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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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선종이 우리에게 남긴 교훈

신규탁
연세대 철학과 교수/한국선학회 회장


1.
중국의 당나라 때에 정비되어 송나라 때에 크게 번성한 선종禪宗은 중국 전 지역에 널리 퍼져서, 당시 많은 사대부 계층들이 ‘선禪’에 대한 소양을 갖추게 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사대부들과 선사들이 서로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선 수행에 관한 논의를 하기도 하고, 시인들의 작품 활동 속에서 선과 불교를 운운하기도 하고, 그림 등 당시의 예술 작품 속에 선이 소재가 되기도 하고, 차인茶人들 사이에 다선일미茶禪一味를 운운하기도 했던 것이 그런 실례이다. 
이런 가운데에 빼놓을 수 없는 단어가 바로 ‘마음 心’이다. ‘마음’의 문제를 둘러싸고 선승 쪽에서 유교의 사대부들 쪽으로 파고 들어간 경우도 있고, 역으로 사대부 쪽에서 선종의 사상 쪽으로 파고 들어온 경우도 있다. 옛 중국 땅에서 이렇게 유교와 불교의 양쪽의 인물들이 서로 교류를 했지만, 그렇다고 그들 학파만의 고유하고도 전문적인 영역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쪽 지식인들이 상호 교류할 수 있었던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두 가지 측면에서 그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외형적인 측면이고, 둘째는 내용적인 측면이다. 외형적인 측면이란, 유교와 불교 양쪽에 속한 인물들이 자신들의 철학이나 사상을 주고받는 데에 사용하는 언어 코드를 공유하고 있었던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내용적 측면이란, 위에서 말한 그 양쪽의 인물들이 서로 문제 삼는 철학이나 사상의 주제를 공유했던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렇게 두 방면에서 서로 공유共有가 가능했던 것은 서로 사이의 ‘일치감’이다.
다시 말하면 두 가지 ‘일치감’이 불교도와 유교도 사이에 있었다. 첫째는 당시의 일반 사람들도 알아들을 수 있는 일상어와 구어口語를 사용해서, 그것도 대화의 형식을 사용했던 것에서 일치감을 공유할 수 있었다. 둘째는 유교와 불교 측에서 학문적으로 다루는 ‘마음 이론’에 대한 생각에서 일치감을 공유할 수 있었다. 선불교의 ‘마음 이론’이나, 당시 신유학의 ‘마음 이론’은 상호 유사한 점이 상당하게 많다. 여기에는 당시 화엄교학자들의 역할이 매우 컸다. 화엄학자들에 의해 마련된 토대를 바탕으로 거듭난 중국화 된 불교인 선불교는 이제는 더 이상 중국인들에게 외래의 종교 사상이 아니었다. 이미 자신들의 사상이 되어버렸다.


