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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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향연

봄의 향연


홍성범
숲해설가



봄이 오면 세상은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다시 태어난다.
겨우내 얼어붙어 있던 대지는 어느 날 문득 숨을 고르고, 그 숨결을 따라 작은 생명들이 고개를 내민다. 아직 찬 기운이 남아 있는 흙을 밀어 올리며 모습을 드러내는 복수초의 노란 빛은 마치 긴 밤을 지나 처음 켜지는 등불처럼 따뜻하다. 그 곁에서 냉이는 소박한 잎을 펼치며, 화려하지 않아도 충만한 생명의 기쁨을 보여준다. 눈에 잘 띄지 않는 풀 한 포기조차 그 나름의 시간과 이유로 이 땅 위에 올라와 있다는 사실은, 봄이야말로 가장 겸허하면서도 가장 강인한 계절임을 말해준다.
산길을 걷다 보면 발걸음이 자꾸 느려진다. 눈에 들어오는 것마다 새롭고, 하나하나가 이야기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겨울 동안 무채색으로 남아 있던 풍경은 이제 서서히 색을 입기 시작한다. 산수유는 아직 잎보다 먼저 꽃을 터뜨리며 노란 물결을 만든다. 그 작은 꽃송이들이 모여 이루는 풍경은 마치 햇살이 나무 위에 내려앉은 듯하고, 그 아래를 지나는 사람들까지도 밝게 물들인다. 생강나무 역시 은은한 향기를 퍼뜨리며 봄의 문을 넓게 연다. 바람이 스칠 때마다 그 향이 실려 와 마음 깊은 곳까지 스며들고, 그 향은 강하지 않으면서도 오래 남아 봄이라는 계절의 존재를 일깨운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르면 목련이 등장한다. 크고 단정한 꽃잎은 하늘을 향해 조용히 펼쳐지며, 그 자체로 하나의 완성된 세계를 보여준다. 순백의 목련은 마치 아무 말 없이도 많은 것을 전하는 사람처럼,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깊은 울림을 준다. 햇빛을 받은 꽃잎은 은은하게 빛나고, 흐린 날에는 또 다른 차분한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때로는 바람에 꽃잎 하나가 떨어져 내려와 발치에 머무르기도 하는데, 그 순간 한 폭의 그림처럼 고요하고 아름답다.
이어지는 계절의 흐름 속에서 개나리는 거리와 담장을 따라 노랗게 번져 나가고, 진달래는 산자락을 붉게 물들이며 봄의 색을 한층 더 깊게 만든다. 이른 아침 햇살 속에서 바라보는 개나리는 생동감으로 가득 차 있고, 저녁 무렵 붉게 물든 하늘 아래의 진달래는 또 다른 서정성을 품는다. 서로 다른 색과 형태를 지닌 꽃들이지만, 그 모든 것이 하나의 조화 속에 어우러져 봄이라는 거대한 그림을 완성한다. 정지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며, 하루하루 새로운 장면을 만들어낸다.
들판으로 시선을 돌리면 또 다른 생명의 축제가 펼쳐진다. 푸른 싹들이 연약한 몸으로 땅을 뚫고 올라와 햇빛을 향해 자라난다. 그 연두 빛은 아직 완전하지 않기에 더 눈부시고, 그 미완의 상태가 오히려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는 듯하다. 바람에 흔들리는 어린잎들은 마치 세상의 모든 가능성을 품고 있는 존재처럼 보인다. 이 작은 싹 하나에도 시간과 인내, 그리고 보이지 않는 힘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경이롭다. 논과 밭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걷다 보면, 그 연두 빛이 점점 짙어지며 하나의 넓은 물결을 이루고, 결국에는 풍성한 녹음으로 이어질 준비를 한다.
봄의 향연은 단지 눈으로 보는 풍경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감각 전체를 깨운다. 따뜻해진 공기, 촉촉한 흙냄새, 꽃향기, 그리고 멀리서 들려오는 새소리까지, 모든 것이 어우러져 하나의 거대한 교향곡을 이룬다. 이름 모를 새가 지저귀는 소리는 때로는 경쾌하고, 때로는 차분하며, 그 소리는 봄이라는 배경 위에서 더욱 선명하게 들린다. 그 속에 서 있으면 나 또한 그 일부가 되어 호흡조차 자연의 리듬과 맞닿아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러한 봄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새삼스럽게 감사의 마음을 느낀다. 아무리 길고 혹독한 겨울이 있어도 결국은 다시 꽃이 피고, 생명은 이어진다는 사실이 우리를 위로하기 때문이다. 복수초의 첫 빛에서 시작된 봄은 산수유와 생강나무, 목련과 개나리, 진달래를 지나 점점 더 풍성해지고,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자연이 얼마나 치밀하고도 아름다운 질서를 지니고 있는지를 깨닫게 된다. 그 질서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며 모든 생명을 이끌고 있다.
