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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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밭은 거룩하다


정성운
텃밭농부


 


5월이다. 거룩하신 부처님 오신 달이다. 온 산천이 푸르다. 생명의 기운이 넘쳐흐른다. 오래 전 국어 교과서에는 수필가 이양하의 ‘신록 예찬’이 실려 있었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찬탄하고 감사의 마음이 담긴 글이다. 물 흐르는 듯한 문체가 그 내용을 더욱 빛나게 했다.


“우리가 비록 빈한하여 가진 것이 없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러한 때 모든 것을 가진 듯하고, 우리의 마음이 비록 가난하여 바라는바 기대하는 바가 없다 할지라도 하늘을 달리고 녹음을 스쳐오는 바람은 다음 순간에라도 곧 모든 것을 가져올 듯하지 아니한가.”


농부들의 마음이 이러할 것이다.
5월의 들에는 새 생명이 자란다. 감자의 여린 잎이 흙을 뚫고 나왔다. 살포시 내민 싹이 불쑥 솟아오른 것 같다. 세상의 모든 어린 생명은 사랑스럽다. 보듬고 어르고 싶어진다. 보호본능을 일으킨다. 지난해 가을걷이를 하고 뿌렸던 호밀도 쑥쑥 자라 무릎을 넘었다. 바람이 불면 물결치듯 일렁인다. 밭이 초록의 물결을 이룬다. 황홀한 풍경이며, 내가 그 속에 있다는 것이 흥겨웁다. 나 또한 바람에 몸을 맡겨 부드러워지고 싶다.
모종을 내는 재미가 쏠쏠하다. 옥수수, 토마토, 상추, 고구마, 고추, 참외, 바질, 오이, 가지, 더덕, 아스파라거스, 지난 겨울부터 내가 모종을 내는 작물들이다. 이제 밭으로 옮겨 심을 준비를 해야 한다. 거름을 뿌리고 흙과 뒤섞이게 살짝 갈아주어야 한다.
모종을 내는 가장 큰 이유는 많은 작물의 원산지가 한반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원산지가 다르다는 것은 작물의 재배 조건 중 가장 중요한 기온과 습도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텃밭에 많이 키우는 감자와 고추의 원산지는 남미이다. 고온 건조한 지역이며, 이 기후 특성이 해당 작물의 유전자에 깊이 아로새겨져 있다. 개량을 하였어도 이 특성을 완전히 떨쳐내지는 못한다.
고추는 수많은 품종 개량을 거쳤고 우리 땅에 오랜 기간 적응했어도 그 특성이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다. 추위에 유독 약하다. 밭에 일찍 심으면 냉해를 입기 쉽다. 5월 중순에도 서리가 내린 경우가 있었는데, 노지에 심은 고추는 냉해를 피하지 못하며, 긴 장마는 습해를 준다. 비닐하우스 같은 시설을 갖추지 않고서는 기르기 쉽지 않다. 규모가 작은 텃밭이야 괜찮겠지만, 생업이 달린 농부들에게는 시설재배가 불가피하다. 고추가 한창 자라는 시기에 농부들은 하루이틀의 외출도 하지 않는다. 고추가 비쌀 수밖에 없는 이유다.
고추가 자라기에 적정한 기온은 낮 25~28, 밤 18~22도이다. 그래서 중부지방의 경우 최저기온이 15도 이상으로 오르는 5월 10일을 전후해 모종을 밭에 옮겨 심는다. 특히 씨앗이 움이 트는 시기에는 15도 이상으로 맞춰야 한다. 밭에 옮겨 심을 정도로 자라려면 최소 90일이 소요된다. 그러므로 고추 모종은 2월에 시작한다. 노지에서는 추워서 불가능하다. 그래서 온도를 높인 실내에서 모종을 내야 한다. 모종을 내지 않으면 키우기 힘든 작물이다.
고추 모종을 내지 않고 5월 중순쯤에 씨앗을 뿌려도 싹이 나긴 한다. 그러나 한창 자라야 할 때에는 기온이 30도를 넘는다. 정상적인 생장을 멈추며 수확량이 뚝 떨어진다. 고추는 우리나라에서는 기온이 맞지 않아 한해살이를 하지만, 원래 여러해살이 작물이다. 오래전 평택농업기술센터에 갔는데, 그곳 온실에서 10년이 넘는 수령의 고추나무를 보았다. 가지가 풍성했고 키도 훌쩍해 3m를 넘었다. 아래 표는 내가 가꾸는 농작물의 원산지를 나타낸 것이다. 작물의 원산지만 알아도 농사의 기본은 어느 정도 아는 셈이다.

