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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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암 성총의 뒤를 이어 조계가풍을 중흥시키다

무용 수연(1651~1719)


오경후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


스님의 법명은 수연秀演이고, 자字는 무용無用이다. 멀고 가까운 곳의 스님들과 속인들이 모두들 무용이라고 불렀으므로 마침내 이를 당호堂號로 삼았다. 속성은 오吳씨이고 전북 익산군에서 출생하였다. 고려 때 태위太尉 벼슬을 지낸 문양공文襄公 오연총吳延寵의 후손으로 대가 끊이지 않고 조선에까지 이르렀다. 스님의 증조부인 하몽下蒙은 벼슬이 통훈대부通訓大夫 행정의현감行旌義縣監과 행무안현감行務安縣監에 이르렀고, 할아버지 응정應鼎은 벼슬이 통정대부通政大夫 행순천부사行順天府使에 이르렀으며 가선대부嘉善大夫 한성부漢城府 좌윤左尹에 추증되었다. 아버지 섬무暹武는 절행벽단첨사絶行碧團僉使를 역임하였다.
아버지가 어느 날 누런 무늬를 띤 호랑이(大蟲)가 꿈틀거리며 공중으로 올라갔다가 얼마쯤 지나자 다시 내려와서 집을 여러 바퀴 도는 꿈을 꾸고 난 뒤 부인에게 태기가 있어 1651년(효종 2) 3월 13일에 옥동자를 낳았다. 어린아이는 탄생할 때부터 특이하였으며 몸뚱이는 곱고 깨끗하였고 이마가 각이 진 것이 오뚝하게 생겼었다. 스님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슬기로웠고 말수가 적었으며, 나이 겨우 여덟 살에 경사經史를 배우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서사書史에 들어가서 한두 번 읽고는 곧바로 보지 않고 외웠으며, 그 뜻을 남김없이 알아냈다.
열세 살 때 갑자기 부모를 여의고 오직 형에게 의지하였다. 그러나 곤궁하고 외로운 처지에서도 삼분오전三墳五典과 제자백가諸子百家 등을 모두 수집하여 열람하면서 글귀를 뽑아 글이나 짓는 작태는 조금도 없었으므로 이로 인해 이름이 널리 퍼졌다. 나이 19세가 되자 덧없는 인생이 순식간임을 살피고서 출가할 큰 뜻을 내고는 형에게 알리지도 않고 빠져나와 남쪽 길을 향하다가 우연히 조계산 송광사에 들어가서 혜관 노사惠寬老師에게 출가하였으며, 그 산의 혜공慧空 대사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스님은 체격이 장대하고 얼굴이 방정하였으며, 가슴속이 쇄락灑落하고 남의 장단점을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오직 도道만을 따르고 명리를 좋아하지 않으면서 문을 닫고 조용히 지내었다. 나이 22세가 되었을 적에 어른 스님이 “예로부터 대도大道를 통하고 심원心源을 깨닫는 자는 선禪과 교敎를 병행함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니 선문에만 전념한다면 그것이 이치상 옳겠는가?”라고 하는 말을 듣고는 번연翻然히 태도를 고쳤다. 그 후 26세에 침굉枕肱 스님의 문하에 나아가서 알현하고 선지禪旨를 듣고는 다시 일러주지 않아도 통달하였으므로, 침굉이 “원돈圓頓의 법계가 온전히 너에게 있다.”라고 찬탄하였다.
다시 백운산의 백운암에 들어가서 1년 동안 정혜定慧를 닦았으며, 조계산 은적암隱寂庵에서 백암栢庵 스님을 배알했을 때는 경전의 어려운 부분을 물었다. 백암이 한번 보고는 크게 기특하게 여겨 문도에게 “이 사람은 고현古賢의 자리를 빼앗고, 금선金仙의 문을 활짝 열 것이다.”라고 말하니, 문도가 모두 경외하였다. 스님이 이로 인해 여기에 주석하였는데, 경經을 가지고 토론할 때마다 의견이 합치되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새로 깨닫게 되는 점도 더욱 많았다. 그래서 몇 년 사이에 장경藏經을 모두 섭렵하고는 그 뒤에 용문산龍門山 금화동金華洞 신불암新佛庵, 팔영산八影山 칠불암七佛庵 등을 유유자적 돌아다녔고 수석정水石亭을 짓고 다시 내관內關을 수련하였다.
1680년(숙종 6) 가을에는 금화동金華洞 신불암新佛庵에 먼저 수행하고 있던 선교의 참학들이 매우 간절히 요청하자 스님이 그 인연에 응하였는데, 새로 참여한 자들이 또 많아서 그 장소가 비좁았으므로 본사本寺의 미타전彌陀殿으로 이주하였다. 1682년(숙종 8) 가을에는 선암사의 요청에 응하고, 1683년(숙종 9) 여름에는 송광사의 요청에도 응하였다. 스님의 가르침을 청하는 자들이 많아질수록 자신의 일에 방해가 되자, 밤중에 희양산의 옛 거처인 백운암으로 몸을 피해 정혜定慧의 수행에 더욱 힘썼다. 또 이듬해 봄에는 팔영산 제칠봉 아래로 석장을 옮긴 뒤에 하나의 빈터를 얻어 띠 풀을 베어서 지붕을 얹고는 선관禪關을 정밀히 닦아 혜해慧解가 더욱 빛났다.
