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규탁(연세대 명예교수, 철학 전공)
1.
범망경 <상권>에서는 대승을 추구하는 불교 수행자가 지켜야 하는 가치 덕목을 크게 넷으로 나누어 10항목씩 묶은 <10발취심>, <10장양심>, <10금강심>, <10지>를 단계별로 제시하고 있다. 이런 이야기는 월간 『붓다』 지면에서 필자는 자주 하는 편이다. 그만큼 대승의 실천 덕목이 집약적으로 정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 본래의 가르침 전통을 지키기 위해 훗날의 승가 공동체는 끊임없이 노력해 왔다. 노력하는 방법에서 서로 입장이나 부파部派에 따라 교리적으로 비판을 하기도 했지만, 궁극의 목표는 초기의 부처님 가르침을 제대로 실천하고 남에게도 전하자는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에는 신神이 아닌 인간人間이라는 발상이 근본이다. 그리고 인간이나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세상이란, 운명적으로 정해진 섭리나 신의 계시로 움직여지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모든 사안이나 현상을 분류하고 쪼개어 분석해서 그리고 ‘언어화’해서 ‘생각하는’ 방법을 활용하여 그것들이 어떤 인과 관계로 생성 변화하고 이합 집산하는지를 ‘알고’, 그 ‘앎에 근거해서 행동’하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언어’이다. 음성이 되었건 혹은 문자가 되었건 자신과 세상에 대해 궁금해 하고 질문할 줄 알아야 한다. 이런 점은 요즈음 인공지능 소위 AI의 실용화로 더욱 절감하게 된다. 질문만 할 줄 알면 그 해답을 찾는 것은 그래도 해결의 가능성이 있다. 문제는 질문할 줄 모르는 것이다. 질문하려면 ‘언어’를 알아야 한다. 필자는 범망경 <상권>에서 정리한 <10발취심>, <10장양심>, <10금강심>, <10지>의 용어 총 40개는 특히 ‘인간의 도덕 감정’을 개발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언어’라고 생각한다. 월간 『붓다』독자에게 범망경 <상권> 소개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2.
지난 6월호부터 <10지>를 소개하기 시작했는데, <10지>에서 다루는 덕목을 보면 모두 10개 조항으로 이루어져 있다. ①평등혜 체성지, ②선혜 체성지, ③광명 체성지, ④이염 체성지, ⑤혜조 체성지, ⑥체성 화광지, ⑦만족 체성지, ⑧불후 체성지, ⑨화엄 체성지, ⑩입불계 체성지이다.
①에서 ⑩까지 명칭에 모두 ‘체성지體性地’가 붙어 있다. 이 말의 뜻은, ‘사람의 본바탕에 갖추어진 성질’인데, 이런 성질을 대지大地에 비유한 것이다. 땅에서 모든 식물이 자라고 그것을 먹고 모든 생명체가 살아간다. 그렇듯이 ‘사람의 본바탕에 갖추어진 성질’에서 여러 감정이나 정서가 자라나고, 그것에서 출발하여 더욱 다양한 정서들이 생성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①에서 ⑩으로 줄인 것이다.
① <평등혜 체성지>에 대해서는 4월호에서 소개했지만, 기억을 살리기 위해 요점만 다시 적어본다. ‘평등한 지혜’에서 ‘평등’은 차별 없이 동일하다는 뜻이다. 그러면 어떤 지혜가 평등하다는 말인가? 사람은 누구나 일체가 공(空)임을 알 수 있는 지혜를 평등하게 갖추었다는 것이다. 모든 사안이나 현상들은 모두 다 인연생기因緣生起하는 것이다. 이렇게 알 수 있는 지혜가 원래 사람에게 평등하게 갖추어져 있건만, 어리석음으로 인해 그 지혜를 발휘하지 못한다. 그 결과 매사에 인과론적 분석과 검토가 제대로 되지를 않는다. 범망경 본문에서는 이를 <평등혜 체성지>라는 용어로 정리하고 있다.
위와 같이 ①<평등혜 체성지>로 보살의 실천을 완수하고 나면, 다음 단계로 ②<선혜善慧 체성지>로 진입한다. 여기에서 ‘선혜善慧’란, 말 그대로 ‘훌륭한 지혜’라는 뜻이다. 무엇을 ‘훌륭하다’라고 할 수 있을까? 범망경의 본문에서는, 첫째는 ‘4성제’의 이치를 제대로 보는 게 ‘훌륭한 지혜’라고 한다. 그리고 둘째는 ‘버림(捨)의 지혜’이다. 번뇌에 끌려가는 집착을 ‘버리는’ 삶의 추구이다. 셋째는 세상을 ‘자애(慈)’의 마음으로 바라보고 살아가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지난 6월호에서 설명한 내용을 간략하게 다시 소개한 것이다.
3.
이번 제7월호에서는 ③<광명 체성지>를 소개하기로 한다. 먼저 범망경 <상권>의 해당 본문을 인용하기로 한다.
