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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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희 법열한 마음은 보리심입니다

정우頂宇 스님
본지 발행인 | 구룡사 회주



『화엄경華嚴經』 「현수품賢首品」을 중심으로, 믿음을 근본으로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 믿음이란 곧 도의 근원이요, 공덕의 어머니입니다.
공덕功德이라는 가르침은 단순한 복이 아니라, 복덕福德과 지혜智慧를 함께 아우름입니다. 복에는 유루복有漏福과 무루복無漏福이 있는데, 유루복은 복이 다하면 소멸되지만, 무루 복은 다함이 없는 공덕입니다.
우리가 만약 수행을 통해 바라밀波羅蜜을 닦아 익히게 되면 능히 대승법大乘法을 구족하게 됩니다. 대승법을 이루게 되면 단순히 스쳐 지나가듯 부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여법하게 부처님께 공양供養을 올리게 될 것입니다.
여법하게 공양을 올리게 되면 부처님을 생각하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그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면, 항상 한량없는 부처님을 가까이 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보리심菩提心입니다. 믿음이 있어야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원력, 보리심이 일어나며 보시布施·지계持戒·인욕忍辱·정진精進·선정禪定·반야般若의 육바라밀六波羅蜜의 수행도 모두 이 믿음 위에서 올바르게 쌓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현수보살賢首菩薩은 문수보살文殊菩薩을 통해 믿음의 궁극적인 단계가 곧 부처님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깊이 믿는 그 순간, 내 마음속의 불성佛性이 깨어나 부처님의 지혜와 하나가 됩니다. 이럴 때마다 늘 상기시켜 드리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마명보살馬鳴菩薩의 『기신론起信論』을 원효元曉 스님께서 주석을 하신 『기신론소起信論疏』에 이런 가르침이 있습니다.
“있다고 할까? 아니 한결같은 목숨이 텅 비어 있고, 없다고 할까? 아니 만물이 다 여기로부터 나오네. 그것은 광활하여 허공과 같고, 그것은 평등하여 큰 바다와 같다.
이를 일컬어 도리 아닌 지극한 도리라 하며, 긍정 아닌 대긍정이라 하는 것이다.
입을 굳게 다물고 그것을 목격한 대장무가 아니고서야 누가 언설을 넘어선 대승을 논하고 사려가 끊긴 대승을 말할 수 있겠는가.”
제가 20대 초반 강원에 있을 때 이 구절을 접하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그 자리에서 바로 암송을 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글이 아니라, 내 마음 깊은 곳과 맞닿아 있는 어떤 곳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평생 잊지 않고 가슴에 새기게 된 것이라 생각 합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들어보셔도 편안하지 않으십니까? 좋으시지요? 있다고 할 수도 없고, 없다고 할 수도 없는 그 자리, 그것이 바로 일심一心이고 대승大乘이며 불성佛性입니다. 그 불성이 깨어나 부처님의 지혜와 하나가 되는 경계, 그것이 수행의 핵심입니다.
실천적 믿음이란 단순히 아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믿음을 바탕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다 보면 그 순간 이미 깨달음을 향한 길 위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마음의 때를 씻어내어 지혜의 거울을 맑고 밝게 닦는 것과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믿음이란 외부의 어떤 존재를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불성을 믿고 그 깨달음의 빛을 온전히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과정이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수행의 덕목입니다.
한량없는 부처님을 친견하게 되면 곧 여래如來의 본체가 항상 머무름을 보게 됩니다. 그 본성이 항상 머무름을 보게 되면, 법의 길이 사라지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또 끝없는 법을 설하는 것은 결국 자비慈悲와 연민심憐愍心으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함입니다. 그 마음으로 중생을 이롭게 하면 견고한 대비심大悲心을 얻게 되고, 대자대비와 대희대사 사무량심四無量心을 성취하게 됩니다.
우리가 수행의 단계로 말하는 십신十信·십주十住·십행十行·십회향十廻向·십지十地 가운데 지금 그 중에서도 50위의 초지인 곧 환희지歡喜地입니다.
이 환희지는 십바라밀 가운데 보시바라밀布施波羅蜜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환희지에 머무르면 언제나 기쁘고 즐거운 마음이 일어납니다.