이후 송광사에서는 백암을 재차 참알參謁하고 󰡔화엄소초華嚴疏鈔󰡕를 받아 자세히 탐구하고 은미한 뜻을 찾아내어 그 정수를 모두 터득하였다. 1689년(숙종 15) 봄에 백암이 징광사로 가서 󰡔화엄연의華嚴演義󰡕 및 󰡔대명법수大明法數󰡕·󰡔간정기刊定記󰡕·정토서淨土書 등을 간행하여 인천人天의 안목眼目을 열어 주려고 할 때 스님도 함께 그 일을 도왔다. 또한 1692년(숙종 18) 봄에는 선암사의 선오禪伍 스님이 백암을 청하여 화엄회를 크게 베풀자 사부대중이 노루를 쫓듯 몰려갔는데 스님도 따라갔다. 그해 늦겨울에 백암이 지리산으로 거처를 옮기자 스님도 본사의 창파각滄波閣으로 거처를 옮겼는데, 그때 대중의 숫자가 1백 인을 채웠다. 1694년(숙종 20) 봄, 대중의 요청으로 송광사 은적암에 머물렀다. 1699년(숙종 25)에 요청을 받고 동리산으로 갔다.
1700년(숙종 26) 7월에 백암 성총 스님이 지리산 신흥사에서 입적하자, 부음을 듣고 달려가 곡哭하였다. 스님은 다비식을 거행하고 나서 대중이 강석講席을 이어받기를 청했으나 거절하였는데, 대중이 더욱 간절히 청하자 비로소 개당開堂을 허락하였다. 스님이 이듬해 봄에 칠불암으로 옮겼는데 선려禪侶와 의학義學들이 더욱 많이 몰려왔다. 그래서 낮에는 강의하고 밤에는 참선하면서 남을 지도하고 자기를 다스리는 일을 밤낮으로 게을리 하지 않았다.
1704년(숙종 30) 봄에는 갑자기 대중을 물리치며 말하기를, “부질없이 혀를 놀리기보다는 전심專心으로 염불을 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라고 하고는, 옷자락을 떨치고서 용문龍門의 은봉암에 거하였다. 이로부터 가르치기도 하고 그만두기도 하는 등 일정하게 따르는 기준이 전혀 없었는데, 학도가 추종하는 것이 마치 새들이 난 새가 날아가는 대로 따라다니는 것과 같았다.
스님은 1710년(숙종 36) 봄에는 송광사로 돌아와 강송講誦하는 여가에 사원의 동쪽 시냇가에 손수 대臺를 쌓고 수석정水石亭이라는 정자를 세우고는 “돌은 단단하면서 고요하니, 내가 이를 통해서 마음을 보존하고 흔들리지 않게 하려 함이요, 물은 흘러가면서 맑으니, 내가 이를 통해서 외물에 대응하며 걸림이 없게 하고자 함이다.(石堅而靜석견이정 吾以欲存心而不動오이욕존심이부동 水流而淸수류이청 以欲應物而無滯이욕응물이무체”라고 하였다. 이는 바로 어떤 상황을 당하든 간에 잡았다 놓았다 하며 무애자재하게 외물에 응하는 도리로서, 전현前賢의 광채를 배태胚胎하고 후세의 사람들에게 모범이 될 만한 것이었다.
이후 호남과 영남의 여러 사찰에서 남의 사범師範이 되고 이름을 내걸 만한 자들이 화엄과 선문에 대해서 강의해 주기를 청하니, “나 자신이 바르지 못한데 어떻게 남을 바르게 하겠는가?”라고 하여 사양하였지만, 더욱 독실하게 청하였으므로 법좌에 올라 불자拂子를 휘두르며 심오한 뜻을 설파함에 낙락한 원음圓音이 중중무진하게 서로 비치자 강회講會에 참석한 사람들이 모두 습복慴伏하였으니, 이 어찌 비인秘印을 전해 받아 허리에 차고 임제臨濟의 종풍을 크게 드날린 것이 아니겠는가.
1719년 10월 17일 지극정성으로 염불을 하다가 왼발을 오른쪽 무릎에 얹고 열반에 드니, 세속 나이는 69세이고 법랍은 51년이었다. 장례식에 승속이 모두 모였으며, 의식에 번여幡旟와 모정旄旌의 깃발이 이처럼 성대한 것은 일찍이 없었다고 한다. 다비의 불길이 일어날 때 상서로운 구름이 일고 숲과 산 색깔이 변하였으므로 보는 자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이듬해 봄에 문인 낭형朗烱 등이 탑을 세웠다.
스님에게 수업을 받고서 각각 가죽(皮)과 살(肉)과 정수(髓)를 얻어 남의 사범師範이 되거나 암혈에 깊이 숨어 자기 한 몸을 선하게 하는 제자들이 또한 많은데 영해 약탄影海若坦과 두륜 청성頭輪淸性 등 모두 22명이 있다. 약탄은 1724년(영조 원년) 문집을 간행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일찍부터 스님의 문지방을 드나들며 자주 귀한 말씀을 듣고 이 도道에 들어올 줄을 안 자이니, 어느 것 하나도 선사께서 귀를 끌어당겨 일러 주시고 손바닥을 가리켜 보여 주신 가르침 아닌 것이 없다. 그러고 보면 그 은혜는 천지와 같았고, 그 정은 골육보다도 더하였으니, 은정恩情이 그러하다면 비록 금수라도 목숨을 바쳐서 그 덕에 보답하려 하지 않는 경우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