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상 준
고전연구실 뿌리와 꽃 원장
장자莊子의 「양생주養生主」를 읽노라면 소를 해부하는 포정의 몸짓이 그야말로 한 편의 영화처럼 떠오른다. 이 영화의 사실상의 주인공은 소도 아니고 소를 잡는 백정인 포정도 아니고 살결과 근육의 결과 뼈와 뼈의 틈새를 자유롭게 휘젓고 다니는 포정의 칼이다.
포정이 임금인 문혜군文惠君을 위해서 소를 잡는다. 그런데 그 솜씨가 우주 리듬에 척척 들어맞는다. 문혜군이 포정의 소 잡는 솜씨를 크게 칭찬한다. 장자의 원문을 함께 읽어본다.
善哉 선재
技蓋至此乎 기개지차호
庖丁釋刀對曰 포정석도대왈
臣之所好者道也 신지소호자도야
進乎技矣 진호기의
훌륭하도다.
테크닉이 이런 경지에 이르다니.
포정이 칼을 내려놓고 대답하였다.
제가 좋아하는 것은 테크닉이 아니라 도입니다.
그 도가 테크닉의 세계로 나아가서 펼쳐진 것 뿐입니다.
임금은 포정의 솜씨가 무슨 기술을 연마해서 소를 잡는 것인 줄 알고 소 잡는 테크닉을 칭찬했다. 테크닉 이전의 심오하고 웅숭한 도와 혼의 세계를 한 눈에 척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예나 이제나 비슷한 모양이다.
인문학자에게 “논문 참 잘 쓰십니다.” 하고 말하는 것은 칭찬이 아니라 모독이다. 논문으로 표현되기 이전의 혼줄, 글로 도저히 표현하지 못한 인문학자의 가슴 깊은 속의 보이지 않는 정신을 칭찬해도 될까 말까 한데 기껏 껍데기도 못 되는 글 솜씨를 칭찬하는 것은 저 문혜군과 다를 바가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문제는 “논문 잘 쓰십니다.” 하는 칭찬 한 마디에 그만 우쭐해지거나 입이 귀에 가서 걸리는 인문학자가 어쩌다가 더러 있기도 하다는 사실이다.
메시의 드리블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다. 만약에 훈련을 통해서 터득될 수 있는 기술이라면 지구촌에 메시같은 선수가 넘쳐날 것이다. 메시가 빈 공간을 뚫고 들어가서 슈팅을 날리는 것을 보노라면 장자에서 포정이 뼈와 뼈 사이의 빈틈을 따라 칼날을 놀리는 것이 자꾸 오버랩 된다.
박지성 선수의 체력을 두 개의 심장을 가진 사나이라고 칭찬하고 산소통이라고 좋은 말을 해준다. 무릎 부상 때문에 은퇴한다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필자는 두 개의 심장과 산소통 이전의 더 깊은 세계인 박지성 선수의 축구혼을 칭찬하고 싶다. 달리기는 세계적인 달리기 선수가 박지성 선수보다 훨씬 더 잘 달린다. 축구선수인 박지성 선수에게 달리기 선수에게 하는 칭찬을 하면서 요란을 떠는 일도 저 임금이 길고 깊지 못한 생각으로 던지는 말과 다르지 않다.
기술이 좋다는 칭찬을 받은 포정은 칼을 내려놓고 내가 좋아하는 것은 도이지 기술이 아니라고 대답한다. 도가 자연스럽게 테크닉으로 펼쳐지는 기술과 단순 연마를 통해서 얻어지는 테크닉은 결코 같을 수가 없다.
우리 시대의 인문학자들도 웅숭깊은 인문학의 혼불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될 것이다. 소설가와 수필가의 문장을 읽으면서 우리가 감탄하게 되는 것은 단순히 그 글 솜씨에 취해서가 아니라 그 작가의 마음이 내 가슴에 맞닿아서 뜨거운 피가 느껴지기 때문 아닌가.
포정이 문혜군에게 이어서 말한다.
始臣之解牛時 시신지해우시
所見無非牛者也 소견무비우자야
三年之後 삼년지후
未嘗見全牛也 미상견전우야
方今之時 방금지시
臣以神遇 신이신우
而不以目視 이불이목시
처음에 제가 소를 잡기 시작했을 때는 보이는 것마다 소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소를 잡기 시작해서 3년이 지난 후에는온전한 소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제 저는 정신으로 소를 만나고 있습니다.
