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頂宇 스님
본지 발행인 | 구룡사 회주
입하立夏가 되었습니다. 봄인가 싶으면 여름이고 가을인가 싶으면 겨울입니다. 엊그저께 카렌 다를 제작한 것 같은데, 벌써 5월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불기 2567년 부처님오신날입니다. 청정법신淸淨法身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원만보신圓滿報身 노사나불盧舍那佛, 천백억화신千百億化身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부처님께서 80여년을 사바세계에서 우리와 함께하시며 전법하시다 떠나신 해입니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연호입니다.
거기에 80년 생애를 더하면 2647년 전 부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불기佛紀를 부처님의 탄생일로 쓰지 않고 열반일로 세우신 것은 부모님께 물려받은 이 몸은 모두 본래 자리로 돌아가야 하고 수행덕목인 깨달음의 자리, 보리심과 지혜의 덕목은 영원하다는 것을 보이시기 위함입니다.
종단에서는 대중들에게 제시했던 “전법 합시다. 부처님 법 전합시다.” 입니다.
4월 초파일이면 인연 있는 가족들과 이웃들이 부처님오신날을 맞이하며 절을 찾고, 불교에 귀의하는 이들이 많은데, 그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 길을 떠나자.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으니 조리 있는 말로 알아들을 수 있도록 전하자. 왔던 길로 되돌아오지 말고 두 사람이 함께 가지도 말자. 모든 이의 이익과 안락과 행복을 위해서 길을 떠나자. 나도 우루벨라 병장촌에 가서 법을 설하리라.” 하신 전법선언입니다.
절에 오면 왔는가, 가면 가는가 하지 마시고, 불교와 인연을 맺을 수 있는 이, 불교와 인연을 맺을 수 있도록 하는 전법이 선근善根이고 지혜智慧가 있는 불자들의 참모습이며 보리심의 발현일 것입니다.
그간 공부한 『화엄경華嚴經』 「십지품」을 총괄적으로 상기시켜드리고자 합니다.
“불자여, 보살마하살이 이러한 지혜에 편안히 머물렀는데, 모든 부처님 세존이 다시 그에게 과거 현재 미래의 지혜와, 법계의 차별한 지혜와, 일체 세계에 들어가는 지혜와, 일체 세계를 비추는 지혜와, 일체 중생을 인자하게 생각하는 지혜이니, 중요한 것을 들어 말하자면 일체 지혜의 지혜를 얻도록 말하였느니라.”
일체 세계를 비추는 지혜의 지혜는 태양이 24시간 365일 상주한 것처럼 그대로 빛을 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체 세계를 비추는 태양빛 같은 지혜는 항상 있는데, 지구는 자전을 하면서 낮과 밤으로 어둠과 밝음을 드리우는 이치처럼, 일체 세계를 비추는 지혜의 현상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신 분, 편안하신 분, 넉넉하신 분, 너그러우신 분, 포근하신 분이십니다.
“이 보살이 십바라밀 중에서 지혜바라밀을 높이 여기는 것이니 다른 바라밀을 닦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제10 법운지法雲地를 간략하게 말함이며 만일 널리 말하자면 한량없는 아승지겁에도 다할 수 없느니라.”
일체 지혜의 지혜를 법운지 보살은 십바라밀 중에서 지혜바라밀을 가장 높이 여긴 뜻이 여기 있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불자여, 이 보살마하살은 십지十地의 행상行相이 차례로 앞에 나타나면 능히 일체 지혜의 지혜에 들어가느니라.”
10지의 행상이란 환희지歡喜地 이구지離垢地 발광지發光地 염혜지焰慧地 난승지難勝地 현전지現前地 원행지遠行地 부동지不動地 선혜지善慧地 법운지法雲地로 나타나 능히 일체 지혜의 지혜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보살도 그와 같아서 보리심으로부터 선근과 큰 서원의 물이 흘러나와 자慈, 비悲, 희喜, 사捨 사무량심四無量心과 보살이 중생을 제도하고 섭수攝受하기 위해 행하는 보시布施, 애어愛語, 이행利行, 동사同事의 사섭법四攝法을 중생에게 가득 차게 하지만 거기에 다하지 아니하고 더욱 불어나게 해서 일체 지혜의 지혜까지 들어가 가득 차게 하는 것이니 보살의 보리심은 이처럼 다함이 없습니다. 늘 불자들에게 그래서 스스럼없이 이야기하곤 하였습니다.
