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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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아가야할 자세









   정우(頂宇) 스님
   본지 발행인
   구룡사 회주


세상의 모든 것에는 자성(自性)이 없습니다. 마치 물〔水〕은 항상 그릇에 따라서 변화하고 모양이 달라지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죄업(罪業)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천수경(千手經)》에서 『죄무자성종심기(罪無自性從心起)이면 심약멸시죄역망(心若滅時罪亦亡)이요, 죄망심멸양구공(罪妄心滅兩俱空)이면 시즉명위진참회(是卽名爲眞懺悔)』라 했습니다. 즉, 죄업에는 자성이 없기 때문에 마음을 멸하면 모든 죄업들도 소멸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몸 없는 마음만 가지고 살라는 게 아닙니다. 한결같은 마음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가르침 입니다. 분별하지 않고 시비하지 않는 삶을 살면 그것이 청정무구한 인생이 될 것입니다.
진정한 참회(懺悔)는 그런 것입니다. 따라서 지나간 시간에 너무 연연해서는 안 됩니다. 다가올 미래를 향해서 한걸음한걸음 나아가도 영원히 내일은 만날 수 없는 게 인생사(人生事)입니다. 그러한 인생을 살면서 지나간 시간에 얽매여서 스스로 매몰되는 상실감으로 일어나지 못하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나를 믿으라. 나를 따르라. 내가 법이다.” 이런 식으로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이라, 스스로를 등불로 삼고, 법을 등불로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내 스스로에게서 찾아야 한다는 가르침으로 일깨워주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늘 자비로운 마음으로 고통과 괴로움을 받는 우리들을 도우셨습니다. 우리가 겪는 현실의 행복과 불행은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내는 것임을 45년 동안 한결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가 행동하는 그 결과물이 우리가 겪어야 하는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출가한 이후 수많은 경전을 접하고 조사어록을 보고 있습니다만, 처음 출가할 때 배웠던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을 근간에 자주 떠올립니다. 그 중에 특히 원효(元曉)스님의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에 『파거불행(破車不行)이요 노인불수(老人不修)』라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이 가르침은 부서진 수레(자동차)는 굴러갈 수 없고 나태하고 방일하고 방종한 인생을 사는 이는 수행자라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노인이라는 표현은 연세 드신 분을 의미(意味)하지는 않습니다.
너나없이 세상이 힘들다는 이야기들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더 자신의 모습이 어떤지 스스로 들여다볼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어제는, 구룡사 가족법회에, 25년 전 구룡사가 천막법당이었을 때부터 다니던 80이 넘은 노보살님이 오셔서 하룻밤을 유숙하고 초하루 법회까지 참석하고 가신다고 해서 그리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노보살이 법회를 마치고 점심공양 끝에 저를 “개인적으로 만났으면” 하신다기에 제 방으로 모시고 왔습니다.
그 보살님은 1.4후퇴 때 함경도 함흥에서 오시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 시부모님과 헤어질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젊은 부부만 내려오게 되었답니다. 그렇게 남한으로 내려오려는데 시어머님이 결혼할 때 주셨던 쌍가락지와 똑같은 크기의 금반지 2개를 빼주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이거라도 가지고 가서 힘들고 어려우면 처분해서 굶지 말라”고 하셨답니다. 그 금반지 중에 3개를 가지고 오셨습니다. 하나는 경제적으로 힘든 피난시절 시동생에게 주고 3개의 반지는 지금까지 가슴에 품고 살으셨다는데,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스님, 스님 앞에서 저의 인생을 정리하려고 합니다.” 안타깝게도 그 노보살은 후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절에 오셔서 사시라고 했습니다. 통도사 자비원에라도…
숨 한 번 안 쉬면 떠나가는 것이 인생인데, 생전에 스스로의 인생을 정리하기란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스스로를 정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저자신도 벌써, 몇 차례 인생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뒤돌아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늘 다짐하고 있습니다.
“여한 없는 인생을 살도록 노력하자. 후회 없는 인생이길 바란다.”
여한 없는 인생을 살게 되면 최소한 후회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자기 인생을 사는 데에는 다섯 가지 알맞은 시기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첫째, 머리카락이 백발이 되기 전에 마음을 다잡아서 정진할 수 있는 불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공부는 다음에 하지” 라고 미루지 말고 머릿결이 새까맣고 젊음을 유지하고 있을 때 공부하라는 말씀입니다.
둘째, 적당한 체온을 유지하고 있을 때 공부하라고 하셨습니다. 질병에 노출되지 않고 건강한 체력을 가지고 있을 때, 음식의 소화가 잘되는 시기에 공부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셋째, 살만할 때 공부하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것이 편안하고 넉넉하고 흡족할 때 공부도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벌어 오늘 먹고, 오늘 하루 산다는 생각으로 인생을 살아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넷째, 물과 우유처럼 서로 융화할 수 있는 이들이 가까이에 있을 때 공부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이들이 주변에 있을 때 공부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정승집 개가 죽으면 조문객이 문전성시를 이뤄도 정승이 죽으면 문상객이 없다” 고, 정작 자신이 어렵고 힘든 일을 당했을 때, 이웃에서 마음 써주는 사람이 없는 그런 인생을 살아서야 되겠습니까.
다섯째, 사부대중이 서로 화합할 수 있을 때 공부하라 하셨습니다. 서로에게 감사하고, 평화로움을 지니며, 믿음 없는 이에게 믿음이 생겨나게 하고, 믿음 있는 이에게는 더욱 신심이 견고해질 수 있는 그런 일을 앞장설 수 있을 때 그가 바로 복된 삶을 살게 되는 적절한 시기일 것입니다.


