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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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꽃이 지니 밭이 쑥 자란다

 


정성운
텃밭농부


봄의 가운데엔 어머니의 기일이 있다. 큰길 건너편 사패봉을 바라보는 묫자리 둘레를 할미꽃이 장엄하고 있다. 눈부신 햇살을 맞으며 할미꽃은 허리를 구부려 꽃을 피워내고 있었다. 어머니의 봄날은 언제였을까. 봄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어느샌가 물러났다. 따스하고 부드럽던 연초록의 시간은 어찌 이리도 짧은가. 누군들 가는 봄이 아쉬워 탄식하며 계절의 흐름을 붙잡을 수 있겠는가. 다가왔다 이내 흘러가는 것이 봄인 것을. 꽃비는 아름답지만 처연하다.


이내 흘러가는 것이 봄


봄꽃이 저리 화사하고 찬란했던 건 겨울 추위가 있어서다. 맵고 찬 시절이 없었던들 시시했을 것이다. 여름 또한 쉬이 오지 않는다. 두세 차례의 냉기를 몰아내야 햇살은 더 따사로워진다. 여름꽃은 봄의 아쉬움을 달래주기 위함이다. 가을꽃은 여름날의 땡볕과 무더위를 달래준다. 겨울에 피는 꽃은 흰 눈꽃이다. 고요 속으로 침잠하라는 뜻이다.
봄꽃이 지니 밭이 쑥 자란다. 무엇보다 먼저 풀이 올라온다. 삽으로 파고 뒤집고 흘러내린 흙을 북돋아 두둑을 높여주었다. 고사리와 아스파라거스를 두어 번 꺾었다. 더덕은 새순을 틔웠는가 싶었는데 어느새 넝쿨을 올리고 있다. 밭의 깊은 속은 보이지 않게 약동하고 있다.
내 밭의 사정이 많이 바뀌었다. 나에게 밭을 빌려준 임대인이 바뀌었다. 70대 중반의 노인인데, 평생 농사를 지어 식솔을 건사했다. 작은 체구이지만 경운기를 몰 때면 청년 이상의 몸놀림이다. 거기에다 오래도록 익혀온 농사기술까지 갖추었다. 바람을 보고도 내일 날씨를 아는 혜안이 있다. 더위가 기승이던 작년 여름에는 한밤중에 밭에 나와 고추에 약을 칠 정도로 부지런하다. 상농부임에 틀림없다.
배울 것이 한둘이 아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화학비료와 농약을 치고 기계를 들여와 농사를 짓는 소위 관행농이다. 밭둑엔 모두 검은 비닐을 씌운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것이, 그는 50년 넘도록 그렇게 농사를 지어왔다. 그의 밭엔 작물 외에 풀이라곤 없다. 유기농이니 자연농이니 하는 것은 그에게 농사가 아니다. 가족들을 먹여살릴 수 없으니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나에겐 풀을 제때 없애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렇지 않으면 풀씨가 바람에 날려 온 밭이 풀밭이 된다고 일렀다. 내년에도 이 밭에서 소소하게 가꾸는 재미를 계속할 수 있을지 고민 중이다.


달라이라마의 ‘농부들에게’


달라이라마의 글 중에 ‘농부들에게’라는 짧은 가르침이 있다. “농부들은 지구 환경과 인류의 건강에 커다란 몫을 차지하고 있습니다”라고 시작하는 이 글의 요점을 옮기자면, 자연의 섭리와 일치하는 농법에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얘기를 하는 이유로 달라이라마는 환경에 치명적인 해를 끼치지 않기 위함이며, 수명을 다할 때까지 살고자 하는 동물의 권리를 지켜줌으로써 인간으로서의 윤리적 책임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에 화학비료의 사용 줄이기, 산업화된 목축업자의 규모와 수의 감소를 제안하고 있다.
달라이라마의 가르침은 옳다. 화학비료와 농약의 남용으로 토양과 지하수가 오염되는 현실이 증명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화학비료 사용량이 세계 평균을 크게 웃돈다. 그렇지만 옳은 게 곧 현실이 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하여 옳음을 외면하자는 게 아니다. 현실이 되게 하는 긴 과정을 밟아가야 하는 과제가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그것을 실행하기 위한 현실 적용 가능한 방법도 궁리해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옳음은 현실이 된다. 달라이라마는 옳음을 얘기하면서 동시에 그 옳음을 현실화하려는 방편의 지혜를 찾아내야 한다고 늘 우리에게 주문한다. 달라이라마는 그것을 분별력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좋은 의도와 더불어 우리의 중요 능력인 분별력을 사용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분별력을 발휘하면 현실과 조화를 이루면서 상황에 대처하게 되고, 좋은 의도를 좋은 결과로 옮길 수 있습니다.”