“정우 스님은 욕심이 없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욕심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불자들은 그 말을 들으면 씨익 웃습니다. “스님만큼 불사에 대한 욕심 많은 스님이 어디 있어~~~” 하고요. 그러나 그 욕심은 『열반경涅槃經』에 보면 원력입니다. 원력에 비추어 보면 큰 욕심 맞습니다. 그러나 그 욕심은 다함이 없는 보리심菩提心에서 신심과 원력으로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지보살을 부처님의 지혜로 인因하여 차별이 있는 것이 마치 땅에 열 개의 산이 있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설산雪山으로부터 향산香山, 비타리산鞞陀梨山, 신선산神仙山, 유건타산由乾陀山, 마이산馬耳山, 니민다라산尼民陀羅山, 작갈라산斫羯羅山, 계도말저산計都末底山, 수미로산須彌盧山에 이르기까지 열 개의 큰 산으로 구분지어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십지를 산에 비유했는데, 그 열 개의 산이 모두 바다에 근거를 두고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하더라는 것입니다.
히말라야 산 협곡에 가면 망치질 하는 소리가 들리기도 합니다. 그쪽에 사는 사람들이 관광객들에게 팔기 위해서 화석을 캘 때 들려오는 소리입니다.
이것만 봐도 히말라야 산은 본래 바다와 연결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바다에서는 열 가지의 모양으로 큰 바다라는 이름을 얻어서 고치거나 빼앗을 수 없다 하셨습니다. 그 열 가지는 “첫째 차례로 점점 깊어짐이요, 둘째 송장을 받아 두지 않음이요, 셋째 다른 물이 그 가운데 들어가면 모두 다 본래의 이름을 잃음이요, 넷째 모두 다 한 맛이요, 다섯째 한량없는 보물이 있음이요, 여섯째 바닥까지 이를 수 없음이요, 일곱째 넓고 커서 한량이 없음이요, 여덟째 큰 짐승들이 사는 곳이요, 아홉째 조수가 기한을 어기지 않음이요, 열째 큰 비를 모두 받아들여도 넘치지 않음이라‘ 하셨습니다.
그 열 가지 이름이 큰 서원을 내어 점점 깊어지는 연고로 붙여진 환희지이며, 일체 파계한 송장을 받아드리지 않는 연고로 붙여진 이구지며, 세간에서 붙인 거짓 이름을 여의는 연고로 붙여진 발광지며, 부처님의 공덕과 그 맛이 같은 연고로 붙여진 염혜지며, 한량없는 방편과 신통인 세간에서 만드는 여러 가지 보배들을 내는 연고로 붙여진 난승지며, 인연으로 생기는 매우 깊은 이치를 관찰하는 연고로 붙여진 현전지며, 넓고 크게 깨닫는 지혜를 잘 관찰하는 연고로 붙여진 원행지며, 광대하게 장엄하는 일을 나타내 보이는 연고로 붙여진 부동지며, 깊은 해탈을 얻고 세간으로 다니면서 사실대로 알아서 기한을 어기지 않는 연고로 붙여진 선혜지며, 일체 모든 부처님 여래의 큰 법의 밝은 비를 받으나 만족함이 없는 연고로 붙여진 법운지가 그것입니다.
