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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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을 섬기고 기도를 해야 하는 이유
권성현
방송작가, 자유기고가


보통 우리는 조상님께 짓는 선한 공덕은 자신에게 돌아온다고 믿고 있다. 이 세상에 없는 조상에게 왜 이렇게 공을 들여야 할까? 살아있는 분들께야 행동이라는 섬김으로 계속 공경이 마음을 표현하지만 이 세상에 안 계신 조상들에게는 제례라는 기도 의식의 방편으로 섬김의 예를 표현한다. 이런 제례의 형태는 자신의 업을 닦을 수 있는 기도의 형태로, 이것은 후손들을 생각하는 조상들의 배려라는 생각도 해본다.

지극한 마음은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는 힘이 되며 또한 모든 것을 변화시킬 수 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큰 힘은 바로 진실에 대한 믿음이다.

예전에 어떤 친한 지인이 뜬금없니 나에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종교에서 기도는 무엇일까?”
그때 나도 뜬금없이 이런 대답을 했다.
“깃발을 지탱해주는 깃대.”

원래 무엇이든 이룰 수 있게 하는 것은 자신의 마음일 것이다. 그런데 그 마음이 바람의 움직임에 따라 깃발처럼 움직이는데 종교와 기도라는 힘이 그것을 지탱해주는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절실하게 원하면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정작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일깨워 질 수 있는 것이 종교의 가르침일 것이다. 그것을 통해 바른 종교관과 바른 기도의 방법을 깨우쳐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종교에서는 종교를 믿는 사람을 신도(信徒)라고 하지만, 불교에서는 불자(佛子)라고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도 놈 자(者)를 쓰지 않고 자식 자(子)를 써서 불자라고 한다. 그것은 불교를 종교로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신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속에 불성(佛性)의 씨앗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다. 즉 누구나 자신 속에는 부처님의 성품을 가지고 있는데, 탐진치(貪)라는 먼지가 쌓여 그것이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탐(貪)은 탐욕, 탐애(貪愛)라고도 하며 자기가 즐기는 대상을 탐내서 구하고자 하는 것을 말한다. 진(瞋) 은 진에(瞋?)라고도 하며, 자기의 마음에 맞지 않는 대상에 대하여 반발하고 미워하고 분하게 여겨서 이러한 분하고 신경질나고 화가 나는 것을 말한다. 치(痴)는 우치(愚癡)라고도 하는데, 잘 알지 못하여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별하지 못하여 잘못을 저지르거나 옳고 그름을 제대로 알지 못하여 잘못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세 가지의 독으로 인해 자신 속에 있는 불성(佛性)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 우리들이다.

각자 가지고 있는 불성을 세상 밖으로 끌어내어 삼독(三毒) 청소하는, 마치 진공청소기의 역할을 하는 것이 기도라는 것이다.
자신에 대한 믿음을 확고히 하는 깃발을 가져야만 세상이 변할 수 있는 에너지가 충족될 수 있다.
기도란 바로 마음을 찾는 일, 괴로움을 벗어나는 일이다. 행복을 찾기 위해 한마음으로 부처님을 염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도를 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기도를 이루려면 먼저 확고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또한 그에 앞서 선한 업도 필요 하다. 악업을 짓고 악한 기도를 한다면 그 피해는 자신에게 돌아온다.

음력 7월 15일은 하안거 해제일이면서 백중 회향 일이다. 불가(佛家)에서는 우란분절일이라고 하여 백중 49일 전부터 인연 있는 사찰 등에서 기도에 입재, 이날까지 선망부모를 천도하는 재나 법회 등을 봉행 한다. 백중은 불교 5대 명절 가운데에 하나로 꼽힐 만큼 중요한 날로, 하안거 해제일과 겹쳐 그 의미는 더욱 크다고 할 수 있다. 선방에서는 하안거 동안 정진하면서 생긴 스스로의 허물을 대중 앞에 사뢰고 참회하는 자자(自恣)를 행하며, 불자들은 선망부모를 천도하는 우란분절 법회를 봉행한다.

우란분절은 부처님의 십대제자 중 신통제일 목련존자의 이야기에서 유래했다.
목련존자의 어머니를 아귀도에서 구하기 위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 고통을 구했던 사실을 적은 < 우란분경>에서 연유한다.