요즘, 점점 세상이 어렵고 힘들다고들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살이에 이 몸처럼 소중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 이 몸인데도 이 몸은 무상(無常)하다고만 합니다. 심약하고 견고하지 못해서 이내 쓰러질 것처럼 구성되어 있는 사대오온(四大五蘊)은 언제나 세상을 떠날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현명한 사람들은 불안전하고 불확실함속에 안주하지 않습니다. 지나간 일, 놓을 때는 내려놓고, 잘못한 일이 있으면 참회하고 잘못한 일은 반복하지 않으며, 뉘우침으로 어리석음을 없게 하는 삶이 지혜 있는 사람들의 진정한 공부일 것입니다. 이 몸은 물거품과 같아서 오래 지탱할 수 없습니다. 천년만년 살 것처럼 생각하다가 낭패 보는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인생을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이 몸은 들꽃 같습니다.
이 몸은 파초 줄기 같습니다.
이 몸은 허깨비 같습니다.
이 몸의 인생은 꿈과 같습니다.
이 몸은 그림자 같습니다.
이 몸은 산울림 같습니다.
이 몸은 뜬구름 같습니다.
이 몸은 번갯불 같습니다.”


그렇다고 이 몸을 영원히 내 것이 아니라고 해서 아무렇게나 살라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야기 합니다. 똑같은 집인데도 주인이 사는 집하고 세들어 사는 집하고 부서지는 속도에 현격한 차이가 있다고요.
인생은 결국 생로병사(生老病死)의 반복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부귀영화를 바라고 있지만, 그 인생은 늘 고독한 현실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태어날 때, 죽을 때, 괴로움을 겪을 때, 생사윤회의 길을 혼자 가는 것은 각자의 몫입니다. 따라서 우리 불자들은 계율(戒律)이라는 규범(規範), 선정(禪定)이라는 삼매(三昧), 반야(般若)라는 지혜(智慧)의 삶을 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삶이 바로 보살(菩薩)의 원력(願力)을 드리우는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열반경(涅槃經)》에서 탐욕(貪慾)의 결과물이 얼마나 힘들고 무서운 일인가를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탐욕은 바람에 거슬려 불을 붙잡고 있는 것과 같으니, 그것을 따라 타는 까닭이다. 탐욕은 꿈과 같으니, 홀연히 나타나 홀연히 없어지는 까닭이다. 탐욕은 빌린 물건과 같으니, 형세가 오래 지속되지 못하는 까닭이다. 탐욕은 칼과 같으니, 베고 쪼개는 까닭이다. 탐욕은 독거미와 같으니, 무서운 까닭이다. 탐욕은 바람이 솜털을 날리는 것과 같으니, 지킬 수 없는 까닭이다. 탐욕은 허깨비와 같으니, 사람을 의혹하게 하는 까닭이다. 탐욕은 어둠과 같으니, 보이는 것이 없는 까닭이다. 탐욕은 장애물이 놓인 길과 같으니, 온갖 선법을 가로 막는 까닭이다.  탐욕은 형틀과 같으니, 몸과 마음을 묶어놓은 까닭이다. 탐욕은 어리석음과 같으니 정념을 잃어버리게 하는 까닭이다. 탐욕은 도둑과 같으니, 공덕을 해치는 까닭이다. 탐욕은 원수와 같으니, 싸움을 일으키는 까닭이다. 탐욕은 괴로움과 같으니, 여러 재앙을 만드는 까닭이다.
이렇게 탐욕의 재앙을 비추어보고 거기에서 벗어나는 공덕을 관찰하면 이를 일러서 탐욕을 벗어난 사람, 대자유인이라 하느니라.』