몇 년 전 부다가야에서 열린 달라이라마 스님의 법회에 참석하기 위해 방콕 공항에서 비행기를 탔는데, 옆자리에 불자인 베트남 국회의원이 앉게 되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 국회의원에게 베트남 전쟁이 끝난 지 몇 십 년 밖에 되지 않았는데, 우리나라와 미국과 국교를 수립하고 호의적으로 교역할 수 있는지를 물어보았습니다. 이에 그 국회의원이 하는 말이, “지금은 먹고 사는 것이 제일 큰 문제이기 때문에 선진국이라고 하는, 잘 사는 나라의 문물을 접하고 도움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전쟁을 잊어버리자는 것이 아니라, 묻어두자는 것입니다.”라는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모공이 일어설 만큼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자세가 대인의 행동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잊어버리자는 것이 아니라 묻어두자는 것, 화로 속에 불씨를 담아놨다면 그대로 놔두면 그냥 보기에는 불기운이 없어져 보이지만, 그 안에 불기운은 그대로 담겨 있음을 보면서 우리도 사회주의 국가와 국교를 수립하고 교역을 하고 있는 모습과 일맥상통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최근 주변국과의 관계에서도 생각해 보아야 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시험문제는 아는 문제부터 먼저 풀고, 그 다음에 알쏭달쏭한 문제를 풀어야 하고, 그러고도 시간이 남으면 모르는 문제를 푸는 것이 정석입니다.
공부는 모르는 것부터 배우고 아는 문제는 확인하는 복습만 하면 됩니다.
그런 일들을 할 수 있는 것이 지혜가 아닐까 싶은 마음을 가지게 합니다.
바다는 아무리 많은 비가와도, 모두 받아들여도 넘치는 일이 없습니다.
물론 태풍이 몰아치거나 해일이 일어나거나 조수간만의 차이로 인해 사리 때 낮은 지역에는 물이 범람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바다는 아무리 많은 비가와도 넘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원효 스님은 『금강삼매론金剛三昧論』에 “있다고 할까 아니 한결같은 목숨이 텅 비어있고, 없다고 할까 아니 만물이 다 여기로부터 나오네. 그것은 광활한 것이다. 대 허공과 같이 사私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평등한 것이다. 큰 바다와 같이 지극히 공평한 것이다. 그것을 일컬어 도리 아닌 지극한 도리라 하며 그것을 일컬어 긍정 아닌 대 긍정이라 하는 것이다. 대승, 그것을 목격한 대장부가 아니고서야 누가 언설을 넘어선 대승을 논하고 사려가 끊긴 대승에 깊은 믿음을 일으키게 할 수 있으랴.”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비 한 방울 똑똑 떨어지는 물이 개천으로 흘러가고 강으로 이어져 바다로 들어갑니다. 이렇게 한강도 오대양 육대주와 맞닿아 있습니다.
『화엄경』 「십지품」까지 익히고 배웠으니, 이제 나는 누구인지 스스로를 자문해보는 시간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정답을 찾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더 이상 괴로워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갈 것인가. 욕지전생사欲知前生事요 욕지내생사欲知來生事라, 전생을 알고 싶으면 지금 내가 처해있는 현실을 보고, 내생에 내가 어디로 갈 것인지 알고 싶으면 지금 살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면 될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수없이 많은 보살님이 계십니다. 산의 숲처럼, 사탕수수밭처럼, 옥수수 밭처럼, 대나무 숲처럼 촘촘히 박혀서 부처님의 법음을 전하고 있는데 우리는 어찌 그것을 볼 수 없는 삶을 살고 있는지 스스로를 되돌아봐야 합니다. 죽는 것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편안하게 죽을 수 있는 삶을 살 것인지. 우리 모두는 결국 죽는다는 것은 알지만, 그 사실을 자주 잃어버리고 살아갑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그런다고들 합니다. 그래서 우울하고 불안하고 두렵다고도 합니다. 하지만 평화롭게 맞이할 수 있는 자비심을 키우고, 연민심을 가지며, 늘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야 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살아간다면, 의미 있는 일들은 다 이루어질 것이라는 생각과, 떠날 때 회한의 눈물은 흘리지 않을 것이라는 마음을 십지품의 가르침에서 다 시 한번 살펴보았으면 합니다. 냇물이 강물 되고 강물이 바다로 이어져 오대양 육대주가 떨어져 있지 않음을 알았으면 합니다. 중생들의 분별심으로 여기서 저기까지는 남한강, 여기서 저기까지는 북한강, 여기까지는 한강, 저기부터는 서해바다라 하며 분별식심分別識心으로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