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주스님 동국대 교수, 인천 정토사 주지
근래에 들어 우리 사회는 정치, 경제, 사회 전반적인 분야에 걸쳐서 혼란스럽고 어려운 시기에 처해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물론 정부는 정부 나름대로의 정책과 대안을 내놓고 있지만 문제는 국민들로부터 만족할만한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다는 데에 있다. 이와 같이 신뢰가 밑바탕이 되지 않은 채 정책을 내놓다 보니, 효과적인 면에서는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한 것 같다.
우리의 현실은 육신을 가진 이상 좋은 것이든 궂은 것이든 봐야 하고, 들어야 하고, 냄새를 맡는 등 온갖 경계에서 분별시비하면서 살아가게 된다. 중생들은 이러한 현실을 집착으로 살아가면서 어떤 이는 행복해 하고, 어떤 이는 불평과 불만이 가득한 고통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어느 누군들 행복을 원치 않겠는가? 중요한 것은 어떻게 행복을 창출해낼 지가 문제인 것이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행복의 파랑새를 찾아 오욕(五慾)을 추구해보지만 그것들은 결국 무상(無常)하기 때문에 허망하여 안심을 얻을 수 없다. 이러한 번뇌와 집착으로 가득한 중생의 삶을 ??불설비유경(佛說譬喩經)??에서는‘안수정등 (岸樹井藤)’으로 설명하고 있다.
“지난 과거 무량겁(無量劫) 전에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광야를 거닐다가 성난 코끼리로부터 쫓기게 되었다. 그는 의지할 곳 없이 두려움으로 달아났지만 마침 우물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우물곁에는 나무뿌리가 하나 있었기에 뿌리의 아래를 찾아 우물 가운데로 들어갔다. 하지만 흰쥐와 검은 쥐가 나무뿌리를 갉아대고 있었고, 우물 사방에는 독사 네 마리가 있었으며, 그 아래에는 독룡(毒龍)이 있었다. 그는 독용과 독사 그리고 나무뿌리가 끊어지려 하므로 두렵고 공포스러웠다. 벌들이 여기저기 날아다니고 있는 가운데 그 사람은 나무에서 떨어지는 벌꿀 다섯 방울을 받아먹는 맛에 취해 있었다. 그 때 광야에는 또다시 불이 나서 그 나무마저 태워 버렸다.”
왕이 여쭙길, “그 사람은 어찌하여 한량없는 고통을 받으면서도 저 보잘것없는 꿀맛에 탐심을 냅니까?”
이 때 세존께서 말씀하시길, “대왕이시여, 광야(曠野)라는 것은 지혜 없이 지낸 다겁생(多劫生) 동안의 기나긴 밤[無明長夜]이요, 그 사람은 범부중생(凡夫衆生), 코끼리는 무상(無常), 우물은 생사(生死), 험난한 언덕과 나무뿌리는 목숨[生命], 흰 쥐와 검은 쥐는 낮과 밤[日月], 나무뿌리를 번갈아 갉아대는 것은 순간순간 죽어 가는 것, 네 마리 독사는 사대육신(四大肉身), 벌꿀은 오욕(五欲), 벌은 잘못된 생각, 불은 늙고 병듦, 독룡은 죽음을 비유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왕 이시여, 마땅히 아십시오. 생로병사란 매우 두렵고 공포스런 것입니다. 따라서 항상 생각하고 알아차리셔서 오욕(五欲)의 경계에 휘둘리지 말아야 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네 인생은 마치‘안수정등(岸樹井藤)’의 비유처럼 진퇴양난에 빠져있는 상황과 같아서 어떻게 하면 편안하게 벗어나서 해탈열반을 성취할 것인가? 부처님께서 해탈열반으로 나아가는 법을 제시하신 것이 바로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의 실천이다. 즉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고[定] 바로 보며[慧] 부처님께서는 수행의 요체를 계정혜(戒定慧)로 제시하셨다. 수행자가 자신의 몸과 마음의 현상에 대해서 있는 그대로‘알아차림’은 정(定)에 해당하고, 알아차려진 대상을 정견(正見)으로 꿰뚫어보는‘바로 봄’은 혜(慧)에 해당하며, 이러한 지혜를 앞세워 몸과 말과 마음을 다스리는‘콘트롤’ 은 계(戒)에 해당하게 된다.
몸과 말과 마음을 콘트롤[戒]한다면 자신이 노력한 것만큼 행복과 해탈로 나아갈 수 있다고 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떠한 존재인가를 알아야 하겠는데, 자신과 우주의 참모습을 바로 본다면 인연 따라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존재로서 인과(因果)의 존재요, 변해 버리니까 무상(無常)의 존재 이다. 그리고 무상하기 때문에 영원히 변하지 않는 실체(實體)없는 무아(無我)이며, 공(空)의 존재이다. 또한 현상계의 오온(五蘊)은 본질인 공성(空性)을 여의지 않고, 본질인 공성(空性)은 현 상계인 오온(五蘊)을 떠나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오온즉시공(五蘊卽是空)이요, 공즉시오온(空卽是五蘊)인데, 이것을 중도실상(中道實相)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나를 바로 보면 인과·무상·무아·공·중도실상인데 범부 중생들은‘이 몸이 나다’,‘ 이 마음이 나다’라는 잘못된 견해로 아상(我相)을 내어 온갖 경계에 집착하면서 불평과 불만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수행의 요체를 계정혜(戒定慧)로 제시하셨다. 수행자가 자신의 몸과 마음의 현상에 대해서 있는 그대로‘알아차림[알]’은 정(定)에 해당하고, 알아차려진 대상을 정견(正見)으로 꿰뚫어보는‘바로 봄[바]’은 혜(慧)에 해당하며, 이러한 지혜를 앞세워 몸과 말과 마음을 다스리는‘콘트롤[콘]’은 계(戒)에 해당하게 된다.
이것은 마치 자동차를 운전할 때 전후좌우상하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잘 알아차려[알] 바른 판단[바]이 서면 그 바른 판단에 따라 자동차를 잘 콘트롤[콘]할 때 원하는 목적지에 안전하게 도달할 수 있는 것처럼, 수행자가 한 순간에‘알·바·콘’을 실천한다면 자신이 노력한 만큼 행복과 해탈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 사회의 난국을 헤치고 잘 사는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국민 개개인이 ‘알·바·콘’이라는 세 글자를 항상 가슴에 새기면서 믿음과 정성과 공경심으로 모든 이와 화합하고 각자의 책임을 완수할 때 건강하고 행복한 나라가 되리라 확신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