작물
원산지
식물분류
감자
남미 페루와 에콰도르 등 안데스 산맥 일대
가지과(한해살이)
고추
중남미, 멕시코
가지과(여러해살이, 관목)
옥수수
남미 북부의 안데스 산맥의 저지대 혹은 멕시코
벼과(한해살이)
토마토
중남미
가지과(한해살이)
땅콩
남미
콩과(한해살이)
상추
유럽, 서아시아
국화과(한해살이)
고구마
남아시아 혹은 멕시코 고원지대
메꽃과(여러해살이)
참외
아프리카 사하라 남부, 인도 이란 터키 중국
박과(한해살이)
오이
인도
박과(한해살이)
가지
인도
가지과(한해살이)
더덕
한국 중국
초롱꽃과(여러해살이)
아스파라거스
남유럽
비자루과(여러해살이)
바질
인도 아프리카
꿀풀과(한해살이)
고수
지중해 연안
미나리과(한해살이)
농작물 원산지와 식물분류


토마토도 그렇다. 이 작물의 원산지 또한 중남미이다. 따뜻한 조건을 갖춘 곳에서 모종을 내어 5월 초에 밭에 옮겨 심는다. 이 시기에 이르러서야 자라기에 적합한 온도로 오르기 때문이다.
모종을 내는 두 번째 이유는 밭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리태(검은콩)와 백태(메주콩), 쥐눈이콩은 애써 모종을 내지 않고 6월 말에 직파해도 된다. 이때 심어 11월에 거둬들여도 수확량 감소가 없다. 이 콩들은 우리나라가 원산지다. 그런데도 굳이 모종을 내는 이유는 직파할 땅이 없기 때문이다. 내 밭은 감자와 마늘이 차지하고 있다. 두 작물을 6월 말에 수확한다. 수확 후 2~3주일 정도는 거름을 주고 밭이 쉬게 해야 하는데, 이 시차를 넘어서기 위해 모종을 내는 것이다. 모종을 내지 않고 한창 장맛비가 요란한 7월 초에 콩을 직파하면 수확량이 현저히 줄어든다.
세 번째 이유는 튼실하게 키우기 위함이다. 씨앗을 뿌려도 모두 싹을 내지 않는다. 벌레가 갉아먹고 새들이 쪼아먹는다. 쭉정이는 그대로 흙에 섞인다. 용케 살아남아 모종으로 자란 것 가운데 잘 자란 어린 것을 골라서 심으면 병해충에 강하다.
모든 작물을 모종을 낼 필요는 없다. 땅콩은 모종을 내지 않고 씨앗을 밭에 직접 심어도 잘 자란다. 땅콩의 발아적온은 최저기온 15도이므로 5월 중순에 직파하면 된다. 생육일수가 보통 140일 정도이니 이때 심으면 10월 말에 수확할 수 있다. 모종을 하지 않고 직파해도 생산량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작은 텃밭을 가꾸는 이들이 모종을 내는 일은 쉽지 않다. 씨앗을 간수하고 있어야 한다. 가장 좋은 씨앗은 내 밭에서 씨를 받은 것인데, 그러려면 씨받이와 보관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또 하나 어려운 것은 빛을 많이 받아들일 수 있는 곳이 있어야 한다. 아파트 베란다는 햇빛이 들긴 하지만 약하다. 유리창을 통과하면서 조도는 10분의 1 정도로 줄어든다. 이런 까닭에 싹이 움텄어도 웃자라기 십상이다. 나는 식물등을 설치해 빛을 보충해준다.
작은 텃밭을 일구면서 힘들여 모종을 낼 필요는 없다. 종묘상이나 농자재센터에서 모종을 사서 심어도 좋다. 모종하면 그 작물의 생애주기의 첫 단계를 보는 재미를 즐길 수 있다. 씨앗은 대개 온도가 적정하고 살짝 젖을 정도의 습기가 있으면 변화를 시작하는데, 습기를 머금은 껍질이 부풀어 오른다. 그 껍질을 뚫고 하얀 뿌리를 내민다. 이 뿌리를 유근幼根이라 한다. 이어 줄기를 내어 연두색의 떡잎이 나온다. 고요한 가운데 세상으로 나오려는 꿈틀거림이 느껴진다. 오묘한 생명 활동에 내가 참여한다는 착각에 빠진다. 내가 모종을 내는 이유는 작물의 첫 생명 활동에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