도시의 거리에서도 봄은 결코 멀리 있지 않다.
회색 건물 사이로 심어진 가로수에도 어느새 연한 잎이 돋고, 작은 화단에는 이름 모를 꽃들이 얼굴을 내민다. 바쁘게 지나가던 사람들도 어느 순간 발걸음을 멈추고 꽃을 바라보거나, 사진을 찍으며 그 순간을 남기려 한다. 그 짧은 멈춤 속에서 우리는 서로 다른 삶을 살면서도 같은 계절을 느끼고 있음을 확인한다. 바쁜 일상 속에서도 잠시 고개를 들어 하늘과 나무를 바라보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계절과 연결된다.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봄과 함께 더욱 밝아진다. 놀이터에서는 두꺼운 외투를 벗어 던진 아이들이 마음껏 뛰놀고, 그 모습은 그 자체로 생명의 활력이다. 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있는 노인의 얼굴에도 어느새 부드러운 미소가 번진다. 따뜻한 햇살이 얼굴을 감싸고, 부는 바람이 지나간 시간의 기억을 살며시 흔든다. 봄은 이렇게 세대와 시간을 넘어 모든 존재에게 고르게 스며든다. 그것은 특정한 누군가의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열려 있는 계절이다.
강가에 나가 보면 또 다른 봄이 있다.
얼음이 녹아 흐르기 시작한 물은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그 위를 스치는 바람은 아직은 차갑지만 어딘가 부드러움을 품고 있다. 물가에 돋아난 풀들과 꽃들은 물결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듯하고, 그 풍경은 현실과 반영이 어우러진 또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자연은 이렇게 다양한 얼굴로 봄을 표현하며, 그 모든 장면이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저녁이 되어 해가 기울어도 봄의 기운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낮 동안 따뜻해진 공기가 남아, 부드러운 온기를 오래도록 유지한다. 붉게 물든 하늘 아래에서 꽃과 나무들은 또 다른 색으로 변하고, 낮과는 다른 고요한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그 속에서 하루를 마무리하며 하늘을 올려다보면, 연한 빛으로 물든 구름 사이로 또 다른 내일이 준비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봄은 단지 낮의 풍경만이 아니라, 밤으로 이어지는 시간 속에서도 조용히 숨 쉬고 있다.
이렇듯 봄의 향연은 눈부시면서도 겸손하고, 화려하면서도 소박하다. 그리고 그 모든 순간은 찰나이기에 더욱 소중하다. 우리는 그 찰나를 붙잡을 수 없기에, 더 깊이 느끼고 더 오래 기억하려 한다. 나는 해마다 찾아오는 이 계절을 맞이하며, 매번 처음인 듯 설렘으로 자연을 바라본다. 어쩌면 우리는 매년 같은 봄을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매번 조금씩 다른 봄을 새롭게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주변을 천천히 바라본다. 어제는 미처 보지 못했던 작은 꽃 한 송이, 바람에 흔들리는 잎 하나, 그리고 그 사이를 스쳐 지나가는 빛까지도 놓치지 않으려 한다. 그 모든 것이 모여 지금 이 순간의 봄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봄은 우리에게 거창한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다만 잠시 멈추어 바라보고, 느끼고, 숨 쉬라고 말할 뿐이다.
아마도 그것이 우리가 봄을 사랑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랑은 해마다 반복되면서도 결코 닳지 않는다. 오히려 해를 거듭할수록 더 깊어지고, 더 넓어지며, 우리 삶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는다. 그렇게 봄은 단순한 계절을 넘어, 우리 마음속에 오래도록 머무는 하나의 풍경이 된다.
봄의 향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