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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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이 출현하게 된 믿음 -「비로자나품 제6」

신규탁


연세대 철학과 교수


1.
말과 생각. 아마도 철학을 전공하여 그것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을 직업으로 삼아서 그런지, 필자는 말과 생각과의 관계를 특히 생각한다. 책에 적힌 글자를 읽으면서도, 이 글을 쓴 사람은 무슨 말을 했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깊이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 이 점은 아마도 다른 사람들도 그럴 것이다.
그러면 ‘말’이란 무엇일까? ‘말’이 나오는 시초와 그 과정을 자세하게 스스로 살펴보면, 먼저 ‘생각’이 머리에 떠올라와 있다. 그런데 좀 더 살펴보면 ‘생각’과 ‘말’은 시간적으로 어느 것이 먼저이고, 어느 것이 뒤인지 엄밀하게 나누기가 쉽지 않다. 특히, 분명한 생각일수록 말과 밀접하고 시간적으로 붙어있다. 말로 분명하게 표현할 수 있는 생각과, 아직 그 단계까지 못 간 생각과,
이 둘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말과 결합되기 이전의 생각은 대부분 모호한 생각이다. 그런 모호한 생각으로 서로 간에 소통하기는 어렵다.
무엇에 대한 생각이 있으면, 그 생각이 말로 표현할 수 있을 만큼 생각을 선명하게 하려고 노력한다. 말로 생각을 선명하게 하고, 다시 생각대로 말이 표현되는지를 점검한다.


2.
『화엄경』을 읽으면서도 필자의 이런 습관은 여전하다. 『화엄경』을 문자로 기록한 사람은 분명 무슨 생각을 했을 것이고, 그 생각을 문자로 적어놓은 것이리라. 본인이 직접 문자로 적었는지, 아니면 본인은 그저 말로만 했고 글로 적은 사람은 따로 있었는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가 없다. 중국의 고전 『논어』의 경우는, 공자님과 제자들이 주고받은 이야기가 먼저 있었고, 그것을 뒷날 제자들이 문장으로 옮긴 것이다. 불교의 아함부에 속하는 경전들도 그렇다.
<월간 붓다> 지면을 통해 『화엄경』을 독자 여러분들께 소개하면서도, 눈으로 보는 것은 경에 적인 문장이지만, 이 문장을 쓴 또는 말한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에 마음을 집중한다.
세월의 손을 타서 뒷날 최종적으로 완성된 『화엄경』은 총 39품으로 이루어져 있다. 순서를 배정하는 데에도 배치 작업을 한 사람의 생각이 들어있을 것이다.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때문에 『화엄경』을 읽는 독자들도 이 점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오늘 소개하려는 「비로자나품 제6」도 그런 맥락에 읽어볼 필요가 있다.
「세계성취품 제4」와 「화장세계품 제5」가 인과응보의 관점에서 ‘결과’라면, 이곳 「비로자나품 제6」은 ‘원인’에 해당한다. 경전의 내용과 관련해서 좀 더 분명하게 말하면, “비로자나 부처님께서 지난 세상 오랜 겁 동안 쌓은 공덕이 원인이 되어 세계가 만들어졌다.”


「화장세계품 제5」 첫머리를 운허 스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한글로 번역하셨다.
그 때에 보현보살이 다시 대중들에게 말하였다.
“여러 불자들이여, 이 화장장엄세계해는 비로자나 부처님이 지난 옛적 세계해의 티끌 수 겁 동안 보살행을 닦을 때에 낱낱 겁마다 세계해의 티끌 수 부처님을 친근하였고 낱낱 부처님 계신 데서 세계해의 티끌 수 큰 서원을 닦아서 깨끗하게 엄정한 것이니라.”


표현도 참으로 묘하다. 비로자나 부처님이 만들었다는 말도 아니다. 그러면서도 세상이 만들어진 결과에 비로자나 부처님이 무언가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하다. 그게 무엇인가? 세계가 만들어진 것과 무슨 관련이 있다는 말인가? 한마디로 말하면, 보살행을 닦은 공덕이 원인이 되어 세계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비로자나 부처님이 세계를 만들기 위해 공덕을 쌓고 발원한 것도 아니다. 더구나 세계 만들기가 목적이 되어, 그 목적 달성을 위해 수행을 한 것도 아니다. 수행하고 발원 하다 보니, 그것도 긴 세월 그렇게 하다 보니, 그 결과로 세계가 만들어졌다는 발상이다. 수행이 원인이고, 세계가 결과이다. 참으로 대단한 발상이다.


