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준
고전연구실 뿌리와 꽃 원장

신석정 시인의 꿈에 대한 시가 있다. 한 대목을 감상하고 이야기를 시작해본다.

어머니
먼 하늘 붉은 놀에 비낀 숲길에는
돌아가는 사람들의
꿈같은 그림자 어지럽고
흰모래 언덕에 속삭이던 물결도
소몰이 피리에 귀 기울여 고요한데
저녁바람은 그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언덕의 풀잎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내가 어머니 무릎에 잠이 들 때
저 바람이 숲을 찾아가서
작은 새의 한없이 깊은
그 꿈을 깨우면 어떻게 할까요?

갑자기 꿈 이야기를 꺼낸 것은 교계기자 생활을 30년 동안 했던 지인이 하고 있던 일을 한 고비를 마감하면서 지은 시를 읽고 나서이다.
그 지인은 시의 마지막 구절에 30년 세월을 녹여내어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30년짜리 꿈이었음을 알았다고 하면서다.

아, 아프니까 알겠네
긴 꿈 또한 꿈이었음을.(2017.6)

신석정 시인은 꿈시의 끝부분을 이렇게 마무리 하고 있다.

꿈이 아니면 찾을 수 없는
아 그 꿈에서 살고 싶어라

숲길을 휘돌아 실개천 건널 때
너는 이렇게 이야기 하드고--

그때 산비둘기는 둑에서 조으느라고
우리의 이야기를 엿들을 사이도 없었건만
낮에 뜬 초승달만 내려다보던 것을……

조선시대의 문인 이서우는 앞서 간 부인이 꿈에 언뜻 보였다가 사라져버리자 시를 지었다.

玉貌依稀看忽無 옥모의희간홀무
覺來燈影十分孤 교래등영십분고
早知秋雨驚人夢 조지추우경인몽
不向窓前種碧梧 불향창전종벽오

옥 같은 용모 어렴풋하여
보려하니 홀연히 사라져버렸네
깨어보니 등불 그림자만
외로이 타오르고
가을비가 사람의 꿈 깨울 줄
일찍이 알았더라면
창문 앞에다가
벽오동을 심지 말았을 것을

망자를 애도하는 도망시悼亡詩이다. 오동나무 잎에 투둑 떨어지는 빗소리에 그만 잠도 꿈도 다 깨고 말았다.
어느 선사스님은 대나무에 부딪치는 돌조각 소리에 생사의 긴 꿈에서 퍼뜩 깨어나기도 하였다.
사실 인생이 한나절 꿈이라고 하는 말은 인생이 부질없으니 정신줄 놓아도 된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정신을 붙잡고 있는 보이지 않는 고무줄의 탄력을 끊임없이 업그레이드 시키라는 말일 터이다.
그 빗소리에 선비만 꿈을 깬 것이 아니라 오동나무도 봉황새와 차담을 나누던 꿈이 깨버렸을지도 모른다. 오동나무의 꿈속에 찾아왔던 봉황새도 그만 덩달아 졸음에서 깨어나 날개를 퍼득거렸을 것이다.
야구선수가 어깨에 힘을 빼면 오히려 장타를 날리고 골프선수가 팔에 힘을 빼면 공이 목표점에 가까이 가듯이 인생은 꿈이다 하고 인생에 대한 나의 생각에 들어있는 힘을 쭈욱 빼면 오히려 인생을 활기차게 운전할 수 있다.
잘나가던 강타자가 어느 날 자기도 모르게 어깨에 힘을 잔뜩 주고 방망이를 휘두르면 휘두르는 족족 헛방망이질이 될 가능성이 크다. 어쩌다가 야구공을 때리게 되어도 엉뚱하게 옆쪽 관중석으로 날아가 버린다.
생각의 힘이 자연스럽게 빠지려면 몸에 들어가 있는 힘을 빼야 하고 몸에 들어가는 힘을 빼려면 생각의 힘을 빼야 한다. 생각과 몸에 들어가 있는 잔뜩 웅크린 채 용쓰고 있는 힘이 자연스럽게 빠지면 생각에 온기가 돌고 몸에는 온수가 돈다.
생각과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는 상태에서 굳은 상태로 진전되면 삭신이 쑤시지 않는 곳이 없게 되고 다른 사람이 별 생각 없이 무심하게 던지는 한마디에 엄청난 마음의 내상을 입게 된다.
정신고무줄에 탄력이 붙어있으면 누가 마음을 건드리는 이야기를 해도 여유롭게 아차 내가 이걸 놓치고 있었구나 하고 안으로 돌이켜볼 수 있지만 정신고무줄이 어떤 원인으로 인해서 굳거나 탄력을 잃은 채 늘어져 있으면 그게 말처럼 쉽게 되지를 않는다. 그래 꿈이다 하고 넘어가도 될까말까한데 굳어있는 정신고무줄은 꿈속에 있었던 일을 현실의 일이라고 착각까지 하게 만든다.
실제로 전에 만난 어떤 사람은 전화 통화에서 심한 말을 듣고 참으려고 애쓰다가 못 참겠다 싶어 전화를 걸어 상대방에게 실컷 험한 말을 쏟아부었다. 그런데 상대방 사람이 그런 적이 없다고 진지하게 하는 말을 듣고 곰곰 생각해보니 앞에 자신이 심한 말을 들은 것은 꿈속에서 벌어진 일이었다고 했다.
정신고무줄을 놓을 때 놓아주고 당길 때 당겨주면 좋은데 그 고무줄을 너무 많이 놓아버리면 정성스레 살펴주는 친딸에게 “누구신데 저한테 이렇게 잘해주세요?” 하고 질문을 던지게 된다. 이때 친딸이 고무줄을 세게 당겼으면 한바탕 난리가 났을 터인데 그 딸이 여유롭게 고무줄을 늦추어서 가볍게 상황을 넘어갔을 거라고 짐작만 해본다.
이태백의 정신고무줄의 탄력을 짐작하게 해 주는 시가 있다.

衆鳥高飛盡 중조고비진
孤雲獨去閑 고운독거한
相看兩不厭 상간양불염
只有敬亭山 지유경정산

시의 제목은 <경정산에 홀로 앉아(獨坐敬亭山)>이다.

뭇새들 높이 날아가면서 사라지고
외로운 구름 한가로이 흘러가누나
두 가지 바라보며 싫증나지 않으니
그저 경정산이 있을 뿐

경정산은 중국 황산에서 뻗어 내려오다가 가지에서 솟아난 산이다. 안휘성에 있는 산인데 서울의 북악산(348m)보다 조금 낮다고 한다. 이태백이 이 시를 짓는 바람에 유명세를 치루고 있는 산이기도 하다. 그건 그렇고 이태백의 정신고무줄은 날아가는 새도 세게 당기지 않고 구름에 연결되어있는 고무줄은 아예 풀어주고 있다. 날아가는 새들도 이태백을 잡아당기려는 생각이 애시 당초에 없다. 구름은 어쩌면 고무줄 자체가 없을지도 모른다. 산은 이태백이 앉아있든 서있든 걸어 다니든 그저 산으로 있을 뿐이고 이태백도 방석 당기듯이 산을 당겨서 앉아있는 것도 아니다.
이쯤 되면 이태백의 정신고무줄은 당기고 놓아줌이 자동 조절되는 고무줄이다.

내 몸 어딘가에 당김 증세가 있다면 내가 마음의 고무줄 몇 가닥을 나도 모르게 지나치게 당기고 있다는 신호이다. 당겨진 고무줄은 풀어주고 동시에 늘어진 고무줄은 적절하게 잡아당겨서 탄력을 회복시킬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