더 이상 동태눈깔로 소를 보지 않습니다.
이제 포정은 눈을 감고도 앞에 있는 소를 마음으로 해부하는 것이 가능해진 것이다.
마음으로 해부한 길을 따라 칼날을 호흡조절을 통해 놀리는 것 뿐이다. 서툰 솜씨를 지닌 백정은 근육과 인대를 억지로 끊어내고 뼈다귀를 내려치는 바람에 소 잡는 칼을 한날에 한번 교체하거나 1년에 한 번 교체해주어야 하지만 포정의 칼날은 19년을 썼는데도 막 숫돌에서 갈아낸 칼처럼 날이 싱싱하다.
우리 몸속의 통증도 마찬가지이다. 지그시 눈을 감고 내 몸의 뼈를 따라가다 보면 관절이 정상상태보다 딱딱하게 굳어서 덩어리가 되는 바람에 정상적인 혈액순환을 방해하고 보통 기라고 부르는 에너지의 흐름을 막고 있는 부분에 느껴지기도 하고 보이기도 한다. 호흡을 지긋하게 조절하면서 그 부분에 따뜻한 마음을 보내면 서서히 굳어있던 덩어리가 풀려나간다.
각각의 장기도 마찬가지이다. 알코올만 들이부을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간에게 “알코올 분해하느라고 참 얼마나 노고가 많으십니까. 오늘도 불가피하게 제가 한잔 합니다.” 하는 마음을 보내면 간의 상태가 술 안 먹은 것보다 더 좋아질 수도 있다.
위장의 벽과 소장의 안쪽 벽과 대장의 굽어진 벽은 또 얼마나 알코올과 온갖 음식 때문에 고생을 하고 있는가. “고생이 많으신데 담배연기 들여보내서 미안합니다.” 하고 생각을 일으키면 소장 벽과 대장의 벽이 “뭘요. 얼마든지 들여보내셔요.”
하면서 씩씩해진다.
포정이 하는 말을 좀 더 들어보자.
彼節者有間 피절자유간
而刀刃者無厚이도인자무후
以無厚入有間이무후입유간
恢恢乎회회호
其於遊刃 기어유인
必有餘地矣 필유여지의
저 뼈 틈 사이의 관절은 빈 공간이 있지만
칼날에는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가 없는 것을 빈 공간에 집어넣으니
넓고도 넓어서
칼날을 놀림에
반드시 여지가 있는 것입니다.
막아야 하는 수비수들은 괴롭지만 휘젓고 다니는 메시의 드리블을 보는 관객은 감탄을 보낸다. 소의 뼈마디와 관절과 혈관과 모든 장기들이 이미 훤하게 보이는 상태가 된 포정은 칼을 여유롭게 놀린다. 소의 본래 결을 따라 그 소가 결합될 때의 결을 거슬러서 살살 풀어내기만 하면 되니 구경하는 사람의 눈에는 깜짝 놀랄만한 기술로 보일 수도 있는 것이다.
출판사에 오래 근무한 사람들은 교정초보자들이 안경을 두 개 쓰고 안간힘을 다해서 찾아도 찾아내지 못하는 오자나 탈자를 쓱쓱 종이를 넘기면서 바로바로 찾아낸다. 이 경지는 기술의 경지가 이미 아니다. “교정 잘 보십니다.” 하는 말은 이 분들에게는 결례일 수도 있다. 출판세계에도 기술을 넘어선 도의 세계가 있는데, 그 도가 튼 사람에게 무슨 교정기술자 취급을 하면 될 일이겠는가.
전에 언젠가 시를 쓰는 분을 만난 적이 있다. 시집도 여러 권 냈고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분이다. 무슨 말 끝에 필자가 반문을 했다.
“교수님! 누가 교수님에게 ‘시 쓰는 기술이 참 좋으십니다.’ 하고 말하면 무슨 생각이 드시겠습니까?”
“아, 예. 그렇군요.”
우리의 한 호흡이 칼날이고 한 생각이 칼날이다. 호흡이 가슴이나 어디에 걸려서 옆구리가 턱 막히는 것은 ‘호흡의 칼날이 무뎌져 있으니 호흡의 칼날을 잘 갈아보세요.’ 하고 몸이 알려주는 신호이다. 생각이 막히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마음이 무뎌지지 않게 호흡의 칼끝을 부드러우면서 예리하게 잘 가다듬고 살필 일이다.