탐욕은 어리석음과 노여움이 포함되어있는 번뇌입니다. 망상(妄想)을 말합니다. 탐욕은 번뇌요 망상입니다. 이 마음을 가지고 있는 한 우리는 상대를 용서할 수 없고, 이 마음을 가지고 있는 한 상대를 다독거릴 수 없고, 이 마음을 가지고 있는 한 옹색한 그 마음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오욕(五慾)은 칼에 묻어 있는 꿀과 같다”고 했습니다. 꿀을 탐익해서 칼날을 빨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상처를 입겠지요. 이렇게 무서운 탐욕에 우리는 노출되어 있고 탐욕에 매몰되어 있으면서 목말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결국 계정혜(戒定慧) 3학(三學)의 보살의 업을 닦아 나가는 사람만이 치유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탐욕은 무섭습니다. 탐욕만 무서운 것이 아니라 어리석음도 무섭습니다. 어리석음만 무서운 것이 아니라 내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노여움, 성냄과 분노의 짜증스러움이 있는 한 이 노여움은 우리들을 망치게 합니다. 이렇게 탐욕의 재앙을 비추어보고, 거기서 벗어나는 공덕을 관찰하면, 이를 일러 탐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 참자유인 이라 하는 것입니다.


올해, 제등행렬에 모였던 불자들의 선근(善根)과 지혜(智慧)를 바라다보면, 가슴이 저립니다. 그 모습 속에 신심으로, 환희한 마음을 드러내는 그 모습에서 크게 위로를 받습니다. 좌절하고 포기하는 상실감에 사로잡혀 있을 대중들이 있으련만, 손에손에 손잡고 함께 어울림을 가지는 불자들은 이 시대의 보살이었습니다.
“그런 인생을 살지 못하는 모습을 부끄러워하면서 내 남은 인생은 승가공동체의 아픔을 치유할 수 있는 자양분이 되어야 겠구나!”
발원해 봅니다.
2600여 년 동안 전 세계 불자들은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거룩한 부처님, 거룩한 가르침, 거룩한 스님들-께 의지하며 살아왔던 불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지금도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한 생각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상실감에 사로잡혀 거기에 매몰되지 말고 툴툴 털고 일어나서 떳떳하고 당당한 불자의 모습을 잃지 않았으면 합니다.
사는 게 힘들다고 행복하지 않다는 것도 아니고, 지금 내가 행복하다고 나에게 고통과 괴로움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행복을 부르고, 기쁨을 부르는, 환희한 마음도 내 마음으로부터 비롯되어지는 것입니다.
어떤 문제도 그 문제를 문제 삼으면 문제입니다. 그러나 어떤 문제도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하면 해답은 있습니다. 그런 인생을 우리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살아왔지만, 문제가 주어졌을 때 절대로 포기하거나, 절망하거나, 체념하지 말고,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짚고 일어설 수 있는 힘과 용기와 지혜를 가지는 불자이기를 염원(念願) 합니다.
모두의 신심과 원력으로 진정한 삶을 대중들과 앞장서서 나아가는 세상이 되도록 부처님오신날을 봉축(奉祝)하고자 합니다.
E-mail :
venjungwoo@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