3.
그러면 대체 무슨 수행을 하고 무슨 발원을 하셨기에 광대무변한 세계가 만들어졌는가? 그 대답을 우리는 「비로자나품 제6」에서 읽을 수 있다. 아래에서 그 수행의 사연을 간단하게 추려본다.
아주 오랜 옛날에 ‘보문정광명’이라는 이름의 세계가 있었다. 이 세계 속에는 다시 무수한 세계가 포진되어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승음세계’이다. 전생 이야기는 바로 이 ‘승음세계’ 속 어떤 한 나라의 ‘보화지륜’이라는 이름의 숲 속 절에서 시작된다. 그 나라 임금 이름은 ‘희견선혜’이고, 태자의 이름은 ‘대위광’이었다. ‘대위광태자’가 바로 비로자나 부처님이 지난 세월 보살행을 닦던 전신前身이다. 경전의 이런 형식을 본사(本事, ..itiv.ttaka)
라고 한다.


간략하게 태자가 닦은 보살행 10가지를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1)삼매 체험 수행을 했고,
(2)모든 부처님 말씀을 듣는 수행을 했고,
(3)바라밀 수행을 했고,
(4)중생을 어여삐 여기는 수행을 했고,
(5)중생을 불쌍히 여기는 수행을 했고,
(6)중생들과 함께 기뻐하는 수행을 했고,
(7)제법의 실상을 알아차리는 마음 평정 수행을 했고,
(8)신통 얻는 수행을 했고,
(9)불법에 대한 믿음과 이론을 완성하는 수행을 했고,
(10)지혜를 언어로 잘 설명하는 수행을 했다.


세월이 흘러 아버지 임금이 승하하시자 ‘대위광태자’가 자리를 이어 전륜성왕이 되었다. 당시 ‘마니화지륜’이라는 이름의 숲에서 차례로 여러 부처님이 출현하셨는데, 임금이 된 태자는 그 때마다 많은 공양을 올리고 법문을 들어 깨침을 얻는다.


4.
비로자나 부처님의 전신이었던 대위광태자의 수행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겁 동안 계속된다. 그 사이에 출현하여 교화를 마치고 입멸하신 부처님도 차례로 세 분 계셨다. 처음 만나 가르침을 받은 부처님은 ‘일체공덕수미승운여래一切功德須彌勝雲如來’이시고, 둘째 부처님은 ‘바라밀선안장엄왕여래波羅蜜善眼莊嚴王如來’이시고, 셋째 부처님은 ‘최승공덕해여래最勝功德海如
來’이시다. 이름은 이름 주인의 서원과 소망을 담고 있다.
「비로자나품 제6」을 읽는 독서 포인트는 수행이 원인이 되어 그 원력으로 세계가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이 점에 주목하면서 독서하고, 이와 더불어 수행의 내용을 살펴보는 것도 중요하다. 한마디로 말하면 보살행이 원인이 되어서 세계가 만들어진다는 발상이다. 브라만교의 『베다』나 기독교의 『성경』에 나오듯이 절대자의 의지에 의해 세계가 생겼다는 창조설이 아니다. 그렇다고 중국의 도교에서 말하듯이 기氣의 운행에 따라 저절로 그렇게 된다는 자연설도 아니다. 인도에서부터 중국에 이르기까지 불교에서는 세계 생성에 관련하여 ‘무인설無因說’과 ‘사인설邪因說’을 비판했다. 그러면서 ‘인연설因緣說’을 제시했다. 브라만교나 기독교는 원인을 제시하기는 했지만, 잘못된 원인을 제시하는 오류를 범한 꼴이다. 중국의 도교는 원인을 제시하지 않고 저절로 그런 것이라 했으니 이는 ‘무인설’의 오류를 범한 셈이다.


어느 주장이 옳고 어느 주장이 그르다는 판단을 내리기에 앞서, 세상과 인간을 이해하고 그것을 말로 표현하는 다양한 방식을 관망하는 것이 필요하다. 사람은 무언가에 대해 생각을 하게 마련이고, 그렇게 생각된 것은 말과 결합되어 문자로 기록되어 오늘에 전해진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관망하면서, 과연 인간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또 어떻게 표현 기록했는가를 보는 것만으로도 그것은 의미 있는 독서일 것이다.
이와 더불어 경전에 사용되는 고유명사 등이 어떻게 표현되었는가를 살피는 것도 독서의 또 한 맛이다. 이 글의 <3>에 나오는 고유명사를 차례로
살펴보자.


보문정광명普門淨光明 넓은 문 깨끗한 광명
승음세계勝音世界 수승한 음성 세계
보화지륜寶華枝輪 보배 꽃가지 바퀴 숲
희견선혜喜見善慧 기쁘게 보는 선한 지혜
마니화지륜摩尼華枝輪 마니 꽃가지 바퀴 숲


한글 번역은 모두 운허 스님께서 하신 것이다. 그림 감상하듯이, 그 명칭들을 바라보고 있자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승음세계勝音世界’만 하더라도, 우리 글로 ‘수승한 음성 세계’이다. 이 세계의 특징을 드러내는 핵심이 ‘음성’이다. ‘음성’을 매개로 얽혀지고 소통하고 유지되는 세계인가 보다. 그런 세계를 배경으로 보살행을 거론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