부처님을 생각하면 환희하고, 가르침을 생각하면 환희하고, 보살을 생각하면 환희하고, 보살의 수행과 바라밀을 생각해도 환희하고, 부처님께서 중생을 교화하시는 모습을 보아도 환희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기쁨이 아니라 말로 다할 수 없는 경계입니다. 그래서 이를 환희법열歡喜法悅이라고 합니다.
세상에는 노력하는 사람도 있지만 타고난 사람을 능가하기는 어렵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즐기는 사람입니다. 환희법열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피곤한 줄도 모릅니다.
그래서 항상 불자들에게 당부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고단하게는 살아도 고달프게는 살지 맙시다.” 몸은 고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까지 고달플 필요는 없습니다.
이어서 제2지인 이구지離垢地는 때 묻지 않는 경계입니다. 이 경계에 이르기 위해서는 계율戒律을 지기며 실천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군종교구장 소임을 맡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논산 훈련소에서 훈련병들에게 수계식 법문을 하다가 훈련병들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여기 찻잔에 사탕수수 즙으로 만든 천연 주스가 한 잔 놓여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부처님 당시에도 이렇게 사탕수수를 짜서 올렸습니다. 이 주스를 마실 수 있습니까?”
훈련병들이 일제히 대답합니다.
“예. 마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물었습니다. “그럼 이 주스가 발효가 되어서 술이 되었습니다.
마실 수 있습니까?” “안 됩니다!” “왜 안 됩니까?” “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시 물었습니다.
“그 술이 발효되어서 식초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먹을 수 있습니까?”
“예. 먹을 수 있습니다.”
웃으면서 한마디 덧붙였습니다. “먹을 수는 있는데, 주스처럼 마시면 안 됩니다.”
그랬더니 훈련병들이 한바탕 웃음을 터뜨리더군요. 그 웃음 뒤에 이어서 말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제가 지어낸 게 아니라 부처님께서 법문하시다가 하신 말씀입니다.
자, 다시 생각해 봅시다. 처음에는 사탕수수 주스였습니다. 마실 수 있었지요. 그런데 발효가 되어 술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마시면 안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훈련병들이 대답합니다. “취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술을 마시면 취하게 되고 취하면 어떻게 됩니까?”
“실수합니다.” 그래서 ‘술은 백화百禍가 만발한다’고 합니다. 온갖 잘못이 거기에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술이 발효되어 식초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또 먹을 수 있다고 대답을 합니다. 같은 재료로 만든 사탕수수인데 어떤 때는 먹어도 되고, 어떤 때는 먹으면 안 되고, 또 어떤 때는 다시 먹어도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문제는 재료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탕수수 자체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것이 변화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그 현장에 있는 것입니다. 발효되어 술은 그 사람을 흐트러뜨리는 성질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렇다면 계율이란 무엇입니까? 단순히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대상 자체를 무조건 금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일어나는 작용을 보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라시대 때 화랑오계花郞五戒에도 보면, 단순히 살생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살생유택殺生有擇이라 했습니다. 즉, 생명을 해치는 것도 분별하여 판단하라는 것입니다. 바로 부처님 가르침의 지혜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만 가지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일어나는 작용과 결과를 보고 바르게 선택하는 것, 그것이 계율이고 그것이 수행입니다.
계율 속에 살아가는 사람은 정직한 마음, 부드러운 마음, 참을성 있는 마음, 스스로를 다스리는 마음, 고요한 마음, 순일하게 선한 마음, 넓고 큰 마음을 지니게 됩니다.
그래서 자연히 살생을 멀리하고, 원한을 품지 않으며, 자비와 용서를 갖춘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 교만심驕慢心과 방일放逸함을 버리게 되면 자신뿐 아니라 모든 중생을 이롭게 합니다. 그렇게 되면 생사 속에서도 괴로움에 얽매이지 않게 됩니다.
부처님께서도 “열반은 죽음이 아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바르게 살게 되면 지금 이 순간, 더 나은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젊음도, 건강도, 목숨도 모두 소중하지만 영원하지는 않습니다.
인과因果를 믿고 윤회輪迴를 부정하지 않는 삶을 산다면 우리는 더욱 당당하고 평온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이웃들과도 좋은 인연을 지으시기 바랍니다. 인연 있는 분들을 부처님 품안 따뜻한 가정으로 바른 삶을 이루는 불자의 길을 함께 걸어가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