“그대 불자여. 보리살타의 ‘광명 체성지’는 ‘삼매로 알게 된 이해를 분명하게 인식하는 지혜(三昧解了智)’를 사용하여 3세 일체 부처님의 법문인 12법품十二法品 속에 담긴 ‘명미구名味句’를 아는 것이다. 12법품이란 중송重頌, 별기別記, 직어直語, 게偈, 불청설不請說, 계율戒律, 비유譬喩, 불계佛界, 석사昔事, 방정方正, 미증유未曾有, 담설談說이다. 이 법의 체성(體性 본바탕인 성품)은 이름은 같지만[第一], 의미는 다르다.”
용어가 좀 어려우므로, 자세하게 설명을 해보기로 한다.
⑴ 첫째 ‘삼매로 알게 된 이해를 분명하게 인식하는 지혜(三昧解了智)’란, 삼매 수행을 통해 얻은 지식을 ‘삼매해三昧解’라 하고, 그 지식을 대상으로 그것을 명료하게 관찰하는 지혜를 ‘요지了智’라 한다.
⑵ 둘째 ‘12법품十二法品’이란, 이는 불경에 등장하는 법문의 형식을 품류品類에 따라 12가지로 나눈 것이다. 경전에 따라서는 ‘12분교十二分敎’라는 용어로 설명하기도 한다.
⑶ 셋째 ‘명미구名味句’에서, ‘명(名, Nāma)’이란 사물의 개념을 나타내는 단어(Name) 또는 명칭이고, ‘미(味, Vyañjana)’란 글자나 소리 그 자체인 문자(Letter) 또는 음절로 ‘문신文身’이라고도 하고, ‘구(句, Pada)’란 단어들이 모여 만들어진 문장(Sentence) 또는 구절을 뜻한다. 석가부처님께서 중생에게 법문으로 메시지를 전달할 경우, ‘문자(味)’를 모아 ‘단어(名)’를 만들고, 단어를 모아 ‘문장(句)’을 만드신다. 이 과정에서 생긴 형식을 모두 12종으로 그 품류를 나눈다.
⑷ 위의 인용문 맨 끝에서 “이름은 같지만 의미는 다르다”라는 문장도 설명이 필요한 대목이다. 이상에서 열거한 12품류의 법문들은 그 형식에 있어 모두가 ‘명미구名味句’로 구성된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12품류 각각마다 의미하는 바는 다르다. 간단하게만 설명하면, 독자 여러분께 예컨대 금강경을 읽어보셨다면, 수보리와 부처님과의 대화는 ‘담설談說’이다. 사구게 등의 게송은 ‘중송重頌’이다. 이런 불교의 기초교리는 사찰에 개설된 ‘불교대학’에 다니면 배울 수 있다.
4.
이상을 요약해 보면, 부처님 당시에는 ‘음성’으로 법문을 했고, 세월이 지나면서 그 음성을 승가 공동체에서 ‘암송’으로 전해 오다가, 다시 세월이 흘러 그것을 ‘문자’로 기록했다. 현재 우리가 접할 수 있는 것들은 ‘문자’이다. 그리고 그것은 ‘경전’으로 묶여 전해지고 있다. 경전마다 법문을 하는 형식은 위에서 소개한 바대로 대개 12종류의 양식으로 구성된다. 형식적으로는 같은 ‘게송’이라고 하더라도, 내용적으로 경전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면 이런 경전 속에서 전해는 내용이 다양하다는 것도 알겠는데, 그런 다양함 속에서도 일관되는 내용이 무언가 있을 게 아닌가? 있다. 그것이 바로 ‘연기법’이고, 대표적으로 12 조목으로 구성된 ‘12지支 연기’가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연기법을 잘 관찰하는 것이 ‘중도’라고 범망경 ③<광명 체성지>에서는 설명하고 있다. 여기까지는 초기 경전에서도 나오는 내용이다. 그런데 범망경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 내용을 아래에 인용한다.
“‘광명 체성지’에 들어가 신통력과 총지總持와 변재辯才로 마음마다 공을 실천하되, 시방에 펼쳐진 불국토 속에서 겁劫을 자유자재로 하게 부려 중생을 교화하여, 계속하여 그렇게 교화하기를 백 겁이고 천 겁이 다하도록 한다. 그 국토들 속에서 신통력을 기르고 부처님 앞에 예경하며, 법의 말씀을 여쭈어 받는다. 다시 6도에 몸을 드러내 일음一音 속에 무량한 법의 품류를 설하나, 중생은 각각 자기의 분에 따라서 마음에 바라는 법을 들을 수 있다. 고·공·무상·무아는 동일한 진리의 음성이지만 국토에 따라 달라, (듣는 이의) 몸과 마음에 따라 달리 교화한다.”
이상의 본문도 설명이 필요하다. 첫째 ‘겁劫을 자유자재로 하게 부려’라는 말은, 공간에 따라 겁劫 즉 시간이 다르다. 이 점을 설명한 것이다. 다음으로 ‘일음一音’이란, 부처님은 동일한 음성으로 법문을 하시지만, 듣는 중생들이 저마다의 인연으로 듣는다. 때로는 ‘원음圓音’이라고도 말한다.
말은 복잡하지만, ‘고·공·무상·무아’의 진리를 세상 속에 들어가 중생들과 더불어 살면서 실천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범망경 <상권>에 나오는 <10지> 중에서 ③<광명 체성지>의 설명을 간단하게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