종法相宗 계통의 스님이 주석한 󰡔범망경고적기󰡕가 지금에 전하고 있지만, 그 책을 보아도 역시 의미가 통하지 않는 부분이 많다. 향후 더 많은 연구 성과가 쌓여야 해결될 것들이다. 다만, 󰡔월간 붓다󰡕의 독자님을 위해, 필자는 중국 본토나 대만 지역에서 현대 중국어로 번역된 서적들을 참조하고, 또 필자 자신의 의견을 보태서 소개해 가고 있다.


4.
필자는 일단, 대승불교의 학파 중에서 화엄종華嚴宗의 교리에 따라 설명하고자 한다. 화엄의 교학에 따르면, 어떤 중생이든 모두 평등하게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런 학설은 󰡔화엄경󰡕 「여래출현품 제37」의 본문 말씀에 근거를 두고 있다. 문제는 번뇌이다. 번뇌로 인해 사람마다 차별이 생길 뿐이다. 그런데 번뇌는 인연의 조합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공空한 현상으로, 우리들의 노력으로 제거할 수 있다고 한다. 노력의 첫 조건이 자신 속에는 불성에 대한 체험이다. 그런 다음에 그런 체험을 바탕으로 단계별로 번뇌를 제거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노력의 첫 조건을 자신에게 원천적으로 갖추어진 불성佛性, 화엄의 용어로 말하면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을 체험하는 일이다. 필자는 위에 인용된 본문의 “<‘일체를 평등하게 보고 행동하는 지혜’라고 불리는 체성지(平等慧體性地)>에 들어간다”를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의 체험으로 풀이한다. 자신이 부처와 똑같은 불성佛性이 있는 줄을 돈오頓悟해야 한다는 말이다.
다음에는 이런 돈오를 바탕으로 <네 종류의 지혜>를 닦는 수행을 점차로 닦아간다. <네 종류의 지혜>란, 우선 시작 단계에서 닦아야 하는 지혜로 묘관찰지妙觀察智와 평등성지平等性智이다. 그중 묘관찰지妙觀察智란, 모든 사물의 개별적인 특성과 미묘한 이치를 오류 없이 관찰하는 지혜이다. 이런 지혜를 닦아야 상대방의 근기에 맞춰 설법할 수 있는 통찰력이 생긴다. 그리고 평등성지平等性智도 닦아 익혀야 하는데, 무엇보다 ‘나’의 영원성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자신과 타인은 물론 만물이 본질적으로 평등함을 체험하여 동체대비同體大悲의 마음을 가지게 된다. 최종 단계로 대원경지大圓鏡智와 성소작지成所作智를 닦아 체험해야 한다. 먼저 대원경지란, 제8식인 아뢰야식阿賴耶識에 있는 생멸하는 일체 번뇌를 싹 지워 없앤 상태에서 드러나는 진여에서 나오는 지혜로서 마치 거울이 모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비추듯이 있는 그대로 아는 지혜이다. 그리고 성소작지成所作智인데, 이는 현실 세계에서 자신이 보고 듣는 모든 감각 작용에 어떤 번뇌도 개입시키지 않고 있는 그대로 아는 지혜이다.
한편, 󰡔범망경󰡕 <10지> 중에서 첫 단계인 <①평등지>의 수행은 대승 보살의 다섯 수행 단계 중에서 둘째의 신인信忍의 단계에 해당한다. 보살 수행의 (1)첫째 단계는 복인伏忍으로, 이 단계에서는 번뇌를 끊지는 못했으나 관해(觀解 관찰하는 마음)를 익혀 번뇌를 굴복하여 일어나지 못하게 한다. 10주, 10행, 10회향의 지위에 있는 보살 수행이 여기에 해당한다. (2)둘째 단계는 신인信忍으로, 관찰하는 마음이 더욱 나아가 증득할 법을 믿고 의심하지 않는 지위로서, 화엄의 10지 중에서 제1지에서 제3까지에 이르는 보살 수행이 여기에 해당한다. (3)셋째 단계는 순인順忍으로, 앞의 믿음에 의해 다시 더 나은 지혜를 연마하여 무생을 체험하는 지위로서, 역시 화엄의 제4지, 제5지, 제6지에 이르는 보살 수행이 여기에 해당한다. (4)넷째는 무생인無生忍으로, 제법에 생·주·이·멸이 없는 진리를 깨달아 아는 지위로서, 제7지, 제8지, 제9지에 이르는 보살 수행이 여기에 해당한다. (5)다섯째는 적멸인寂滅忍으로, 갖가지 번뇌를 다 끊어버리고 청정무위無爲淸淨하고 잠연적정湛然寂靜한 상태에 안주하는 지위. 화엄의 제10지, 등각, 묘각의 지위가 여기에 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