영감은 내 밭을 지나갈 때마다 “마늘 참 잘 됐어. 자주 들여다보지도 않았는데 잘 됐어”라고 말한다. 마늘대가 굵고 잎이 푸르니 내가 봐도 잘 자라고 있다. 3월 하순쯤에 액비를 뿌려주고 김을 매주었고, 하늘이 두어 번 비를 뿌려주었을 뿐인데, 잘 자라주니 고맙다. 다음에 영감에게 내 마늘이 잘 된 이유는 액비 때문이라고 말해야겠다. 마늘에 뿌려준 액비는 음식물 쓰레기와 풀이 주원료다. 작년에 밭에 갈 때마다 음식물 쓰레기를 통에 붓고 물에 담가두었다. 음식물에 담긴 성분이 고스란히 우러났을 터이다. 
‘열 농부에 열한 가지 농법’이라는 말이 있다. 몇 해 전 귀농학교에서 들었는데, 누가 했는지는 모르겠다. 아마 오래전부터 농부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말이라 짐작된다. 뜻인즉, 농부들 각자가 자기 방법으로 농사를 지으니 내 생각으로 이래라저래라 입을 놀리지 말라는 것이다. 이 말은 지당하다. 똑같은 말을 들어도 듣는 이들은 자기의 생각을 덧붙이거나 경험의 필터를 거쳐 받아들인다. 또 밭마다의 사정이 다르다. 진 밭도 있고 푸석한 밭도 있다. 비탈 밭도 있고 평평한 밭도 있다. 조건에 따라 방법이 정해진다. 농사를 짓는 이의 태도에 따라 농법이 만들어진다. 그러니 하나의 방법만이 통할 리 없다.


올여름은 어떨까, 맞서는 수밖에


절기는 농경사회의 지혜다. 한국민속대백과사전에서는 24절기의 특징과 의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비록 우리나라의 기후와 정확하게 들어맞지 않는 면도 있지만, 농경사회에서는 나름대로 농사의 기준이 되는 대단히 중요한 날이었다. … 24절기는 계절을 가늠하는 기준으로 농경에 활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세시 명절이나 그에 버금가는 날로 의의가 있다.”


2천 년 전에 중국 화북지방에서 만들어진 절기는 지금도 농사에 활용된다. 전남 보성군은 “겨울이 가고 24절기 중 첫 번째 절기인 입춘이 지나 생장이 멈췄던 맥류(보리, 밀)의 생육재생기를 설날 전후로 판단한다”면서 맥류가 생육재생기 단계에 접어들면, 10일 이내에 웃거름을 주라고 알리고 있다. 5월엔 여름이 시작되었음 알리는 입하立夏와 소만小滿이 들어 있는데, 입하 즈음에 이르면 산과 들에 신록이 일면서 논밭에는 해충이 많아지고 잡초가 무성해지는 등 본격적으로 농사일이 바빠지기 시작한다.
입하를 ‘보리가 익을 무렵의 서늘한 날씨’라는 뜻으로 맥량麥凉, 맥추麥秋라고도 한다. 놀라운 관찰이다. 입하를 전후한 시기에 기온이 뚝 떨어지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이르는 것이다. 작년에는 대관령의 기온이 영하로 떨어졌고, 전국적으로 냉해를 입었다. 올해는 냉해를 입을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4월 말의 최저기온이 10도 이하로 떨어졌다. 5월 중순까지는 저온 현상이 가끔 나타난다. 고온건조한 지역이 원산지인 고추·토마토 같은 작물은 냉해를 입을 수 있으니, 너무 이르게 심지 않도록 해야 한다.
작년 여름은 가혹할 정도로 더웠다. 밤에도 기온이 내려가지 않은 열대야가 9월 말까지 이어졌다. 밤 기온이 30도에 이른 적도 있었는데, 언론에서는 초열대야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런 중에도 다행스러웠던 것은 태풍이 우리나라를 비껴갔고, 장마가 짧아 물난리를 겪지 않았음이다. 기상청은 바닷물 온도가 예년보다 높았다면서 올여름 역시 폭우와 폭염이 잦을 가능성이 크다고 알렸다. 알았으니 맞서는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