2.
필자는 바로 이 점에 주목하여, 현재 ‘대한민국’의 지성계에 남종선(특히 간화선)이 파고들기 위해서는, 또는 그 역 현상이 일어나게 하기 위해서는, 위에서 말한 옛 중국의 사례에서 교훈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서 이 땅에 지금, ‘선禪을 하는 자들’은 이 시대의 지식 또는 지식인들과 어떤 일을 해야, 그 속에서 또는 그와 더불어 선禪의 외연을 확장시킬 수 있을까? 위에서 필자는 ‘선禪’이 선승들만의 것이 아니고, 당시 지식인들 전체의 것으로 되어간 핵심 이유로 두 측면에서의 ‘일치감’을 들었다.
이런 연장선에서 이 땅에서 이 시대의 ‘일치감’을 형성하기 위해 필자는 역시 두 가지 측면에서 한국에서 ‘선禪을 하는 자들’이 노력해야 할 것을 주장한다. 첫째는 외형적인 측면인데, ‘선禪을 하는 자들’은 우리 지성계에서 ‘소통되는 언어 코드’를 통해서 자신들의 사상을 드러내야 한다. 둘째는 내용적인 측면인데, ‘선禪을 하는 자들’은 현대의 지성들이 ‘문제 삼는 지식’을 명확하게 알고 그것과의 관련 속에서 소통해야 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한자어를 그대로 음音만 바꾸어 말하지 말고 일상어로 소통해야 한다. 이것이 외형적 측면이라면, 내용적 측면에서 말하면 근현대의 특성을 알고 ‘선禪’을 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전의 봉건사회 속에 없었던 근현대의 특성으로는 필자는 서유럽에서 시작된 ‘개인의 발견’과 ‘경험 과학의 발견’이라고 생각한다. ‘개인’과 ‘과학’에 대한 사회적 확산은 옛중국의 봉건사회에서는 볼 수 없었던 현상인데, ‘선禪’이 이 시대의 지성들과 소통을 하려면 이 분야의 지식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3.
인간의 마음에 대한 이론적 논의는 당나라시대가 되면 이미 여러 불교학자들에 의해 공감대가 여러 방면으로 확산되었다. 그리고 이런 공감대는 종래의 유학에도 영향을 주어 새로운 유학이 일어나는 계기를 마련했다. ‘강경講經’이라는 경전 연구의 전통 속에서 그들은 마음이론을 정립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불교 쪽의 화엄교학자와 남종선의 선승들, 그리고 송대의 신유학자들은 저마다 사용하는 용어와 경전의 전승은 서로 달랐어도 인간 심성을 논하는 철학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소위 도덕형이상학을 공유하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신유학의 ‘인성론’인데, 그들은 그런 인성론을 바탕으로 ‘수양론’도 펼쳤다.
물론 ‘수양론’ 역시 그런 도덕형이상학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심성의 형이상학적 구조에 대해서는 화엄교학자들이나 남종선의 선사들이나 모두 동일한 ‘틀’을 가지고 있다. 그런 ‘틀’ 위에 화엄교학자들은 ‘관법觀法’ 수행을 비롯한 보살행을 강조했고, 남종선의 수행자들은 ‘반조反照’ 또는 ‘간화看話’ 수행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새롭게 대두되는 주자학에서는 ‘태극설’과 ‘기론’들을 종합하고 불교의 도덕형이상학의 사유 틀을 원용하여, ‘이기론理氣論’을 세웠고 그로부터 수양이론을 정립시켜갔다.
인간의 본성과 수양을 논함에 있어, 북송을 거쳐 남송시대에 접어들면서 유가와 불교를  막론하고 당시 지식들 사이에는 적어도 구조적인 논의의 ‘틀’을 공유하고 있었다. 독서인이라면 당시의 현실적인 문제를 놓고 자유롭게 서로의 의견을 소통할 수 있는 지식 환경이 되었다. 당나라 시대의 공영달에 의해 정비된 『오경정의』와 같은 류의 훈고적이고 현학적이고 가법을 지켜야 하는 그런 ‘경학’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자유로운 형식으로 ‘강경講經’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상황은 불교 쪽도 마찬가지이다. 교학승들의 훈고적이고 주석적인 교판 연구가 아니라, 일상 속에서 서로의 문답을 통해서 불교의 핵심을 자유롭게 논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학문적 사조는 결과적으로 불교이던 유교이던 학문을 대중화시킬 수 있었다. 학자들만의 전문적인 용어가 아닌 일상의 언어로 얼마든지 당시의 철학적 문제들을 담론할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경전이라는 ‘먹물’과 ‘종이’에 의존하지 않더라도, ‘제 마음’을 관찰하여 인간의 도덕적 가치와 삶에 대한 토론의 장으로 쉽게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것도 자신의 삶 속에서 실천과 연관지어가면서 말이다.


4.
결과는 대단했다. 불교 쪽으로 보면 ‘남종선’의 확산이겠고, 유교 쪽으로 보면 ‘성리학’의 확산이다. 이제는 그 어느 쪽도 훈고적 교리 연구와는 거리를 두면서 자신들의 철학적 사유를 드러낼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거기에는 훈고적 교리 연구 즉 경학經學의 단단한 전통이 바탕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전통에서 다져진 문제들이 이제는 ‘강경’과 ‘대화’라는 방법을 통해서 거리의 ‘시민’에게로 확산되어갔다. 모든 사람이 석가와 같은 ‘부처’가 되는 길을 찾게 되었고, 모든 사람들이 요임금과 순임금과 같은 ‘성인’이 될 수 있다는 철학이 확산되었다. 명나라 시대 양명학陽明學의 출현도 이런 연장선에서 보아야 한다. 이렇게 볼 때에 신유학(주자학+양명학)의 확산이나 남종선의 확산은 앞 시대에 마련된 철학적 문제들을 수용하되, 그것을 담론하는 방식을 강론과 대화로 바꾸었던 것에 힘입은 바 크다. 책상머리에서 혼자 사유하고 글 쓰는 것과는 사뭇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이상과 같은 지성의 역사 속에서 현대의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의 앞 시대에 축적된 사상 전통을 계승하고, 그것을 지금 이 땅에 유행하는 사상과 소통시키는 것이다. 물론 방법은 강학과 대화를 통해서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현재 한국에서 강조하고 있는 ‘간화선’의 전승과 전통을 분명하게 파악하고, 그것을 현대의 언어로 재구성할 줄 아는 능력 갖춘 ‘선禪하는 사람들’을 양성해야 한다. 그와 동시에 그들에게 현대 사회에서 통용되는 각 방면의 철학사상을 습득하게 해야 한다. 그리하여 간화선을 포함한 불교의 전통과 방법으로 지금의 문제들에 대한 대답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중국 선종의 역사에서 배워야 할 점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