그 내용은 이렇다.
어느 날 목련존자가 신통력으로 천상천하를 살펴보니, 어머니가 생전에 지은 죄가 많은 탓으로 아귀지옥에 태어나서 음식을 먹지 못하고 있음을 보게 되었다.
이를 본 목련존자가 가슴 아파하며 음식을 가지고 가서 어머니께 올렸으나 그 음식은 어머니의 입에 들어가기도 전에 뜨거운 불길로 변해 버렸다. 이 모습을 본 목련존자는 대성통곡하며 부처님께 달려가 어머니를 구제해 달라고 권청하였다. 부처님은 목련존자를 측은하게 생각하시고 다음과 같이 설하셨다.

“어머니의 죄는 너무도 무거워 너의 혼자 힘으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 다만 시방에 계시는 대덕스님들의 법력을 빌면 가능 할 진대, 이들이 9순 안거를 끝내고 참회의식을 가지는 자자일(自恣日) 즉 7월 15일에 좋은 음식과 온갖 과실을 공양하면 이 스님들의 힘으로 살아 있는 부모는 물론 7대 선망부모와 친척들이 모두 고통에서 벗어나 백년장수하고 천상에서 쾌락을 누릴 것이다.”

백중기도는 부모에 불효한 죄를 참회하고 불은의 가르침을 주시는 스승님의 은혜에 감사를 표하여 스님들께 공양을 올리는 날이다. 한마디로 은혜를 갚는 날이다. 또한 백중기도를 통하여 업장소멸 및 선망조상, 태중아기영가의 왕생극락을 위하여 부처님 전에기도 올리고, 우리가 발원하는 선망조상님은 그 공덕으로 천도되는 것이다.

어머니를 구하겠다는 선한 마음으로 기도하면 이렇게 어머니를 구할 수 있는 공덕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 중생들은 한평생을 살아가면서, 알면서 혹은 생각지 않게 악업을 짓게 된다. 쌓이는 악업의 무거움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우리에게 항상 참회하는 생활을 하라고 이르셨다.

매일 매일 반성하는 자세로 사는 것이 재차 악업을 짓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라 설하셨다.
믿음에는 불가능이 없다.
광덕스님은 바른 기도에 대해 바른 소망을 세우고 일심으로 정진하여도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거든 무엇보다 먼저‘내가 부모님과 조상님에게 감사하고 있는가’하고 반성해 보라고 하셨다. 우리의 생명은 조상님·부모님과 통해 있으므로, 조상님과 부모님을 통하여 부처님의 위대한 공덕이 우리에게 나타난다.

불보살님들이 당신의 뜻을 이루시고자 할 때, 사람을 성숙시키고자 할 때는 반드시 그 사람의 조상과 부모를 매개로 한다. 조상과 부모를 매개로 하여 우리는 부처님의 무한생명에 이어져 있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조상과 부모님께 감사하지 않는다면 부처님 무한은덕의 통로를 가로막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부모님을 미워하거나 반항심을 가지고 있어서는 부처님께 아무리 기도해도 이루어지기 어렵다한다.

그 이유는 자신과 부처님을 이은 통로가 막혀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화엄경> 에서는「모든 과보는 업에서 일어나고, 모든 결과는 안에서 일어나고, 모든 업은 습기(習氣) 에서 일어나고, 모든 부처님 나심은 믿음에서 일어나고, 모든 공양거리를 변화하여 나타냄은 결정한 알음 알이에서 일어나고, 모든 화불(化佛)은 공경하는 마음에서 일어나고, 모든 부처님 법은 선근에서 일어나고, 모든 화신(化身)은 방편에서 일어나고, 모든 불사는 큰 원(願)에서 일어나고, 모든 보살의 닦는 행은 회향에서 일어나고, 모든 법계의 광대한 장엄은 온갖 지혜의 경계에서 일어난다」고 가르치고 있다.

믿음에 대한 힘의 원천은 비움에 있다. 언제라도 비우고 받아들이는 지혜에 있다. 그 어떤 결과 앞에서도 내 안의 중심을 잃지 않는 기도가 필요한 것이다.
기도는 열매를 맺기 위한 거름과도 같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